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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이 있어서, PC로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그날 저녁, 연이는 몸을 좀먹어 오는 쓰라림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늘 낫지 않은 상처를 안고 비눗물에 발을 담근 탓인지, 상처가 퉁퉁 부어올라 그 쓰라림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채찍에 긁혔던 등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낮엔 아무렇지 않더니 밤이 되니 이토록 시리고 고통스러웠다. 연이는 결국 새파래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장에 난 창을 통해 달빛이 들어온 방을 걸어 나가 복도로 나선 연이는 어젯밤 편히 잠들었던 에릭의 서재가 떠올랐다. 부들부들 떨려오는 몸으로 열심히 복도를 걸어 5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이 몰랐지만, 그의 서재가 정확히 5층이었던 것은 기억했다. 어둠에 싸인 계단을 올라서 천천히 5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어젯밤과 다름없이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모퉁이를 발견했다.
연이는 빛이 새어나오는 모퉁이를 돌아 에릭의 서재 앞에 멈춰 섰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훔쳐 떨리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냐.”
노크소리가 들려오자, 누군지 짐작이 간 에릭이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릭은 서재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손잡이를 돌려 당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 검은 머리의 소녀. 아론의 선물이 서재 문 앞에 서있었다.
“후…. 내 서재가 네 침실이더냐.”
어제야, 소녀가 안쓰러워 서재에 잘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지만, 이렇게 계속 제 서재에 잠을 자러 온다면 곤란했다. 다른 시녀들의 눈도 있고, 뭣보다 제 서재에 잠이 든 연이가 신경 쓰여 서류에 완벽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도록 하여라.”
에릭이 연이에게 부드럽게 말해주곤 문을 닫으려 하였다. 그러다 문득, 연이의 잠옷치마 아래, 퉁퉁 부어올라있는 상처가 눈에 보였다. 그리고 어쩐지 소녀가 온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 같아 에릭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째…오늘 하루 종일 뭔가 잊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니, 알렉스에게 소녀를 병원에 데려가라 일러두는 걸 깜박 잊고 있었다.
“하….”
에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어째 소녀의 안색도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 에릭은 닫으려던 문을 다시 활짝 열어주어 길을 비켜주었다.
“들어 오거라.”
연이는 에릭이 길을 비켜주자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당겨오는 상처에 다리가 부들거려왔다. 소녀가 서재의 소파로 걸음을 옮긴 사이, 에릭은 창가에 놓인 탁상 앞에 쭈그려 앉아, 서랍을 뒤져 새하얀 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정말,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소녀였다.
“정면으로 눕지 말고 돌아누워라.”
에릭은 소녀가 소파에 눕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에게 일러두었다. 하지만, 소녀는 에릭을 쳐다 보기만 할 뿐 소파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 $%!$#@ @#$%.”
“…말을 알아듣지 못해요.”
하얀 통을 유리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소녀를 빤히 내려 보았다. 에릭은 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그냥 이국인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에릭은 연이의 언어에 작은 의심을 품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 한 언어…. 저건 단순히 이국인 정도가 아니었다. 이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언어였다.
“…너, 어디서 온 것이냐.”
에릭은 작은 소녀를 경계하듯 내려 보았다.
* * *
“쳇…. 예리한 녀석.”
물레를 굴리던 노장은, 흐트러지는 물레를 보고 혀를 찼다.
“할 수 없군. 늦게나마….”
노장은 하얀 실을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한번 튕겼다. 사실, 소녀를 로데니아로 보내기 직전, 소녀가 살던 차원에 관련된 기억을 지워, 로데니아 세계에 맞게 수정해 내려 보내야 했는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늙은 머리가 깜박 잊고 그냥 내려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늙은이의 귀찮음으로 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내버려 뒀더니, 저 의심 많은 꼬맹이가 벌써부터 노장의 물레위에서 저항하려 하고 있었다.
“뭐…. 내 실수니 별수 없지.”
노장은 흐트러진 물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턱을 쓸어내리며 입술을 씰룩였다.
* * *
소녀는 갑자기,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실들이 우수수 끊어져내려, 새롭게 연결된 느낌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녀에게 질문했던 에릭은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쓸어내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언어가 다르니,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
들려오는 선명한 언어에 놀란 눈으로 에릭을 올려다 본 연이는 조심스레 제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아니요.”
튀어나온 생소한 언어에 어안이 벙벙한 연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에릭을 올려보았다. 이상했다. 그녀가 써왔던 언어들이, 단 한단어도 기억나질 않았다. 언어 뿐 아니었다. 머릿속이 한 순간의 여명과 함께 깨끗이 지워져 버린 기분이었다.
에릭은 연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라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을 내렸다.
“…말이, 언어가 같아요.”
연이는 저가 이런 말을 하면서도 복잡해진 머릿속에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저가 써왔던 언어는 이런 말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소녀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말을 쓰고 있었다. 에릭은 소녀의 얼떨떨한 얼굴에, 푸른 눈이 잔뜩 가늘어졌다.
“혹…머릿속이 끊어진 느낌이 들지 않았더냐.”
“마, 맞아요!”
에릭의 말에 연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연이의 말에 에릭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고, 소녀의 어깨를 꽉 틀어쥐었다.
“너…!이곳에 오기 전, 모래시계가 가득한 사막을 거처 오지 않았느냐!”
연이는 흥분한 에릭이 저를 다그치듯 물어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였다. 늘 차분할 것 같던 사람이,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던 깊은 눈동자가 실낱같은 희망을 찾고자 격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제 어깨를 잡은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연이는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직전, 아파왔던 왼쪽 가슴위로 주먹을 움켜쥔 채 연이가 검은 눈동자를 떨었다. 그리고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연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요. 기억이 나질 않아요.”
연이의 말에 에릭은 실망한 듯 소녀의 어깨를 쥔 손을 내려놓았다. 연이는 에릭의 눈을 바라보았다. 착잡해진 푸른 눈동자가 슬픔에 잠겨있자, 깜짝 놀란 연이가 양 손으로 에릭의 손을 감싸 쥐었다. 황망한 얼굴로 저를 올려보는 까만 눈동자에 에릭이 작은 미소를 지어주며 소녀의 머리를 쓸어내려 주었다.
“네가 미안할 필요가 무엇이냐.”
소녀의 미안해하는 얼굴에, 오히려 에릭의 마음이 불편해 지려하고 있었다. 에릭은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얹어 놓았던 하얀 통을 열었다. 통 안엔 응급처치에 필요한 다양한 의약품과 의료품들이 들어있었다. 에릭은 아직 일어서있는 소녀를 보곤 제 옆을 툭툭 쳤다.
“누워서 다리를 보여 보거라. 상처가 심해 간단한 응급처치라도 해야겠더구나.”
그 말에 연이가 망설임 없이 소파에 엎드리려 했지만, 뭔가 깨달은 연이는 에릭의 눈치를 살피며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 선뜻 소파에 올라서질 못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가 아닌, 남자의 옆에 엎드려 다리의 상처를 보이려하니, 18살 작은 소녀의 심장은 긴장과 부끄러움으로 작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양 볼에 발그레한 홍조를 띠어 꼼지락대는 소녀의 모습에 에릭은 하마터면 작은 웃음을 터트릴 번 하였다.
“괜찮으니 엎드려 보거라.”
에릭의 말에 눈치를 살피던 연이는 천천히 소파위에 몸을 엎어 뉘였다. 남자의 다리 위로 제 맨다리를 올려놓은 연이는 빨개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쿠션에 얼굴을 폭삭 묻어버렸다. 에릭은 풋풋한 소녀의 모습에 더는 참지 못하고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에릭의 웃음소리를 들은 연이는 얼굴이 폭삭 익은 마냥 새빨개져선 ‘힝….’하고 울상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웃음이 서려있던 에릭의 얼굴은 연이의 상처를 살펴본 순간 차츰 굳어져가고 있었다. 낫지 않은 상처로 물에 들어갔던 것인지, 상처주변이 발갛게 부어올라있었다.
“이런 다리로 물에 들어갔었더냐.”
에릭이 연이의 다리를 소독해주기 위해 조심조심 과산화수소를 묻힌 거즈를 톡톡 두드렸다. 과산화수소가 묻은 상처가 쓰라렸던 연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자꾸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빨래 때문에…. 아, 그런데 아저씬 이름이 뭐에요?”
아저씨란 호칭에 적잖이 당황한 에릭은 연이의 다리를 두드리던 거즈를 멈추었다. 귀족사회에 몸 담그고 있던 에릭에겐 아저씨란 구수한 호칭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소녀가 무례하다곤 느껴지지 않았다. 참 이상하단 생각이 든 에릭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거즈를 계속 움직였다. 다시 상처에 닿은 거즈에 연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에릭 류 칼로스다.”
“우와, 아저씨 이름 되게 기네요?”
연이가 에릭이 알려준 이름에 깜짝 놀라 대답했다.
“넌 이름이 무엇이냐.”
에릭도 연이의 이름을 물으며 소독이 끝난 거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 연!”
연이의 활기찬 대답을 들으며 붉은 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던 에릭이 쿡쿡 웃었다.
“네 이름이야 말로 짧은 것이 이상하구나.”
에릭은 붉은 병에서 하얀 연고를 퍼내 연이의 부어오른 상처를 펴 발라 주었다. 에릭의 손길이 따갑고도 간지러웠던 연이는 싱그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비비 꼬았다. 그리고 점차 에릭의 손길에 익숙해진 연이는, 어느새 끔벅이던 눈 위로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양 다리에 깨끗한 거즈를 얹어 붕대를 감아 올린 에릭이 피곤한 한숨을 푹 내쉬며 책상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이번 달 양피지 서류가 수두룩하게 쌓여있었다. 일이 한참 남았는데, 이런 여유를 부리다니. 에릭은 어느새 잠이든 연이를 내려 보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똑바로 눕혀 주었다. 그리곤, 작은 냉소를 지었다.
‘…로젠베르크. 이런 어린 소녀를 가지고 대체 뭘 어쩌겠단 것이냐.’
이 세계에서 온 소녀, 우연히 아론의 눈에 띠어 에릭에게 생일 선물을 했다? 에릭은 창가로 다가서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흐려질 모양인지 평소 잘 보였던 별 하나 보이질 않았다. 불쾌한 하늘이 떠오른 에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절대 우연일 리가 없었다. 애꿎은 소녀의 운명만 가혹해졌을 뿐….
창가에서 생각에 잠긴 에릭은 서재 공기가 조금 싸늘하다 싶어, 소녀가 잠든 소파를 바라보곤 제 책상에 붙어있는 서랍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랍을 뒤지던 에릭이 깨끗한 담요 한 장을 꺼내들었고, 다시 연이가 누워있는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잘 자거라.”
작은 미소를 짓은 에릭이 소녀의 가슴께까지 담요를 꼭 덮어주며 낮게 중얼거렸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든 모습에 에릭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미안하구나, 네겐…그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할 것이다.”
* * *
어제 못 다한 시녀교육을 마저 이수시키기 위해 연이의 방을 찾아간 엠마는 덜렁, 이불만 얹어진 빈 침대에 그만 자리에 스르륵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대체 밤마다 어딜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또 어제처럼 넓은 저택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무릎이 쑤셔왔다.
‘하아…. 이 아일 또 어디서 찾는담.’
엠마는 홀쭉해진 얼굴로 비틀비틀 저택 복도를 걸어 다녔다. 그러다 계단 아래서 알렉스가 올라오는 것이 보이자, 혹시 소녀의 행적을 알고 있을까 싶어 그에게 다가섰다. 아침식사를 들고 계단에 올라서던 알렉스는 엠마의 등장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알렉스님, 혹, 소녀를 보지 못했습니까.”
소녀를 묻는 엠마의 질문에 알렉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엠마는 알렉스의 싸늘한 눈빛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엠마님.”
알렉스가 엠마를 불렀다.
“예.”
“앞으로, 소녀에 대한 교육과 지시권한은 전부 제가 전담하도록 하겠습니다.”
엠마가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고, 알렉스가 엠마를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엠마는 제 권한을 침해하려는 알렉스의 말에 얼굴이 일그러졌고, 갑자기 제게 싸늘히 대하는 알렉스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알렉스님, 시녀의 교육과 지시권한은 시녀장의 고유한…!”
“엠마는 시녀장의 자격이 없습니다.”
엠마가 알렉스에게 언성을 높이려 입을 열었지만, 알렉스가 그녀의 언성을 가로막았다.
“알렉스님, 말씀이 좀 지나치시군요!”
알렉스의 무례한 말이 계속되자 엠마도 더는 참기 힘든 듯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주인님 식사가 식을 것 같습니다. 그럼.”
하지만, 알렉스는 엠마에게 고개한번 숙이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5층을 향해 올라갔다. 알렉스가 올라간 뒤, 계단에 못 박힌 엠마는 흔들리는 눈으로, 난간 아래, 이리저리 바삐 오가는 시녀들을 내려 보았다.
* * *
똑똑똑.
“주인님.”
“들어오너라.”
밖에서 들려온 청명한 목소리에 알렉스가 온 것이라 짐작한 에릭이 노크 소리에 답하였다. 서재 문이 열리고, 푸른 머리 청년이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에 식사를 내려놓기 위해 걸어 들어온 알렉스는 또 어제와 같이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소녀를 보곤 걸음을 멈추었다.
“저…, 주인님. 오늘도 소녀가 여기서 잠들어 있네요.”
멋쩍은 웃음을 흘리던 알렉스는 익숙하지 않는 서재 광경과 주인님의 모습이 영 낯설어 적응이 되질 않았다. 에릭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알렉스는 식사를 낮은 유리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일에 몰두하고 계신 주인님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깨어나면 병원에 데려 가 보거라. 상처가 꽤 심해졌더구나.”
에릭이 저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일렀다. 알렉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잠이 든 소녀를 내려 보았다. 소녀에게 덮인 담요를 가만히 바라보던 알렉스는 다시 주인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분명, 일에 100%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제가 아는 주인님이라면,
“얼마 전, 너 또한 저러질 않았느냐.”
에릭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를 콕 찔렀다. 그에 창피해진 알렉스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라버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랬다. 알렉스 역시 불과 2일 전, 에릭의 일을 도와주겠다며 나섰다가 저 꼴이 난 적이 있었다. 민망해진 알렉스는 차마, 주인님께서 저를 제방 침대로 옮겨주셨냐 물어보질 못하였다.
서류로 눈을 돌리려던 에릭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알렉스를 진지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알렉스.”
제 주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놀란 알렉스가 “예?” 하고 고개를 들었다.
“너, 협회에서 경고장이 날아왔더구나.”
에릭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알렉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받자마자 경고장을 태워버렸을 텐데…. 어떻게 알아 내신거지?
“주, 주인님. 그건.”
에릭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두려웠던 알렉스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변명하려 했다. 그 모습에 에릭이 잠시 눈길을 돌리는가 하더니 알렉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렉스, 이번 달 내로, 의뢰를 받아 저택을 떠나거라.”
에릭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고, 에릭의 입에서 우려했던 말이 터져 나오자 알렉스는 울상이 되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헌터를 그만 두더라도, 저는 제 주인의 곁을 돌보고 싶었다.
“저, 저는…!”
“알렉스, 칼로스 가(家) 가주로써의 명령이다.”
알렉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눈에 훤한 에릭이 알렉스의 말을 가로막아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난, 네가 이번 일로 징계를 받아 헌터자격을 박탈당한다면, 널 내 곁에 두지 않을 심산이다.”
그리고, 저를 향한 알렉스의 마음에 연이어 쐐기를 박았다. 그에 알렉스는 상처받은 얼굴로 에릭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떠나라, 알렉스.”
에릭의 푸른 눈은 결심을 굳힌 듯 흔들림이 없었다.
“주인님….”
반면, 알렉스의 푸른 눈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읏…!”
쾅!
뒷걸음질 치던 알렉스는 상처받을 얼굴로 홱 돌아서, 도망치듯 문을 열고 에릭의 서재에서 뛰쳐나갔다. 에릭은 문도 닫지 않고 나간 알렉스의 뒷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렉스의 각별한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저를 아비마냥 따라다니던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여태 늘 저와 같이 다녔었기에, 제 품을 떠나 혼자 의뢰를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 힘들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헌터 중에서도 자질이 뛰어난 헌터였다. 20세라는 어린 나이에, 엄청난 자질을 지닌 인재를 제 무르팍에서 썩힐 수만 없었다. 에릭은 알렉스가 좀 더 자신을 위해 살길 바랐던 것이다.
알렉스가 나간 뒤, 문이 세게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깨버린 연이가 꿈틀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깨어난 고양이 마냥 기지개를 펴는 모습에 에릭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찌나, 그가 돌봐야 할 어린 양들이 이리도 많단 말인가. 에릭은 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디, 알렉스가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에릭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려 일에 집중했다.
연이는 기지개를 펴, 책상에서 열심히 종이를 들여다보는 에릭을 살펴보았다. 하루 종일,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일까. 연이는 에릭의 눈 밑에 낀 옅은 다크서클에 그가 안 쓰러 보였다. 잠도 자지 않은 것일까. 연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좋은 생각이 난 듯 책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저씨!”
에릭은 연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아저씨란 호칭에 서류를 읽어 내리던 푸른 눈을 뚝 멈췄다. 어찌 저리도 해맑게 불러주는 것인지. 기분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것이 오묘했다. 에릭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 순간, 연이가 제 발치를 들어 에릭의 목을 끌어 앉아 그의 양 볼에 가벼운 입술을 남겼다. 깜짝 놀란 에릭은 황급히 연이를 떨쳐내려 했지만, 연이가 먼저 에릭의 목을 놓아주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연이가 밝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해오자, 아직 양 볼에 남아있는 따뜻한 느낌에. 에릭은 눈이 부신 소녀에게서 눈을 떼질 못했다.
“뭐, 뭘 한 것이냐.”
에릭은 겨우 입을 떼어 연이에게 당황한 물음을 건네었다.
“굉장히 소중한 사람과 나눴던, 아침인사였어요.”
연이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아직 당황해 있는 에릭에게 말했다. 이건, 어제 머릿속이 전부 끊어져버린 이후로, 제게 남은 단 하나의 기억이었다.
“아저씬 제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생명의 은인…. 에릭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글쎄…. 연이를 산 것도 일단 에릭이 아니라 아론이었고, 저는 그저 선물을 받아 돌봐주고 있는 것 뿐 이었다. 그런 것도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이 말괄량이 소녀에게 짚고 넘어갈건 단단히 짚고 넘어가야했다.
“앞으론, 이런 인사는 하지 말거라.”
에릭이 눈썹을 치켜세워 연이에게 일렀다. 그에 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혹시 싫었어요?”
연이의 어이없는 물음에 “넌…!” 하고 입을 열었던 에릭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제 제게 다리하나 보여주는 것도 창피해서 절절 매던 소녀가, 제 볼에 입술을 갖다 대는 건 또 주저하질 않는다. 그게 또 연이가 살던 세계에선 인사였다고 하니, 뭐라 다그칠 수도 없었다. 에릭은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짚었다.
“이 세계에선 그런 인사는 연인들 끼리 하는 것이다.”
연이는 결국 이런 민망한 설명을 천하의 에릭의 입에서 나오게 만들었다. 에릭의 설명에 덩달아 민망해진 연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버렸다. 연이는 차마 에릭의 푸른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푹 숙인 후 잽싸게 서재를 뛰쳐나갔다. 에릭은 연이가 나간 후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열려있는 서재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도대체가 문을 닫고 나가는 기본이 안 돼 있었다.
딸깍하고 문을 닫고 돌아선 에릭은, 천천히, 제 손등으로 떨리는 숨결을 가려보았다. 이상했다. 깃털처럼 가벼운 그 감촉이 아직도 제 양 볼에 뜨겁게 남아있어, 도저히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시선을 떨어뜨려 작은 한숨을 내쉰 에릭은 지금 제 얼굴이 연이만큼 달아올라 있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 *
칼로스 가(家)의 저택은 한 소녀의 독보적인 일처리 솜씨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젠 말도 알아들을 수 있겠다, 어제 하루 꼬박, 시녀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기억해 놓았겠다. 일선에서 잔뜩 물이 오른 연이는 더 이상 엠마의 짐짝이 아니었다. 가장 놀라웠던 건, 소녀의 요리솜씨였다. 숙련된 칼솜씨로 감자를 일정 간격으로 썰어가는 손놀림과 계량컵 없이도 정확한 어림잡기에 동료들은 그만 넋이나가 버렸다.-지켜보던 엠마는 입이 다물어지질 못했다고 함-
동료들은 연이의 훌륭한 요리솜씨에 관심을 가져,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고, 연이는 그들에게 정확한 어림잡기 비법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연이는 막사에서 18년간 아빠와 단 둘이서 생활을 일궈나갔기 때문에 가사를 도맡아 왔기 때문에, 이런 요리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록, 말콤에 대한 기억은 연이의 머릿속에 더 이상 남아있질 않았지만, 연이의 몸은 그녀가 살았던 말콤을 뼛속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편, 연이의 성인식을 치루 던 말콤에선 마을에 치장된 꽃줄과 제단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제단을 향해 손을 뻗었던 연이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단에 서있던 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오늘 성인식을 치룰 아이가 있었던가?”
촌장의 물음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참 이상하구나.”
촌장이 길게 늘어진 수염을 쓸어내리며 노을이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누군가에게 격언을 내리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하늘을 바라보던 촌장이 웅성거리는 주민들을 내려 보다 지팡이를 내리쳤다.
“일단, 제단과 마을을 정리하도록 하여라.”
주민들에게 지시를 내린 촌장은 어리둥절한 마음을 안고 제단에서 내려왔다. 촌장을 지시를 받아든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이의 아버지는 한참을 멍하니 서, 미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굉장히, 소중한 무언 갈 잃은 느낌이었다. 하나뿐인 어떤 것이 떨어져나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을 사람들을 따라 마을 정리를 도와주러 가려던 연이 아버지는 문득, 제단 위에 떨어진 작은 화관을 바라보았다. 도라지꽃으로 엮은 작은 화관이었다. 연이 아버지는 꼭 귀신에 홀린 사람마냥, 터벅터벅 제단 위로 올라가 떨리는 손으로 화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관을 들어 올린 순간 떨어져 내린 긴 머리칼에 연이 아버지의 검은 눈이 크게 요동 쳤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아버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소중한 존재에 작은 화관을 찢어진 가슴에 꼭 끌어안아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첫댓글 판타지.좋아하는데 ㅎㅎ 재미있게 읽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