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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하나 없이 부자연스럽게 칠해진 새카만 하늘과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황금빛 모래시계. 선명하게 반짝이며 휘날리는 금빛 모래알.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사막 저편, 장엄한 오로라를 풍기는 모래시계 위에서 끼익-끼익-거대한 물레를 굴리고 있는 노장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 물레 속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실 한 가닥을 보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노장은 비쩍 말라붙은 손을 가져가 그 실을 매만져보더니 낡은 웃음을 꺼이꺼이 터트렸다.
“그래…, 여기 있었구나.”
하얀 실을 매만지던 노장은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였다. 드넓게 펼쳐진 금빛 사막, 하얀 실을 뽑아드는 노장의 입 속에서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천천히 메아리쳤다.
* * *
로데니아 세계는 저주 받았다. 100년 전 상공 위로 떨어진 한줄기의 빛의 시작으로 대륙의 곳곳에선 자생할 수 있는 마나 크리스탈들이 이유 없이 그 푸른빛을 잃고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마나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그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각 대지에 흩어져 크리스탈들을 조사하려 했으나, 이미 죽어버린 크리스탈은 붉은 빛을 풍기며 산자의 영혼을 앗아가는 흉물이 되어있었다.
로데니아는 마나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대륙, 마나 크리스탈은 그 힘을 무한히 생산해 로데니아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재앙이 시작 된 이래로, 세계에 있는 150개의 크리스탈 중, 이미 12개가 변질되거나 소멸되어버리고 말았다. 각 국의 정상들은 이 사태에 대해 많은 의논을 해 그 대안을 마련해보려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땅이 저주를 받아 종말이 찾아 온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세계가 무너지건 말건 로데니아의 메샤 대륙 남서쪽에 위치한 로반왕국에선 두 남자가 기다란 창가 앞에 마주앉아 의미 없는 체스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지루한 얼굴로 체스를 놓던 남자가 말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맞은편 사내를 똑바로 주시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금발이 삐죽하지만 부드러운 층을 이루고 있었으며 무미건조한 푸른 눈엔 그 어떤 감정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안 있으면 네 생일이로구나.”
붉은 벨벳이 덮인 두툼한 의자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남자의 말에 남자를 주시하던 사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햇살에 반짝이는 레몬 빛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남자는 사내의 눈빛에 보랏빛 눈동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후후, 왜 그러지?”
남자는 의자에 푹 담갔던 허리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맞은편에 앉은 사내의 얼굴을 향해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나갔다. 으르렁 거리던 사내는 다가오는 그 손을 거절하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남자는 예상한 듯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 턱을 괴고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혹, 그리운 얼굴들이라도 생각 난 것이냐.”
사내는 남자의 진한 미소에서 새어나온 악담에 제 푸른 눈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남자는 그 것이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어보였다. 사내는 그 증오스런 웃음을 들으며 속에서 들끓는 제 분을 꽉 움켜쥐어야 했다.
* * *
신의 축복을 받았다 전해져 아가페라 불리는 머나먼 서쪽 땅, 말콤. 유서 깊은 전통과 삶의 방식으로 그들만의 문화를 꾸려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다. 하늘에 떠있는 수천 개의 별 아래, 태어난 아이들은 모든 이들의 축복과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성인이 되어왔고 내일, 나지막한 언덕 위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막사 안에서 잔뜩 들떠있는 이 소녀 역시 행복한 성인을 맞이하려 한다. 검은 머리에 초롱초롱한 흑 진주를 눈에 품은 소녀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이불 속에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연아, 그만 자야지?”
옆에서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콧노래 소리에 중년의 남성이 소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소녀는 그 간지러운 입맞춤에 몸을 부르르 떨다 반짝이는 흑 진주를 떼굴떼굴 굴려 아버지의 손에 깔끔히 손질된 식복을 바라보았다. 새 하얀 퓨렛 위로 속이 조금 비치는 기다란 몰렛을 걸쳐 형형색색의 허리띠를 조여 입는 말콤의 성인식 복, 그 어떤 소녀라도 저 식복을 입는다면 어엿한 성인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흐뭇해진 소녀는 고개를 홱 들어 다정한 미소를 띠는 중년 남성을 올려보았다.
“아빠, 나 내일 저거 입는 거야?”
중년 남성은 소녀의 질문에 허허 웃어주며 그만 그 가슴께를 토닥여주었다.
“그래그래, 오늘은 이만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응!”
소녀는 중년 남성의 다정한 속삼임에 잠을 청하려 두 눈을 꼭 감았지만, 가슴속에서 톡톡 터지는 설렘 가득한 마음에 도무지 잠을 이룰 청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음날 소녀는 피곤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커다란 하품을 손으로 가려야만 했다. 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를 나섰다.
막사를 나와 밖을 바라본 연이는 나지막한 언덕 아래 펼쳐진 광경에 그만 눈물이 터져 나와 버렸다. 언덕 아래 드넓게 펼쳐진 말콤은 모두가 힘을 합쳐 연이의 성인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하늘에 줄을 달아 형형색색의 꽃 줄을 늘어뜨려 놓고, 식이 진행될 제단은 촌장의 지시에 따라 엄격하게 꾸려지고 있었다. 이에 연이는 저가 태어난 이 땅, 말콤에서 느껴지는 사랑에 목이 메여 올 수밖에 없었다. 이 가슴 벅차도록 차오르는 이들의 사랑을 어찌 눈물 없이 받아낼 수 있단 말인가.
“흑…흑흑….”
연이는 미소를 지으며 기쁨에 찬 눈물을 흘려보냈다. 행복했다. 이 말콤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제 마을이 사랑스러웠다. 마침 어깨에 장작을 짊어지고 올라오던 연이의 아버지는 연이가 주저앉아 우는 모습에 깜짝 놀라 장작을 떨어트려 한달음에 달려갔다.
“여, 연아, 왜 그러니?”
아버지는 연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들썩이는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연이는 두 팔을 벌려 제 아비의 품을 꼭 파고들었다.
“너무, 너무너무 기뻐서요. 아빠, 나 말콤에서 태어난 게 너무너무 기뻐요.”
아버지는 연이의 벅찬 감동에 멋쩍은 웃음을 지어주었다. 큰일이라도 났나 싶었더니…, 작은 한숨을 내쉰 아버지는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눈물을 흘리는 제 딸을 아무 말 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제 딸 몰래 작은 눈물을 훔쳐내었다. 태어나자마자 제 어미를 잃어 그 상처가 딸을 좀 먹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연이는 이렇게 성장해주었다. 말콤의 사랑을 받아 축복을 받아 이렇게 어엿한 성인이 되어 주었다.
‘나 역시, 기쁘구나, 딸아.’
아버지는 가슴 속에 차오르는 사랑스러움에 제 품을 파고든 연이를 꼭 안아주었다.
성인식 시작까지 이제 30분을 남겨두고 있었다. 연이도 이제 막 막사에서 식복을 말끔히 치려입고 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가려 했다. 막 막사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 할 때, 눈 앞에 웬 커다란 손이 슥 나타났다. 깜짝 놀란 연이는 그 손을 따라 고개를 홱 들어보았다.
“연아.”
제 아버지였다. 막사 밖에서 저가 옷을 차려입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는 연이가 잡아 주지 않은 손이 머쓱한지 다시 한 번 흔들어보였다. 그에 연이가 밝게 웃어주며 그 위에 제 손을 얹어주었다.
언덕 아래서 연이가 꽃길을 따라 내려오길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여기저기서 축복의 휘파람을 휘휘거리며 제 아비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소녀를 맞이해주었다. 연이를 제 딸처럼 여기던 아주머니는 그 자랑스러운 모습에 눈물을 훔쳐내었고, 얼마 전 성년이 된 이들도 지나가는 연이의 손등에 키스를 남겨 이 사랑스런 말콤에서 태어난 자신을 잃지 말라며 격언 했다. 이윽고, 제 아비가 연이의 손을 놓아야할 때가 왔다.
“클로로 언덕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하 연은 이제 그 손을 놓고 제단에 올라서 거라.”
커다란 바위 위, 저물어가는 노을을 뒤로 새워진 웅장한 제단 위에서 촌장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제 아비의 손을 놓고 천천히, 제단에 올라선 연이의 하얀 식복에 노을빛 수채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촌장은 올라선 연이의 머리에 도라지꽃으로 엮은 화관을 곱게 씌워주었다. 그리고 연이는 그 앞에 두근대는 마음을 품고 무릎을 꿇었다. 촌장은 참 곱게 자란 연이를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식을 진행해 나갔다.
“클로로 언덕의 자제 하 연, 그대 말콤의 축복 속에 태어나 어미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대는 그 미소를 잃지 않고 이 말콤 속에서 순수하게 빛나주었다.”
촌장은 땅을 짚던 지팡이를 들어 올려 연이를 가리켰다.
“하 연. 오늘이 지나면 그대는 성인이 될 것이다. 그대가 이제까지 받았던 말콤의 축복을 또 다른 생명에게 내려줘야 할 의무를 부여받은 것이니라. 그대의 길을 그대가 개척해 나가며, 그대가 선택해 나가야 함이라. 때론 매정하고 때론 잔인 할 수도 있을 것이야. 허나, 하 연이여 잊지 말거라, 그대는 이 축복받은 말콤의 자식임을. 그대에겐 이 말콤의 지혜와 사랑이 깃들여있단 것을.”
“네.”
촌장의 격언을 받아든 연이가 대답함과 동시에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탄성은 연이를 향한 탄성이 아니었다.
“저, 저게 뭐지!?”
입이 떡하니 벌어진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거대한 빛을 가리켰다. 아직 고개를 들지 않은 연이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그 하얀 빛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제단 아래에 서서 떨어져 내리는 빛과 연이를 번갈아보던 아버지는 어쩐지 위험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어 황급히 제단을 향해 달려 나갔다.
소란스런 소리에 막 고개를 들어 올린 연이는 멀리서 달려오는 제 아비의 놀란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
“연아—!”
이윽고, 하늘의 밝은 빛은 연이를 둥글게 감싸버렸고, 연이는 새하얀 빛에 휩싸여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말콤과 제 아비의 모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
최선을 다해 손을 뻗어 보았지만, 그 새하얀 눈부심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연이는 사라져가는 제 아비의 곁에 단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다. 그리고 서서히 제 눈을 찌르던 눈부심 사그라져 가자 연이는 천천히 제 눈을 보호하던 손을 떼어 내었다. 캄캄한 어둠. 제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 말콤이 아니었다.
‘…여기는?’
고개를 든 순간,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연이의 새카만 눈동자가 요동쳤다. 꼭, 검은 물감으로 빈틈없이 칠해놓은 것 같은 밤하늘, 그 하늘엔 반짝이는 별 대신 흘러내리는 모래시계가 가득했다. 그리고 저 멀리 사막 정점에서, 끼익-끼익-물레를 돌리는 그 장엄한 손짓에 연이의 새카만 눈동자가 사로잡혀버렸다.
끽….
연이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노장의 손이 뚝 하고 멈췄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연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황금빛 눈동자. 연이는 그 눈을 본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온몸이 제 의지와는 관계없이 떨려왔고, 제 몸을 지탱하던 두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이는 저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영문을 몰랐다. 말콤의 축복만을 받고 자란 연이는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이 ‘공포’ 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연이가 눈을 깜박인 순간, 노장은 순식간에 연이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그는 말라붙은 손가락을 뻗어 연이의 턱을 잡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훌륭하군. 공포라는 감정조차 알지 못하는 깨끗함. 과연 클라우드의 창조물인가. 낄낄낄. 아, 아깝군, 아까워. 그냥 썩히기엔 너무나 아까워.”
연이는 노장의 말 따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노장이 뒤집어 쓴 로브 아래로 드러난 검은 잇몸, 썩어 문드러진 손가락. 그 끔찍한 형상과 극도로 치미는 이 감정 앞에 그저 온 힘을 다해 떨고 있을 뿐이었다. 노장은 새파랗게 질린 연이의 검은 눈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아, 그렇지. 좋은 생각이 났어.”
황금빛 눈이 가늘어진 노장은 차가운 손가락을 펼쳐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음하하하하! 그래, 그래 맞아! 그 시건방진 녀석 벌주기엔, 너 만한 재목이 없지.”
노장의 광기어린 웃음과 함께 노장의 차가운 손이 연이의 심장을 푹 파고들었다. 공포에 절어있던 연이는 제 심장을 파고든 아픔조차 느끼질 못했다. 곧이어 연이의 심장이 푸른빛으로 밝게 빛나오더니, 곧 그녀를 감싸 안아 노장이 서있던 공간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럼, 어디 한번….”
노장은 연이가 사라진 곳에서 등을 돌려 다시 제 물레가 있던 곳으로 도약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품속에서 아까 뽑아들었던 하얀 실을 다시 끼워 넣어 다시 천천히 물레를 돌려나가기 시작했다. 고요한 사막, 하얀 실의 운명을 알리는 물레소리가 노장의 손에서 울려 퍼져 나갔다.
* * *
로데니아 세계의 상공, 밤하늘에서 떨어진 새 푸른 빛 덩이가 메샤 대륙의 남서쪽에 떨어져 내렸다. 모두가 잠들어 있던 시각, 거리에서 밤일을 하던 사람들이 상공을 향해 손가락질해댔고, 이제 막 일어날 준비를 하려던 밤 짐승이 빛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푸른 빛 덩이가 떨어진 곳은 로반왕국 인근 밤나무 숲, 푸른빛을 발하며 떨어진 소녀가 제 심장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뭐, 뭐였지?’
사색이 된 소녀는 숨을 몰아쉬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분명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단지 저릴 만큼 아파오는 제 심장과 다리가 풀려 일어설 수 없는 제 몸이 위험했던 순간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연이는 익숙하지 않은 밤공기에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나무와 잡초들이 소녀 주변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연이는 문득 제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느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퓨렛을 들춘 순간 사색이 된 연이는 망설일 틈도 없이 비명을 꽥 질러댔다.
“꺄아아악!”
제 다리를 샤샤샤샥 타고 올라오는 커다란 바퀴벌레에 연이가 다리를 폴짝폴짝 뛰었다. 그 바람에 중력을 이기지 못해 땅에 떨어져나간 바퀴벌레는 재빨리 수풀 속에 숨어버렸고, 울상이 된 연이는 한시라도 빨리 이 숲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벌레들과 싸워가며 수풀과 나무 사이를 헤쳐 나가다 보니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빛을 자세히 살펴본 연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수풀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빨라져갔다.
‘마을! 마을이다!’
저 빛이 분명 말콤일 것이라 생각한 연이는 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해 달려갔다. 이윽고, 마지막 수풀을 벗어난 연이는 걸음을 뚝 멈추고 얼굴에 띠던 화색을 점차 지워나갔다.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빨간 벽돌 건물이 줄지어 늘어서있었고, 길거리 곳곳엔 어쩐지 헬렐레 꼬부랑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겨우 사람이 있는 곳을 발견한 연이는 말콤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기 위해, 로반 왕국의 수도 엘라리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나무 숲에서 내려와 거리를 거닐던 연이는 사람들에게 선뜻 말콤으로 향하는 길이 어디냐,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무기력하진 않았다. 연이는 숲에서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사람을 향해 웃으며 다가갔지만, 저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피하려는 사람들의 행동에 점차 자신감을 잃어간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얘, 저 머리 색좀 봐.”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연이와 생김새도 다를뿐더러 쓰는 언어가 완전히 달랐다. 어디선가 들어본 언어도 아니었다. 그녀의 세상에서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아주 생소한 말들이었다. 그래서 연이는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려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꼬르르륵.
연이는 걸음을 멈추고 우렁찬 소리를 내는 제 배를 문질러 보았다. 배가 고팠다. 연이는 문득 숲을 헤쳐 나오느라 더러워진 퓨렛 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아빠가 장만해 준 옷인데….’
숲을 헤집고 나오느라 신발은 물론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연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제 아버지는 저를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아마, 저가 없어졌다며 울고 있을지도 몰랐다. 문득 가슴이 시큰 아파온 연이는 놀란 얼굴로 제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연이는 이 생소한 감정에 새카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문득 이 낯선 공간이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진 연이는 이리저리 고개를 휙휙 돌리다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거리를 벗어났다.
“하아…. 하아….”
밝은 거리를 벗어나 외진 곳에 등을 기대선 연이는 거칠어진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달빛아래, 반짝이는 구슬들이 연이가 주저앉은 바닥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연이는 그 구슬이 제 눈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얼굴에 손을 가져다댄 연이는 손끝에 묻어난 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찰나의 순간,
혼자 남겨진 연이의 가슴 속에서 더는 참아낼 수 없는 서러움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흐읍…!”
연이는 흐느낌이 터져 나오려는 제 입을 두 손으로 막고 미간을 찌푸려 제 눈물샘을 꼭 틀어쥐었다.
“흐윽….”
허나, 이미 밀려든 서러움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막으려 해도 흐느낌은 자꾸만 터져 나왔고, 앞만 미간을 찌푸려보아도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낯선 시선들, 저를 둘러싼 낯선 공기, 이질감. 말콤에선 느낄 수 없었던 외로움이란 감정 앞에 하 연, 그녀는 제 아비의 품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리고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던 연이의 위로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가씨?”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어깨를 떨고 있는 연이 앞에 험상궂게 생긴 두 남자가 나타나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연이가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입을 꽉 틀어막은 두터운 손과 복부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충격에 그만 눈을 부릅뜬 연이는 서서히 흐릿해져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제 아비를 그립게 불러보았다.
* * *
이른 새벽, 잔뜩 들뜬 얼굴로 흐트러진 옷가지조차 가다듬지 않은 남자가 궁전의 복도를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어제 저녁 경매장을 뜨겁게 달굴 귀중한 상품을 손에 넣은 그는 이 희소식을 폐하께 전해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폐하께 전해드린다면 분명 흥미를 가질 것이고, 잘만하면 엄청난 황금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붉은 문 앞에 멈춰선 남자는 폐하를 알현하기 전 옷 매무새를 가다듬어 제 허리를 꼿꼿이 세운 후 조심스레 손을 들어 가벼운 주먹을 움켜쥐었다.
똑똑똑.
“…누구냐.”
그가 조심스레 노크를 하자 문안에서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불쾌해 하는 눈치였다.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신분을 밝히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폐, 폐하. 경매단장 마르코입니다.”
“마르코? 네가 여긴 웬 일이지?”
신분을 밝혔음에도 경계를 풀지 않는 폐하의 목소리에 남자는 온 몸이 빳빳해져왔다.
“어, 어제! 아주 굉장한 물건을 들였습니다! 분명, 오늘 경매장이 뜨겁게 달궈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죠!”
폐하 앞이라면 언제나 이렇듯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남자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황금에 어떻게든 폐하의 흥미를 끌어보고자 안달이 나있었다. 제 방 안 침대 위에서 여인의 잘록한 허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던 레몬 빛 머리의 남자는 밖에서 들려온 이야기에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손길을 느끼던 여인은 요염한 고개를 들어 그의 허리까지 내려온 레몬 빛 머리칼을 제 입술로 가져가 키스했다.
“…그래?”
보랏빛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여인의 욕망어린 눈빛을 내려 보던 남자가 나지막한 반응을 보였다.
“예, 예! 검은 머리에 눈동자가 새카만 특이한 물건입니다요!”
슬슬 입질이 오는 건가 싶어 헤실헤실 거리던 남자는 ‘굉장한 물건’ 에 대한 정보를 어필했다. 그리고 남자의 어필은 아주 성공적으로 폐하의 흥미를 끌어내고 있었다. 줄곧 여인만 내려다보았던 그가 붉은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으니. 그 반응에 여인도 놀란 듯 줄곧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검은머리…?”
확실히, 이 세계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생김새. 남자는 붉은 문을 향해 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경매는 몇 시에 열리느냐.”
남자는 안에서 들려오는 믿을 수 없는 물음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기쁨에 찬 주먹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문 앞에서 방방 뛰어다니다, 아차차하며 다시 문 앞에 멈춰 섰다
“예! 12시 입니다요!”
남자는 문 앞에서 절도 있는 경례를 올리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래, 특등석으로 두 자릴 준비해 놓아라.”
“예! 본부대로 합죠!”
입이 귀에 걸린 남자는 히죽히죽 웃으며 붉은 문에 대고 허리를 푹 숙였다. 경매단장이 떠나고, 머릿속이 온통 잔꾀로 가득 찬 사내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이제 막 일어나 가문의 일을 보고 있을 금발의 남자를 떠올렸다.
* * *
차가운 공기에 가라앉은 희미한 안개가 엘라리움의 구석진 곳, 경매장의 천막을 음침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언뜻 보면 서커스가 열릴 법하게 생긴 그 천막 주변엔 오래된 피가 묻어 있는 채찍과 녹슨 쇠공이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간혹 사람의 손가락으로 보이는 것들이 흙과 뒤섞여 있기도 했다.
경매장 천막 뒤편, 또 다른 천막 속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천막 뒤편은 마치 짐승을 기르는 사육장과 같아 보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좁은 철장 속에 갇혀 목과 손, 발목을 옥죄는 두꺼운 쇠고랑에 피부병을 앓고 있었고 이미 죽어버려 구더기가 좀먹어가는 시체도 있었다. 철장 속사람들은 대부분 무기력해 보였고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삶에 대한 의욕이 없을 지라도, 천막 깊숙한 곳, 눈앞에서 펼쳐지는 끔찍한 고문행각 앞에선 무기력한 몸을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착!
스무 번째 채찍질을 끝으로 천장에 매달린 녹슨 쇠사슬이 찰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팽팽해져왔다. 팔을 묶어 매달아 놓은 노예가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제 검은 머리칼을 힘없이 축 늘어뜨린 채 이미 의식 없이 흐려진 눈으로 바닥에 갈기갈기 찢겨진 말콤 성인식복을 내려 보고 있었다. 이미 의식이 없을 터, 허나 어째서일까. 소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그 찢겨진 식복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미쳤어?!”
마침 입에 양 담배를 물고 들어온 마르코가 채찍을 들고 있는 사내에게 저벅저벅 걸어와 머리통을 휘갈겼다.
“악! 이 년이 제 주제를 모르고 날 고자로 만들 번했다고!”
채찍을 들고 있던 남자는 맞은 머리를 감싸 쥐며 양 담배를 물고 있는 마르코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남자의 건방진 태도에 눈을 부라린 마르코가 옆에 있던 철제의자를 들어 그를 향해 거칠게 내리쳤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맞은 부위를 감싸 쥐고 쓰러진 남자가 두려운 얼굴을 들어 마르코를 올려다봤다. 양담배를 문 마르코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남자의 배를 연신 걷어차 냈다.
“야 이 새꺄, 넌 니 주제를 알고 물건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저게 네 코 값보다 더 비싼 물건이야, 새꺄! 어디 내 허락 없이 건방지게 물건을 건드려? 뭐? 고자? 어디 귀한 물건 앞에서 개뼈따구 같은 소릴 짓 거려?”
후-하고 분에 차지 않는 입김을 내뱉더니 쓰러져 신음하는 남자를 손가락질 하며 언성을 높였다. 양 담배를 물고 답답한 연기를 내뱉던 마르코가 미간을 찌푸리며 걸레짝이 된 소녀를 흘겨보았다.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시기로 한 날이거늘, 메인 메뉴가 저지경이 되버렸으니 그의 속이 타들어 갈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