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순간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2021년 11월, 경북 의성에 들러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조문국’이라는 고대국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조선, 삼국 시대는 물론이고 가야연맹의 여러 소국까지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였지만, 이 새로운 역사의 현장을 마주한 순간 흥분과 함께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경북 영천에 위치한 보현산 천문대와 은해사, 만불사를 둘러보는 여정 중 들른 의성은 그저 마늘의 고장, 컬링의 도시 정도로만 알고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조문국의 사적지를 둘러본후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한반도에 이런 찬란한 문명이 숨어있었다니!
2013년에 개관한 의성 조문국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금동관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본 신라 왕관보다도 더 정교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1960년 국립박물관 김재원 박사팀이 발굴한 이 유물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달된 고대 문명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특히 금 귀걸이와 목걸이, 그리고 다양한 토기의 완성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토기 제작 기술만 봐도 이미 고도로 발달한 수공업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순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이는 단순한 부족 집단이 아닌, 체계적인 계급 사회를 이룬 강력한 고대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였다.
조문국, 혹은 소문국召文國은 기원전 124년부터 기원후 245년까지 무려 369년간 현재의 경북 의성군 금성면 일대에서 번영했던 진한계 부족국가였다.
185년 신라 벌휴왕 2년에 신라에 복속되어 문소군聞韶郡이 되었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이름인 의성이 되었다. 하지만 이 짧은 기록 뒤에는 수백 년간 한반도 동남부에서 독립적인 문화와 정치체를 유지해 온 놀라운 역사가 숨어있다.
조문국의 존재는 여러 고서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비롯해 조선 실학자 김정호의 역사지리서 『대동지지』, 그리고 『읍지』와 조선 숙종 시기의 『허미수』, 『남당 박창화 선생 유고집』 등에서 조문국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비록 문헌 사료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는 오히려 고고학적 발굴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땅속에서 나온 유물들이 문헌이 침묵하는 부분을 웅변으로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박물관을 나와 금성산 아래 펼쳐진 374여 개의 고분군을 둘러보았다. 감동이었다. 높이 8m, 둘레 74m에 달하는 경덕왕릉 앞에 서니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깊이에 부끄러움이 일었다.
경주의 신라 고분에 비해 크기는 작으나 더 많은 숫자의 능陵이 산 능선을 따라 전개된 광경은 장관이었다. 새롭게 세워진 조문정召文亭 정자에 올라 내려다본 고분들의 모습은 마치 과거로부터 ‘우리를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고분의 규모와 부장품을 통해 볼 때, 조문국은 분명 상당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발달된 고대국가였다. 단순히 신라의 속국이 아닌,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가진 왕국이었던 것이다.
조문국을 둘러싼 다양한 전설 또한 흥미롭다. 고분을 처음 발견한 농부의 이야기, 의성현령의 꿈에 경덕왕이 나타나 고분을 보수하라 명했다는 전설, 이 지역에서 금이 많이 산출되었다는 이야기까지.
특히 김학 여왕이 딸에게 왕위를 물려준 한반도 유일의 모권제 국가였다는 전설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명확한 사료적 근거는 부족하지만, 이런 전설들은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소중한 단서들이다.
조문국 방문은 한반도 역사의 다양성과 깊이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아직도 수많은 역사의 진실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퍼즐 조각을 맞추며 마치 역사 탐험가가 된 듯한 설렘을 느꼈다. 1800여 년 전 조문국의 흙길을 걸으며, 그 시대를 상상해 보는 순간의 전율은 온몸으로 퍼졌다.
역사는 교과서 속 딱딱한 연대기가 아닌, 발견의 기쁨과 경이로움이 가득 살아있는 이야기다. 조문국은 바로 그런 역사의 생생함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한반도 곳곳에 숨어있는 이런 역사적 보물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역사 공부가 아닐까. 조문국이 그랬듯이,우리를 기다리는 또 다른 잃어버린 왕국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출처] 잃어버린 왕국, 조문국을 찾아서(기행 수필)|작성자 다른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