얼음의 시간 (외 2편)/ 오명선
과녁을 그리던 수심이 묶여 있다
수면을 꽉 깨문 구름의 어금니들
밑줄 그어놓은 물의 잔뼈들이 이렇게 견고하다니,
지금은 얼음의 시간
잔물결이 맨발로 견뎌야 할 저 강은
등 돌린 밤이다
톱날로 베어지는 물도 있어
계절은 제 그림자 속에 가둬둔 울음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
저것은 침묵의 두께
내 무릎관절이 수천 번을 더 오르내려야 할
미완의 경전이다
앙다문 물의 입술
굳어버린 물의 표정은 싸늘하다
거인의 망치
망치는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창조의 도구다.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광화문 새문안길
키 22m 몸무게 50t의 사내
허공을 향해 망치를 내리친다
헐거운 도시의 무릎에 못이 박히는 소리
가로수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망치질 소리에 쩍 금이 간 허공으로
까치 한 마리가 밑줄을 긋는다
1분에 한 번 내리치는
끈질긴 저 망치질에 빌딩 숲이 들썩이고
우르르 쏟아낸 사람들을 다시 삼키는 회전문
도시는 지금 회전 중이다
귀에 못이 박히는 저 망치질 소리
회색 도시에 나타난 거대한 사내가 봄을 부른다
지루한 거리가 꽃을 내걸고
보도블록을 깨뜨리고
새 현수막을 거느라 꽝꽝 못질을 하고 있다
파본破本
빨간 스프레이가 담벼락을 X자로 그었어요
핏빛은 늘 불길해요 이곳은 결국 간이역이었죠
선로가 사라진 이곳, 어둠이 등에 뿌리를 내려요
잡동사니 퀴퀴한 냄새가 편안해요 엄마와 학교를 피해 숨던 침침한 책상 밑처럼,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듯, 창문에 돌을 던져요 파열음이 내 손목을 긋고 사라져요 나를 버린 가족을 향해 침을 뱉어요
골목을 걷어차던 발목이 다시 시큰거려요
나는 불온한 책, 세상은 끝까지 나를 읽어주지 않았죠
나를 한 장씩 찢어내던 산동네
내 것이 아닌 낯선 길들을 묻어버릴래요
포클레인이 길을 낸 산동네는 어둠의 울음만 키우지요
달빛에 말린 울음이 버석거려요
내 치부를 들춰본 저 밤을 받아먹으며 성장을 멈출래요
쪽수를 넘기려고 애쓰지 마세요
난장판인 나를 바꾸고 싶지 않아요
애초에 낙장(落張)으로 태어난 걸요
아직 할퀴어야 할 것이 많이 남았어요
—시집 『오후를 견디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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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선 / 1965년 부산 출생. 부산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오후를 견디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