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묘역 기록사진
2006.10.22.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에 소재한 곰봉 종주 산행을 마치고
비를 맞으면서 김삿갓 묘역으로
DSLR 초기 보급단계라 화질도 좋지 않은데 불청객인 가을비로 인해
색상과 代置(대치)되어 흑백으로 바꿔 보았습니다.
※ 사진 품질이 좋지 않아 보관만 하다가 이제야 올려봅니다.
蕭蕭瑟瑟又齊齊 埋谷埋山或沒溪 소소슬슬우제제 매곡매산흑몰계
如鳥以飛還上下 隨風止自各東西 여조이비환상하 수풍지자각동서
綠其本色黃猶病 霜是仇綠雨更凄 녹기본색황유병 상시구록우갱처
杜宇爾何情薄物 一生何爲落花啼 두우이하정박물 일생하위낙화제
소슬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소리 없이 떨어지니
산골짜기에도 쌓이고 시냇물 위에도 떨어지누나
새처럼 아래위를 날다가는
바람결 따라 저마다 동과 서로 흩어지네
본디 잎새야 푸르건만 누렇게 병들어
푸를 빛 시샘하는 서리를 맞고 가을비에 더욱 애처롭구나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다지도 정이 박약하여
지는 꽃만 슬퍼하고 낙엽에는 안 우느냐
千里行裝付一柯 餘錢七葉尙云多 천리행장부일가 여전칠엽상운다
囊中戒爾深深在 野店斜陽見酒何 낭중계이심심재 야점사양견주하
천리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떠돌다 보니
남은 돈 엽전 일곱 푼이 아직도 많은 것이니
그래도 너만은 주머니 속 깊이 간직하려 했건만
황혼에 술집 앞을 이르니 어이 할거나
김삿갓 생애에 관한 요약
김삿갓 본명 : 김병연(金炳淵)
본관 : 안동(安東)
자(字) : 성심(性深), 호(號)는 이명(怡溟), 지상(芝祥), 난고(蘭皐)
김병연 金炳淵 |
작가 정보 |
출생 | 1807년 조선경기도 양주군(추정) |
사망 | 1863년3월 25일(57세) 조선 전라도 동복현 |
국적 | 조선 |
직업 | 시인 |
학력 | 1826년 백일장 과거 장원 급제 |
종교 | 유교(성리학) |
필명 | 자는 성심(性深) 호는 이명(怡溟)·지상(芝祥)·난고(蘭皐) 별칭은 방랑 시인(放浪 詩人) 일명은 김난(金鑾, 金蘭, 김란) 속칭은 김삿갓, 김입(金笠, 김립) |
활동기간 | 1826년~1863년 |
장르 | 한시 |
부모 | 아버지 김안근(金安根) 어머니 함평 이씨 부인(咸平 李氏 夫人) |
배우자 | 장수 황씨 부인(長水 黃氏 夫人) |
자녀 | 장남 김학균(金學均)[1] 차남 김익균(金翼均) 3남 김영규(金英楏) |
형제 | 형 김병하(金炳河) 아우 김병호(金炳浩) 아우 김병두(金炳浢) |
친지 | 친조부 김익순(金益淳) 외조부 이유수(李儒秀) |
9대 조부 : 병자호란 때 척화 대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 형으로서 형조 참판을
지낸 김상준
5대 조부 : 황해도 병마절도사 김시태
고조부 : 전의현감 김관행
증조부 : 경원부사 김이환
조부 : 김익순(金益淳)
조부 김익순은 함흥 중군(中軍:정3품)으로 있다가 선천부사 겸 방어사로 전관되어 온 지 불
과 서너 달이 지난 후 신 임지에서 어수선한 일을 정돈한 후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수
일간 잔치를 열었는데 새벽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있는 방어사(防禦使) 김익순을
결박하고 항복을 받아내었다.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으나 그 가족은 살려주기로 하였고 김삿갓
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당시 20세가 되었을 때까지 김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이것
은 김익순이 적장 앞에 무릎 꿇은 대가로 역적으로 몰린 사실을 아들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
겨온 어머니 때문이었다.
또한 아들들마저 역적의 손자로 낙인이 찍히면 조정과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비난 등은 물론
목숨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할아버지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이었다.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 뒤에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응시했을 때,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에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 급제한 것이었다.
뒤에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
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도 '병연'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바
꾸었다.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한때 그의 둘째 아들 김익균을 만나 3차례 정도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남도 화순에 들렀던 중 1863년(철종 14년) 안 참봉의 사
랑방에서 죽었는데
아들 김익균이 부고(訃告)를 듣고 화순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운구하여 안장되었다. 김병연의 시신이 묻힌 곳은 훗날 지금의 김삿갓면이 되었다.
그의 묘는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897-2
※ 출처 : 위키백과
(위키백과 내용이 많아서 간략하게 요약했습니다.)
첫댓글
김삿갓에 대하여 많이 아시고 자세하게 일대기를 적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오래전 강원도 방면으로 사진친구와 촬영을 가다 친구가 저기 김삿갓 묘지가
있다는 말만 듣고 서는 지나쳤습니다.
김삿갓 일대기를 적어 주셨는데 감동의 글이 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