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뭇 낯설다. 구지뽕나무 아래는 질퍽하게 물기가 배어나고 삐죽이 내민 달래는 수입농산물처럼 느껴진다. 주인집 할매가 두고 간 장독대에도 좀처럼 손길이 가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정이 들까. 비가 새고 기둥이 기울어져 폐가나 다름없는 이 집으로 이사하던 날, 자식들은 침묵했다. 나는 동서와 애써 목울음을 삼키며 걸레질을 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읽었을까. 시아버님은 이 집도 겨우 구했다며 무덤덤한 척 당신의 소품들을 정리했다.
백여 년이 깃들었던 시댁이 난데없이 도청소재지에 편입되면서 강제추방처럼 쫓겨나 이곳으로 왔다. 하늘엔 비행기가 영상으로 지도를 측정하고, 무덤에까지 강제 이장 표지판이 꽂히자 끝끝내 지켰던 집을 비우고 총칼 없는 전쟁 속에 합류했다. 인근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입맛에 맞는 땅을 구해 집을 짓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겨우 차선의 방책으로 신도시에 편입되지 않은 마을의 빈집을 구해 세를 얻었다. 졸지에 집도절도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안동시 풍천면 도양2리 참나무골 606번지는 나의 시댁이었다. 23년을 며느리로 드나들던 집이었다. 그러니 나도 허허롭긴 마찬가지 아니었겠는가. 이제 한 폭의 연하장으로만 남아있는 그 집을 떠올린다. 결혼하고 처음 맞은 설날에 내린 폭설이 잊히지 않는다. 무릎까지 빠진 두 발 빼랴 익숙하지 않은 한복에 치맛단 거머쥐고 설산을 헤쳐 나가는 고생을 누가 알려나.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저만치 불빛이 어른거리더니 시어머님이 등잔불을 밝히고 마중을 나오셨다. 얼마나 걸었을까. 등성이를 내려서니 집 두 채가 산을 마주 보고 있었다. 바깥마당을 지나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자 ㄷ자형의 기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문간의 서쪽에 마구간과 헛간이 보이고 작은 사랑방과 마루방 사이에 툇마루가 놓였다. 장중함도, 구중궁궐도 아니지만 나지막하고 단아한 집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자고 일어난 세상은 환희였다. 바깥마당까지 비질이 나 있는 길을 따라 요강 단지를 두엄 더미에 쏟아 붓고 고개를 드니, 눈 쌓인 상수리나무는 병풍이나 진배없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시어머님이 세수하라며 담아 놓은 물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굴뚝 근처 가죽나무엔 까치가 날갯짓하자 눈 뭉치가 떨어졌다. 디딜방아가 마구간 옆에 놓여있고 사랑방 옆에 큰 바위를 지나면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양우리가 있었다.
예천 밤실로 시집간 첫째 시고모님도, 서울로 시집간 둘째 시고모님도, 시할머니와 시어머님의 해산달이 같아 고부간에 몸조리했다던 사소한 역사를 이 집은 어디쯤에서 지워줄까. 시동생과 남편이 밤만 되면 나무를 타고 올라 하늘소를 잡아 오던 옛날이야기도 껴안고 있을까. 수줍음 많고 손끝 야무지시던 어머님도 십여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보면 집은 가족들의 희로애락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몸이 기억하는 옛집으로 가는 중이다. 아직은 고스란히 아버님의 문패를 달고 있으니 우리 집이다. 마당엔 풀이 무성하다. 길이라는 길은 모조리 지워졌지만 왕보리수나무는 실한 열매를 주저리주저리 달고 있었다. 아씨부추는 잡초 속에 무성하고, 담벼락 밑에 골담초는 누런 꽃을 피워 놓았다. “아무리 사람이 살지 않아도 그렇지 한 번씩 들러 풀이라도 좀 뽑아 놓으시지.”라는 혼잣말을 들었을까. 가죽나무에 긴 장대를 올려 꽈배기로 틀어 올리시던 아버님이 한마디 하신다.
“뽑으면 뭐 하노 언제 깔아뭉개질지 모르는 집이잖는가. 어여 내려가자.”
무너져 내린다는 게 뭘까. 백구두에 베레모 쓰고 팝송이라도 몇 구절 부르고 나면 아낙네들이 줄을 섰다며 자랑하셨지. 그 호기도 잃어버리고 줄곧 줄담배를 피워 물며 저만큼 옛집을 벗어난다. 태산준령 같은 당신도, 80 평생을 살았던 집도, 팽팽했던 빨랫줄도 삭아 버렸다.
한해 전만 해도 이곳에서 아버님의 풀물 묻은 옷과 수로에서 두 발로 칭칭 치댄 이불을 말리지 않았던가. 뒤꿈치 터진 양말을 빨아 울타리에 걸쳐두고 남새밭에서 온갖 푸성귀를 뜯는 날에는‘언젠가는 꼭 이곳에 귀농해야지’라며 마음먹지 않았던가.
기억의 봇물이 터졌다. 초저녁에 한잠 자다가 자정 무렵 일어나면 댓잎이 빈 벽에 수묵화를 그렸다. 수돗물 콸콸 나오지 않는다고 한숨 내쉬고 변소에 앉아 있을라치면 토란대 수런거리는 소리에 걸음아 나 살려달라고 안마당으로 뛰었다. 대청마루에서 안동식혜에 넣을 사과에 문양을 찍고, 곶감에 잣을 넣어 말던 어머님의 모습이 보인다. 산비둘기 소리 들으며 카네이션을 심었던 무덤은 먼 곳으로 떠나고, 이제 그 자리에 주목만이 사형선고 받아 놓은 옛집을 지킨다. 집이 아픈 게 아니라 거슬러 왔던 추억이 아프다.
“야들아 여태 안 오고 뭐하노? 빈집에 뭔 구경한다고 그리 혼을 빼고 섰노.”
당신은 슬픔 대신‘흠흠’헛기침이다. 전기도 수돗물도 끊어지고 다녀갈 사람 없는 집에 자물쇠를 채우고 내려오는 길에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아 자꾸 돌아다본다. 전쟁통에도 살아남았건만 왜 멀쩡한 내게 부고장을 주느냐고 생떼를 쓰는지 집이 쩍쩍 마른 울음을 삼킨다. 추운 겨울이 되고 난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 집을 떠나고서야 그리워짐을 알았다.
옛집에서 돌아왔다. 남의집살이는 밤이 되어도 서러운지 당신 방에 오래도록 불이 켜져 있다. 느닷없이 남편이“풀 뽑으러 갈래?”라고 물어왔다. 낮에 잠시 다녀온 집이 밟혔나 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의지한 채 자정이 넘은 봄밤에 우린 내일 사라질지도 모를 집 마당의 무성한 풀을 뽑아내느라 온몸이 땀에 젖었다. 갈고리를 들고 풀 더미를 끌어내리는 팔뚝에 봄바람이 다녀가고 드문드문 소쩍새가 부고장을 물고 와 ‘집 없다 집 없다’라며 울고 간다. 아직은 우리 집이라고 훠이훠이 팔을 뻗어 내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