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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의 걸음은 보폭이 커서 그런지 굉장히 빠릿빠릿했다. 순식간에 코너를 돌아서고, 또 순식간에 계단을 미끄러져갔다. 엠마의 가슴팍도 채 안 되는 연이의 신장에 엠마의 기다란 다리를 쫓아다니기가 버거웠다. 졸졸 따라 걷다가도, 간격이 벌어져 쫄래쫄래 뛰어가기도 했다. 엠마는 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갔고, 연이도 따라 내려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엠마를 따라 내려오던 연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계단 아래를 내려 보았다.
‘와아…!’
어느새 함박웃음이 피어난 연이의 까만 눈은 홀 중앙에 놓인 커다란 분수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내려온 걸까? 그리고 연이가 멈춘 새 엠마는 벌써 계단의 절반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중에 감사를 표하리라 생각한 연이도 엠마를 따라 계단을 주르륵 내려갔다. 엠마는 뒤에서 들려오는 연이의 시끄러운 발소리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딱, 멈춰선 엠마는 연이를 홱 돌아보았다. 연이는 돌아선 엠마 앞에 멈춰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정말인지…. 가지가지 하는구나.”
연이는 엠마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차가운 눈빛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초록빛 눈동자를 찌푸리며 보내오는 멸시의 눈빛, 처음 연이가 길가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귀족 가(家) 저택 내에서 뛰어선 안 된다는 건 상식이 아니 더냐! 쯧쯧…. 대체 어디서 뭘 보고 자란 것이야!”
연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 눈앞에 아주머니는 분명, 저를 혼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손으로 허리춤에 손등을 얹어 다른 한손으론 제 얼굴에 검지를 들이미는 것이 꼭 그래보였다. 하지만, 연이는 저를 혼내고 있는 엠마의 말을 단 한단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엠마가 다시 홱 돌아서 계단을 내려가자 시무룩해진 연이도 터벅터벅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엠마의 뒤를 따라 홀에 내려온 연이는 이리저리 고개를 휙휙 돌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푸른 하늘과 구름이 담긴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고, 내려온 계단 옆, 천사가 든 항아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도 보았다. 새하얀 바닥위엔 화려한 금빛 곡선들이 빛나고 있었고 그 중앙엔 거대한 돌고래 분수가 세찬 물줄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연이가 이곳저곳 돌아보는 사이, 금세 홀을 가로질러, 측면에 난 복도로 들어선 엠마는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소박하게 생긴 문 앞에 바로 섰다. 연이도 엠마의 빠른 걸음을 따라 달려가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갔다. 복도에서 뛰어오는 연이의 모습을 보고 경악한 엠마는 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단을 친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뛰어다니는 겐지…!’
분명 저 소녀의 기억력은 금붕어도 울고 갈 수준임이 분명했다. 눈앞이 깜깜해진 엠마는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가 연이가 입을 시녀 복을 찾기 시작했다. 엠마는 복잡하게 놓아진 상자와 옷걸이 속에서 머리띠, 메이드 복, 양말, 단화를 가지런히 꺼내두고 방에서 나와 연이를 마주보았다.
“갈아입고 나오너라.”
엠마가 연이에게 말했다. 하지만, 연이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 엠마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엠마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갈아입으라하질 않느냐!”
엠마의 날카로운 언성에 몸을 움츠린 연이가, 우물쭈물 입을 벙긋하기 시작했다.
“…@…!@#$!@%$!##@!#@!$%.”
“…저…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엠마는 연이의 입에서 나온 생소한 말에 그만 입이 떡 벌어져 안경이 삐뚤어지고 말았다.
“헤헤…!@# @!#%….”
“헤헤…말이 달라서….”
엠마의 당황한 얼굴에 실없이 웃으며 입을 연 연이는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머릿속에 새하얘진 엠마는 연이의 해맑은 미소를 넋 놓고 내려 볼뿐, 연이에게 이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대체 꽃병에 뭘 집어넣는 것이야!”
엠마는 연이가 주방 구석에서 꽃병 속 장미를 모두 뽑아내어 그 속에 감자를 담아두는 것을 보고 기겁해야 했다. 연이는 엠마의 표정을 보곤 “헤헤” 거리며 미안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저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꽃병 안에 넣어둔 감자들을 다시 자루 속에 옮겨 놓기 시작했다. 말콤에선 식자재를 이런 항아리에 옮겨 담아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놓아두는데, 여긴 그래선 안 돼는 모양이었다.
엠마는 현기증이 도질 것만 같아 옆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벽에 기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짚었다.
언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엠마는 연이에게 옷 입는 법 하나 가르치는데도 진을 다 빼야 했다. 처음 혼자 들여보내 옷을 입으라 하였을 때, 엠마는 울화통이 터져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것만 같았다. 머리에 쓰라고 있는 머리띠를 허리띠로 착각한 것인지, 제 배에 두르고 나오질 않나, 앞섬을 여미라고 있는 리본을 제 팔에 둘둘 말아서 나오질 않나, 엠마는 소리를 꽥 질러댔고, 결국 방에 같이 들어가 일일이 제 손으로 갈아입혀 나와야만 했다.
그 뿐 아니었다. 빨래할 물을 좀 끓이라 했더니, 가스레인지를 이리저리 눌러보다 제 앞머리를 태워먹었고, 설거지 하라고 시켜놨더니 물만 틀어놓고 수도꼭지만 넋이나가 쳐다보고 있었다. 세제로 주방 바닥을 좀 밀어 놔라 시켰더니 또 비누거품만 넋이 나가 쳐다보고 있었고, 지금은 식자재를 창고에 옮겨 놔라 했더니, 애꿎은 장미를 전부 뽑아내 꽃병에다 식자재를 담아내고 있지 않은가!
물론, 말이 통하지 않기에 엠마는 이 모든 명령을 다 바디랭귀지로 소화해 내야만 했다. 엠마는 퀭한 눈으로 감자를 도로 자루에 넣어두고 있는 연이를 내려 보았다. 평소 잘 움직이질 않던 엠마는 연이에게 명령을 내리느라 허리와 어깨가 다 아파왔다. 언성을 높이느라 목도 점점 칼칼해 지는 것 같았다. 거기다, 저 소녀는 이제 제 언성에 면역이 되 버린 건지 헤실헤실 웃으며 눈 하나 깜짝 하질 않았다. 연이는 엠마의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어 방긋방긋 웃어주었다. 참, 해맑았다. 저 소녀는.
소녀의 미소를 보고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엠마는 그만 홀쭉해진 얼굴로 스르르 주방을 빠져나갔다. 쉬고 싶었다. 격한 바디랭귀지로 인해 온 몸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고, 더 이상 저 소녀에게 언성을 높일 기운도 남아있질 않았다. 칼로스 가(家)의 유능한 시녀 장엠마 크리스틴은 더 이상 저 해맑은 소녀를 교육시킬 자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연이는 힘없이 주방을 빠져나가는 엠마의 뒷모습을 보고 시무룩해졌다. 이번엔 잘 해내고 싶었는데.
저 아주머니는 험상궂긴 했지만 여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게 뭔가를 열심히 가르쳐주려 했고 온 몸으로, 열과 성의를 다해 저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그녀와 의사소통을 하기위해 노력해 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저 아주머니가 굉장히 무섭게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사랑으로 느껴진 연이는 가르쳐 주려는 것들을 어떻게든 익혀서 보답해드리고 싶었다. 연이는 힘없는 눈동자로 꽃병 속에 넣어둔 감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아….”
하지만, 어째, 마음만큼 잘 되는 것이 없었다. 연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려 감자를 옮기던 손을 계속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저와 똑같은 옷을 입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들은 천장에 달린 수납장을 열어 식기들을 정리해 올려두기도 했고, 아까 연이가 멍하니 바라보았던 수도꼭지를 틀어 더러운 식기들을 씻어 건조대에 정렬해 놓기도 했다.
‘아…. 저렇게 하는 거였구나.’
연이는 식기를 씻어 내려가는 손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만요.”
연이는 갑자기 하늘에서 손이 내려와 감자가 든 자루를 번 쩍 들어 올리는 여자를 휘둥그레 올려보았다. 여자는 자루를 품에 안고 어디론가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연이는 가만히 그 뒷모습만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쫓아가 보았다. 따라가 보니 아주 서늘하고 커다란 지하에 먹을 것이 잔뜩 쌓여져 있었다.
‘아…. 그게 여기로 옮겨놓으란 말이었구나.’
연이는 엠마의 알아들을 수 없었던 바디랭귀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연이는, 자루를 내려놓고 다시 올라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좋은 생각이 난 듯 표정이 양껏 밝아져선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 * *
칼로스 가(家)의 시녀들은 오전부터 계속 느껴지는 한 소녀의 시선에 뒤통수가 따끔거려왔다. 에릭의 침실에서 다 쓴 수건과 침구들을 바구니에 담아 옮길 때도, 꽃병을 가지런히 정리해 저택 곳곳에 얹어 놓을 때도, 식자재를 다듬을 때도, 걸레질을 할 때도, 검은 머리의 소녀는 그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며 손짓, 행동, 걸음걸이 하나하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녀들은 소녀의 새까만 시선이 굉장히 섬뜩하고 부담스럽게 다가 왔고, 마침 정원에 나와 삼삼오오 모인 시녀들은 소녀에 대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시녀 하나가 동료들을 둘러보며 푸른 눈동자를 떨어댔다.
“응! 완전 기분 나빠 죽겠다니까?”
동료중 하나가 인상을 팍 쓰곤, 저 멀리 이불 빨래터로 쫄래쫄래 달려가는 연이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신입인 것 같던데, 생긴 게 왜 그렇게 생겼다니?”
덩달아 소녀를 바라보던 다른 시녀가 섬뜩한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휴! 난 그 새까만 눈이 소름끼칠 정도야.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내 옆에 서있는데, 그냥 소름이 아주 쫙!
툭.
“야….”
또 다른 시녀가 소름이 끼친 모양인지 양 손으로 제 팔을 문질러 대며 언성을 높여 오자 옆에 있던 시녀가 그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왜! 내말 틀려?”
시녀가 제 옆구리를 찌른 시녀를 홱 쏘아보았다.
“그게 아니라…. 저기.”
성질을 내던 시녀는 옆구리를 찌른 시녀가 턱으로 뒤를 가리키고 있자, ‘헙’ 하고 숨을 들이켜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곤 뒤를 홱 돌아보았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는 푸른 눈과 푸른 꽁지머리, 주인님의 종자 알렉스 레트리버였다. 삼삼오오 뒤돌아본 그녀들과 눈이 마주친 알렉스는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호스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아아…. 전 아무 것도 못 들었습니다. 하하….”
알렉스가 멋쩍은 미소를 지어주며 바닥에 떨어트린 호수를 도로 주워들었다. 시녀들도 꽤나 놀란 눈치였고, 의도치 않게 이야기를 들어버린 알렉스도 많이 당황스러웠다. 늘 상 그래왔듯이 장미정원에 물을 주러 호스를 끌고 나온 알렉스는, 삼삼오오 모인 시녀들을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를 전하러 그들에게 다가갔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들어버린 그 대화엔 감히 알렉스의 인사말 따위가 끼어 들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알렉스는 황급히 그녀들에게서 돌아섰다. 그는 빨간 장미 앞에 서서 안타까움으로 물든 눈빛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시녀들의 입에서 나온 험담은 아마 그 검은머리 소녀를 향한 것임이 분명했다. 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이들의 입에서 소름끼친다는 말이 흘러나온 것일까. 알렉스는 시녀들의 멸시어린 눈빛과 날카로웠던 억양을 떠올리며 새하얀 칼로스 가(家)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5층에서 떨어져 내리려던 소녀를 떠올린 알렉스는 푸른 눈을 굳혀 풀어놓은 호스를 다시 돌돌 말아 원위치에 가져다 놓곤 저택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엠마!”
알렉스는 홀에 들어서 엠마 크리스틴과 소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소녀는 비록 말을 알아들을 순 없어도, 목소리의 억양 눈빛을 읽어내는 탁월한 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소녀가 시녀들의 눈초리에 상처받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아침까지만 해도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했던 불안정한 소녀였기에. 도저히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다.
“엠마!”
아직 엠마에게 교육을 받고 있다면 소녀와 엠마는 1층을 벗어날 리가 없었다. 알렉스는 1층을 샅샅이 뒤지던 중, 휴식 대에서 홀로 엎드려 단잠에 빠진 엠마 크리스틴을 보곤 얼굴이 험악해져갔다.
“엠마!”
알렉스가 언성을 높여 엠마 크리스틴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정말인지 이리도 무책임한 시녀 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단잠에 빠져있던 엠마는 제 어깨가 거칠게 흔들리자 놀란 숨을 들이키며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눈을 끔벅였다.
“아, 알렉스님?”
“소녀는 어디 있습니까!”
알렉스가 엠마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예? 소, 소녀라면 주방에….”
“주방에 없었습니다.”
알렉스는 엠마를 놓아주곤 그녀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니, 그럴 리가요. 분명 주방에…. 아, 알렉스님!”
엠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느릿느릿 안경을 고쳐 쓰는 사이 알렉스는 황급히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주방엔 분명 소녀가 없었기에, 엠마의 말을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아까 소녀를 험담하던 시녀무리들이 저택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곤 알렉스가 그녀들 앞에 다가가 섰다.
“저, 혹시. 검은머리 소녀가 어디 간줄 알고 계십니까?”
알렉스가 검은머리 소녀에 대해 물어오자 시녀들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음…아까 이불 빨래터로 가던데.”
고민하던 시녀 중 하나가, 소녀의 행적을 이야기 해주자 알렉스는 고맙단 말도 없이 시녀들을 지나쳐 황급히 저택 밖으로 뛰어나갔다. 시녀들은 기분 나쁘다는 듯 중얼거리며 알렉스가 뛰쳐나간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 * *
칼로스 가(家)저택의 오른편 구석엔, 빨래터 하나가 있었다. 펼쳐진 잔디밭 위에 덩그러니 올라온 수도꼭지와, 그 아래 놓인 커다란 대야는 언뜻 보아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분간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얇은 쇠파이프 사이로 길게 이어진 줄을 보아, 이것이 빨래 통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현관을 달려 나오던 알렉스는 곧바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촤아아….
“헉…헉….”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와, 커다란 대야에 양말과 신발을 벗고 들어서있는 검은 머리를 발견하고서야, 알렉스는 다급했던 제 다리를 멈출 수 있었다. 아…. 다행이었다. 빨래터로 갔다 하 길래, 이번엔 또 어디 빨랫줄에 목이라도 매달려는 줄 알았다. 알렉스는 양 손으로 치마를 곱게 들어 올려 이불을 열심히 밟아대는 소녀를 바라보다, 자꾸만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질끈 감아버리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걷어 올린 치마 아래로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눈에 들어오자, 알렉스는 깜짝 놀라 소녀에게 다가섰다.
“이봐요!”
열심히 이불을 밟고 있던 연이는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는 소녀의 상처가 비눗물에 닿아 퉁퉁 부어오른 것을 보고 속으로 엠마 크리스틴을 탓했다. 아직 다리에 난 상처 다 낫지 않은 소녀에게 이불빨래를 시켜놓고 본인은 휴식 대에서 낮잠을 자? 도대체가 인간미라곤 눈곱만치도 찾아 볼 수 없는 아주머니였다.
“아프지 않으십니까? 얼른 이리 나오십쇼. 제가 하겠습니다.”
알렉스는 그녀의 손목을 밖으로 잡아끌며 말했지만,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 대야에서 나와 주질 않았다. 아, 맞다. 소녀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에 알렉스는 재빨리 검은 구두와 양말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바지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불과 비눗물이 가득한 대야에 철벅철벅 들어서 소녀를 내려 보았다.
알렉스는 양 발로 이불을 철퍽철퍽 밟으며 소녀의 등을 떠민 후 제 얼굴을 가리켰다. 눈썰미가 좋은 연이는 그가 하는 제스쳐를 알아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이는 저가 찾은 일을 저가 끝마치고 싶었다. 그래서 엠마에게 보여줘 저도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연이 마음을 알 리 없는 알렉스는 험상궂은 얼굴로 소녀의 상처투성이 다리를 가리켰다. 그에 연이가 싱글벙글 웃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하고 싶어요.
알렉스가 인상을 쓰곤 두 눈 가득 힘을 실었다. 연이의 고집에 억지로라도 내보내리라 결심한 알렉스는 그녀의 등을 세차게 떠밀었다.
그 순간,
“으에엑?!”
연이는 소리 소문 없이 세차게 떠밀린 등에 몸의 중심을 잃고 비눗물이 가득한 대야에서 그만 발이 미끄러져 버렸다.
“어엇!”
소녀가 넘어질 줄 몰랐던 알렉스는 깜짝 놀라 넘어지려는 연이를 향해 손을 뻗었고, 연이는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몸을 허둥거리다, 반사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버렸다.
“어어어?! 자, 잠깐!”
소녀를 잡아주려던 알렉스는 소녀가 제 스카프를 쥐곤 있는 힘껏 잡아당겨버리자, 당황한 알렉스는 스카프를 당기는 소녀의 손을 떨치려 했다. 하지만, 소녀의 악력은 굉장했고, 결국 알렉스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재빨리 풀어버렸다. 그 바람에 연이는 그대로 대야 밖으로 튕겨져 나가 잔디밭과 진한 키스를 나눠야만 했다.
“아야….”
“괘, 괜찮습니까? 하하….”
알렉스는 한 손에 제 스카프를 꼭 쥔 채 대야에 부딪힌 정강이를 감싸 쥔 연이를 얼떨떨하게 내려 보다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연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창피함과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아픔에 얼굴이 새빨개져선 알렉스를 쏘아보았다.
* * *
한참을 알렉스의 세탁을 지켜보던 연이는 굉장히 지루해졌다. 대야에서 밀려난 후로 알렉스는 저를 대야 근처엔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다. 가만히 앉아있던 연이는 푸른 하늘과 빨랫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연이는 알렉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 빨랫줄에 매달려 그 위로 올라서려했다.
이제 막 이불의 물기를 짜내려던 알렉스가 구석에 앉아있던 연이가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빨랫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연이를 보곤 알렉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위, 위험해요!”
알렉스가 다급히 소리쳤고, 5층 서재 창문 너머, 마침 엎드린 책상에서 깨어난 에릭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살며시 눈을 뜬 에릭은 엎드린 몸을 일으키다 떨어져 내린 이불 한 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불을 덮고 잔 기억이 없는데….
“이봐요!”
알렉스 목소리였다. 에릭은 이불을 잠시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 본 에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위험하다고 소녀를 만류하던 알렉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
소녀의 작은 발이 순식간에 줄 위에서 높이 튕겨져 올랐고, 탄력을 받아 회전한 작은 몸이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하늘 높이 승천하고 있었다. 우아한 몸짓으로 지상으로 떨어져 다시 줄을 밟아 곡선을 그리는 손짓은, 순수한 아름다움. 그 하나로 정의되었다.
하늘 높이 포물선을 그리는 손짓, 나비의 춤이 깃든 검은 머리칼, 새벽의 슬픔이 서린 눈동자, 연이의 청명한 날개 짓은 에릭과 알렉스 두 사람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아 버렸다.
이건, 예로부터 말콤의 소녀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트리니티라는 전통 무용. 가느다란 줄 위에서 지상으로 뛰어올라 자연의 흐름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종교 예술 중 하나였다. 높이 뛰어 오를수록, 손끝이 그리는 곡선이 부드러울수록 트리니티의 수준은 높이 평가되었고 연이의 트리니티는 역대 말콤의 소녀들 중 최고라 손꼽힌다.
‘어…?’
하늘에서 트리니티를 즐기고 있던 연이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동작에 집중하지 못하고 눈을 떠 그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창가에 손을 얹어 놀란 눈으로 저를 내려 보는 금발의 사내.
‘어…어라라?!’
공기의 흐름을 느끼던 연이는 그 시선에 사로잡혀 그만 흐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으악?!’
상공에서, 균형이 무너진 연이의 몸은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해버렸고, 연이의 추락에 깜짝 놀란 에릭은 황급히 창문을 열어 당장에 뛰어내릴 심산으로 제 몸에 황금빛 오라를 둘렀다.
하지만, 그는 곧 제 몸에 두른 오라를 잠재웠다. 푸른 오라를 두른 알렉스가 떨어진 연이의 몸을 무사히 받아내었기 때문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본 에릭은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짚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헉….헉….”
하마터면 죽을 번한 연이는 알렉스의 품에서 사색이 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도 터져나갈 듯 뛰어대는 심장에 온 몸이 떨려왔다.
연이의 몸짓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순간, 추락으로 이어지는 대형 사고에 넋이 나가있던 알렉스가 순식간에 푸른 오라를 둘러, 땅으로 추락하려는 연이의 무게를 양 팔로 받아주었다.
“헉….헉….”
연이를 받아낸 알렉스역시 사색이 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연이가 추락하는 순간, 과연 저가 소녀를 받아낼 수 있을지 확고한 자신감이 없었다.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번한 알렉스 역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눈앞에서 사람이 정말로 죽을 번했다.
지켜보던 에릭과 알렉스는 그만 맥이 빠져 숨을 몰아쉬는 말괄량이 소녀를 빤히 내려 보았다. 누가 아론이 준 선물 아니랄까봐, 사람 심장 쫄깃하게 하는 재주가 아주 탁월했다.
알렉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빨랫줄 묘기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가 넋을 잃고 보고 있을 만큼, 아직도 그 매끄러운 손짓과 환상적인 비상이 눈에 훤했다. 하지만, 그만큼 까딱 잘못했다간 방금과 같은 아찔한 상황이 닥쳐올 수 있었기 때문에 앞으론 빨랫줄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저 아무도 서있지 않은 빈 창문이었다. 아찔함 뒤에 밀려온 걱정에 알렉스는 연이를 바닥에 앉혀놓고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제법 세게 쥐어박았던 모양인지 연이가 맞은 머리를 감싸고 알렉스를 불만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알렉스도 그에 지지 않게 두 눈에 쌍심지를 불태웠다.
“대체 빨랫줄엔 왜 올라 간 거예요!”
연이는 알렉스의 눈빛과 목소리를 보아 지금 저를 혼내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 연이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이 세계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알렉스에게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야, 심심했으니까.
* * *
파란만장한 알람 덕에 잠이 달아나버린 에릭은 다시 창문을 닫고 돌아서 바닥에 내려놓았던 이불을 집어 사각으로 포개었다. 처음엔 알렉스나 엠마가 덮어주고 갔나 했지만…. 에릭은 서재 문을 열고나가 마침 지나가던 시녀를 불러 세워 사각으로 포개어 놓은 이불을 건네주었다.
“검은 머리 소녀의 방에 좀 가져다 놓아라.”
“네.”
에릭에서 이불을 건네받은 시녀는 고개를 숙였고,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릭 역시 서재로 들어와 소녀가 누워있었던 쇼파를 바라보았다. 뛰어난 신체능력이었다. 화려했던 춤사위와 눈을 의심케 했던 엄청난 비상. 대체 뭐였을까…. 반짝이던 햇살에 꼭 황금빛 오라가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줄만 알았다. 에릭이 창가로 다가서 알렉스에게 혼나고 있는 연이를 내려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 보는 눈이 길게 가늘어졌다.
…혹시, 헌터의 자질을 품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곧 에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뭇 남성들도 가지기 힘든 것이 오라였다. 저 자그맣고 어린 소녀가 그 어려운 오라를 다룰 자질이 있다니, 저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고 어이없는 추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