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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읽기/고재종의 문정희론
부처를 버리고
돌아가는 길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란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산화개사금(山花開似錦) 간수심여람(澗水愖如藍)! -“산에는 꽃이 피어 비단을 짠 듯하고, 골짜기의 물은 깊어 쪽빛이라네”라는 말로『벽암록』에 나온다. 한 수행승이 대룡선사에게 물었다. “형체가 있는 것은 부서져 버리게 마련인데,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는 없는 것일까요?” 이에 대룡선사가 대답했다. “저 산에 만발한 꽃을 보아라. 꼭 비단으로 산을 덮은 것 같지 않느냐. 저 골짜기에 가득 차 흐르는 물을 보아라. 쪽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 참으로 그림같이 아름답고 격조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산에는 꽃이 피어 비단을 짠 것 같지만 며칠 못 가서 지고 만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골짜기의 물도 쪽빛 같지만 끊임없이 차고 흐른다. 장강(長江)의 앞물은 뒷물에 의해 밀린다. 산의 꽃이나 골짜기의 물은 빠르고 느린 차이는 있지만 움직여 옮겨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옮겨감”이야말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라고 대룡선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삼라만상의 무상성(無常性)과 시간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덧없이 스러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문정희 시인은 이를「돌아가는 길」로 본다. 영겁회귀의 길로 본다. 시적배경이 되고 있는 인각사(麟角寺)는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있는 절이다. 지금은 퇴락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지만 단군의 기원을 처음으로 밝히고 우리 시의 원류인 사뇌가를 기록한 일연의『삼국유사』가 씌어진 성스런 가람이다. 어느 날 시인은 인각사에 가서 거기 반쯤 깨어져 달아난 보각국사의 비석과 비바람에 눈과 코가 뭉개진 돌부처를 본다. 그런데 겨우 흔적만 남은 석불을 보며 시적화자는 오히려 그 석불이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고 역설을 구사한다. 이제야말로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시적 직관이다. 누구나 부처가 되기만을 소망할 터인데, 석불은 이제 눈과 코가 달려있는 부처이기를 그만 두고 원래의 돌, 즉 참다운 실재(實在)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절대적 완성이라고 보는 것은 밑바탕에 삼라만상의 무상관이 자리할 때만이 가능하다. 아니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했으니,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그냥 그 "자연"의 일은 초시간(超時間)의 세계, 곧 영겁회귀의 섭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엔 그 석불도 어떤 인연의 시간이 있어 하나의 석재덩어리에 불과한 몸에 부처가 새겨진 후, 천년 인각사 뜨락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을 터이다. 그리고 그 부처 노릇이 깊고 성스럽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게 곧 감옥이기도 했던 부처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니, 여기에 이제 무슨 시간이 더 필요하겠는가. 부처도 결국 무상일 뿐이니 말이다.
일상성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위선과 엉큼함을 거침없이 고발하는 통렬함을 보여주던 문정희 시인이 이 시에선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떤 통찰의 경지에 들어선 세계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류의 시가 흔히 범하기 쉬운 선시(禪詩)풍의 불가해한 아포리즘에 쉽사리 함몰되지 않고, 인각사 뜨락의 부처라는 구체적 대상을 통해서 부처까지를 포함한 삼라만상의 무상성과 영겁회귀의 섭리를 아주 탄탄한 시적 문법 속에 구축한 그 솜씨마저 깔끔하다. 궁극적으로 시가 종교를 지향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종교성과 예술성과 삶의 고차원적 회통과정을 보여주는 이 시가 이후 문정희의 대표작이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