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의 조달은 현대전에서 너무 당연한 조건으로 치부되어 그리 주목을 받지 않지만, 당연하다 해서 그 중요성까지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다. 제대로 된 식사조차 챙기지 못하는 군대가 승리한 경우는 거의 없다.
27년 전, 미국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 43만 명 이상의 병력과 2000대 이상의 전차를 사우디아라비아에 결집시켰을 때도 그랬다.
전쟁을 지휘하게 된 노먼 슈워츠코프 사령관과 그 참모진들이 개전을 앞두고 긴장감에 밤잠을 설치는 동안, 펜타건과 미국 중부사령부의 보급부서, 특히 급양담당자들은 130만 명 분량의 식사를 지구 반대편까지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충분한 여유물자를 비축하기 위해 몇 개월에 걸쳐 사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군수사령부의 선택 받은 용사들을 가로막은 가장 큰 난관은 미국 본토와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어마어마한 거리와 사막이라는 전장 그 자체였다.
냉전 말기의 미국은 소비에트군의 붉은 폭풍을 막기 위해 미국 본토와 유럽에 막대한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비축된 물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유통기간이 빤한 식품들을 수천 킬로미터, 경로에 따라서는 1만 킬로미터 이상의 먼 거리를 배나 항공기로 실어날라야 했다.
게다가 미국이 자랑하는 대규모 수송기 세력이나 고속수송선단의 우선권은 현지에 전개할 병력이나 장비에게 있었고, 먹고 마실 물자에 할당되는 수송기 등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평소에 상정하지 못한 대규모 물자가 단기간에 동원되는 바람에 기존 군용 물자와 계약업체의 긴급 증산만으로는 충분한 양을 조달하지 못했다. 결국 군수사령부는 중동 일대나 그 주변 국가에서 많은 식료품을 매입해야 했다.
사막이라는 특수한 전장 역시 보급담당자들의 머리를 쥐어짜게 했다.
일반적으로 사막이라면 불타는 태양과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언덕, 드물게는 모래폭풍 정도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현지의 사막은 고온 건조한 기후에 극심한 일교차와 악천후로 병사들을 괴롭혔다.
게다가 현장의 지휘관들은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지상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작전배치 직전의 병력들을 끊임없이 훈련시켰다.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 병사 개인이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600~4000칼로리, 많게는 4500~5000칼로리 이상의 고열량과 나트륨, 수분 공급이 필요했다.
또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까지 끼어 있는 일정 속에서 병사들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약간이라도 이완시키기 위해서는 기호품의 보급에도 신경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기호품 보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송과 보관의 난이도 상승도 덤으로 따라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슈워츠코프 사령관은 장기전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식량과 탄약의 보급 및 비축 규모를 당초 계획된 30일 기준에서 60일 기준으로 늘리도록 지시했다.
결재 서류만 보면 단순한 2단 곱셈처럼 보일지 몰라도, 조달과 수송, 현지 비축 준비 등 일련의 과정을 고려하면 그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군수사령부 일동은 사령부를 향해 저주를 쏟아내면서도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결국 임무를 완수했다.
군수사령부는 철군시점까지 총 9000만 명 분의 식량과 음료를 성공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방면에 보급했는데, 한 예비역 담당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식품과 식수로 블랙홀을 틀어막는 나날들’이었다.
화생방상황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일선 장병들에게 충분한 물 보급은 그 어떤 보급품보다 중요했다
급양계획에서 가장 ‘무거운’ 물 보급이었다.
사막이라는 전장의 특성상 음료의 보급 비율이 높기도 했지만, 다국적군의 최대 위협이었던 화학무기 대응을 위해서도 제독용 청수가 반드시 필요했다.군수담당자들에게 통상적인 보급품들에 비해 부피가 크고 보관이 까다로운 물은 최대한 줄이기를 원했지만, 지휘부의 요구는 절대 변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의 보급부대가 하루에 20갤런도 보급하지 못한다고?"
최종적으로 개인당 1일 20갤런, 약 75리터 이상의 배급량이 할당되었다.
그밖에 이런 저런 용도로 전쟁 기간 동안 보급된 식음료는 50억 8000만 리터에 달했으며, 이는 기름을 쏟아내며 달리는 미군 기갑군단과 어마어마한 규모의 다국적군 공군을 위해 준비된 연료 3억 8000만 리터보다 13배 이상 많은 양이었다. 그야말로 사막에 물을 쏟아내며 전쟁을 치렀다고 할 만하다.
물은 물론 대량의 탄산음료들도 함께 배급되었다
군수사령부를 괴롭힌 또 다른 문제는 물의 변질이었다. 금속 캔에 보관한 물은 24시간, 플라스틱 용기에 보관한 물은 72시간 이상 방치할 경우 식수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냉각장치를 장착해 15.5도의 정온을 유지하는 식수 트레일러라면 5일 정도는 보관해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식수 트레일러는 전군에 배치할 만큼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량의 물을 비축하기보다는, 일정한 양의 물을 조달하고 유통기한 내에 일선 부대까지 공급해 그때그때 소비시키는 방식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대부분의 식수는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 소유의 담수생산시설을 활용해 공급했고, 소부대나 개인 단위의 식수는 패트병에 담아 그대로 일선 부대에 분배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공급된 개인용 식수만 하루 최대 600만 갤런, 2270만 리터에 달했다.
패트병 형식의 식수는 일반적인 팔레트를 활용한 수송이 가능하고 분배도 병단위로 가능하지만, 생산량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 결국 직접 보급되는 식수 이외의 물은 결국 트레일러를 사용해야 했다. 물 사용량이 연료 이상으로 많았으므로 식수 및 청수 수송에도 차량이 대거 동원되었는데, 일선에 할당된 물 보급량을 채우기 위해 최대 2500갤런의 물을 적재하는 전용 트레일러는 물론 야전소방차량까지 끌어들여야 했다.
또 중앙의 물 보급이 단절되거나 일선 부대에 즉각적인 대량의 물 소요가 발생하는 경우를 상정하여 시간당 3000갤런의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역삼투압식 정수시설을 군단급 보급대마다 배치하고, 도합 609110세트의 정수제를 장병들에게 직접 지급하여 유사시에 대비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걸프전에서 다국적군은 사막지역에서 군단급 작전을 수행한 사례로는 매우 드물게도 물부족으로 인한 부대단위의 위기를 거의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파병 초기에는 식자재 조달 문제로 식탁 위에서 올림픽 개막식에 버금가는 국제적 화합의 장이 열렸다.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는 소리다.
식사는 가능한 A레이션으로 구분되는 식재료를 공급하고 현지에서 조리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단시간에 대규모 병력에게 제공할 충분한 식재료를 사우디 아라비아로 실어나르는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군수사령부는 미국이나 그 동맹국에서 생산되는 통상적인 보급용 식재료 외에도 주변국에서 검품절차를 거쳐 조달한 식재료부터 단순 통조림류까지 수많은 ‘대안’들을 여기저기서 끌어들였다.
당시 식료품 보급과정은 정돈된 자료조차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러운데, 참전자의 회고에 따르면 병아리콩 통조림은 그리스나 이탈리아제였고, 정어리 통조림은 프랑스나 포르투갈, 드물게는 모로코제 상표가 붙어 있었으며, 특식으로 제공되던 로스트 비프 슬라이스는 오스트레일리아나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가공된 제품이었다.
라이스 계열의 요리에 사용된 쌀들은 방글라데시나 태국, 한국에서 실어날랐는데, 메뉴의 특성상 동아시아제 자포니카의 평이 좋지 않았다. 배치된 부서에 따라서는 이집트나 터키에서 사들인 아랍풍 콩조림 요리를 배식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개선되었지만, 적어도 파병 초기의 식단이 그리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20주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걸프전 추억의 맛으로 꼽히는 울프 버거
이런 혼란 중에 식단에 대한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 사막 한 가운데 새로운 프렌차이즈 햄버거 체인이 등장하기도 했다.
걸프전 파병 초기에는 식재료 조달 지연은 물론 충분한 조리 인력도 확보되지 않았다.
중부사령부는 급한 대로 사우디 아라비아의 민간요리사들이 임시직으로 대거 고용해 메스홀(Mess hall, 군인식당)에 배치했는데, 중동풍 요리에 익숙한 요리사들이 잡다한 식재료로 어색하게 조리한 캐서롤은 병사들에게 상당한 악평을 들어야 했다.
현지 급양담당관 중 한명인 웨슬리 울프 준위는 고육지책으로 병사들에게 개별적으로 햄버거와 핫도그를 판매해보기로 했다.
곧 드럼통을 잘라 만든 엉성한 그릴을 얹은 트레일러가 주둔지 주변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 핫도그를 팔기 시작했다. 울프 버거라는 별명이 붙은 이 햄버거는 사제 음식에 굶주린 장교와 병사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울프 버거라는 상표를 붙인 울프 모바일 트레일러는 다섯 대에서 20대로, 다시 100대 이상으로 늘어나 미군 병사들의 입을 만족시켰다.
당시 주둔지 식사를 담당하는 급양담당자들을 괴롭힌 최대의 난관은 아마도 1990년 11월 22일과 12월 25일, 즉 미국 최대의 명절인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일 것이다.
미국 국방부는 추수감사절마다 칠면조 요리를 배급하는데, 평시라면 민간 육류가공 업체와 계약 하에 6-9개월에 걸쳐 천천히 식품을 준비하거나 지역 부대가 할당된 예산으로 주변 민간기업과 계약해 직접 고기를 사들인다.
그러나 걸프전 발발로 인해 미국 본토의 병참국은 중부사령부의 군수담당자들과 함께 2개월 안에 40만 명에게 배식할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음식, 혹은 그 재료를 사우디아라비아로 보내야 하는 처지였다.
칠면조, 가공 칠면조, 햄, 쇠고기, 스윗 포테이토, 케이크와 파이까지. 수송선으로도 수 척 분량에 달하는 ‘제식화되지 않은’ 식재료들을 조리하기 쉽도록 반가공하고, 안전하게 배송하고, 이상이 없는지 검사하고, 일선 부대에 배식하기까지, 급양담당자들은 그야말로 전 세계를 뛰어다녀야 했다.
그나마 페르시아만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에서 이미 관련 업체들을 수배해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11월까지 총 4460만달러 규모의 민간업체 계약이 채결되었고, 결국 2300만 세트의 명절 음식들이 장병들의 뱃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T레이션은 대게 단순한 가열만 거친 후 그대로 배식했다
전투부대들은 주둔지에서 군수부서의 피와 땀과 눈물과 달러가 스민 식사와 치킨, 피자, 아이스크림 등의 기호식품들을 즐겼지만, 출동 이후에는 딱딱한 전투식량들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일선 부대의 식사는 부대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대게 매일 2끼의 전투식량과 1끼의 T레이션(혹은 B레이션)이 기본이다. T레이션은 USRIEM(US Army Research Institute of Environmental Medicine)이 1980년대 중반까지 연구한 군사영약학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개발된 대형 전투식량으로, 18~50인분의 주식 메뉴가 조리상태로 장기 보관이 가능하도록 진공포장되어 포장을 뜯고 최소한의 조리(가열)만 해도 충분히 먹을 만 한 다인분 식사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영하 60도부터 영상 49도 범위 내에서 3년 반 동안 식품이 변질되지 않는 진공 레토르트 포장방식을 사용해, 기존의 원통형 통조림보다 용적이 작고 가벼우면서도 보관이 매우 용이한 편이다.
그리고 운송용 박스에는 포장된 주식 외에도 배식용 식판과 종이컵, 각종 소스와 커피 들어 있어서 식사에 필요한 준비절차가 최소화되므로, 취사병과의 인력 소요와 정기적인 조리업무 부담을 크게 줄여준다.
대부분의 T레이션은 3끼니 주식과 후식을 합쳐 12~36가지 간편식이 들어간 트레이팩 형식으로 배급되었으며, 정량배식보다는 뷔페 형식으로 분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맛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아서 일부 병사들은 Bolino 컵누들과 같은 사식으로 식사를 때웠고, 본토에서 집단탈영문제로 파병이 취소된 주방위군 부대들을 두고 “식사가 맛이 없어 도망간거다.” 같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부에서는 소모율과 단편적인 설문조사만을 보고 배급한 식량 가운데 T레이션의 선호도와 만족도가 가장 높다는 결론을 내렸고, 병사들은 한동안 불만ㅅ가항이 개선되지 않은 전투식량에 고통받아야 했다.
T레이션의 가장 큰 문제는 사실 맛 보다는 생산량과 비축량의 제한이었다. 보급과 배식이 편리한 T레이션은 고정된 식당을 운용하기 어려운 거의 모든 일선부대에 배급되었기 때문에, 현지 소모량이 본토의 생산량을 크게 초과했다. 그 결과 재고량이 급격히 소진되었고, 여기에 운송과정의 병목현상까지 겹치면서 일부 연대-대대 단위 T레이션 재고는 한때 1일분까지 줄어드는 등 보급과정의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은 MRE의 배식량 증가였다.
주둔지를 벗어난 이후의 식사는 대게 이런 식이었다. MRE의 맛을 비난하는 병사들도 편리성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6년 최초로 12개의 메뉴가 생산된 MRE는 걸프전에서 최초로 대량 보급되었다.
개인의 1회 식사용 주식과 부식으로 구성된 MRE는 T레이션과 같은 1980년대 이후의 군사영양학 연구를 바탕으로 개발되었으며, 실제로 패키징 방식을 제외한 많은 부분이 흡사하다.
MRE 역시 T레이션과 같은 장기보관이 가능한 진공 레토르트 포장을 채택했지만, 개인 식사를 위한 주식과 부식, 디저트나 악세사리 등을 전부 개별포장하고 이를 비닐 팩에 담는 형태로 제작되어 쉽게 변질되는 물이나 운반이 어렵고 한번 개봉하면 반드시 전부 먹어야 하는 T레이션 등에 비해 보급과 관리가 압도적으로 편리했다. 게다가 재고까지 많았다.
이런 활용도에 주목한 미국 육군은 MRE를 아낌없이, 정말 아낌없이 쏟아냈으며, 이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하루에 1회 이상의 식사를 MRE로 배식했다. 그리고 이 정책들은 그대로 ‘Meals, Rarely Edible’(식량, 드물게 섭취 가능), ‘Meals Rejected by the Enemy’(적군도 거부한 식량) 같은 부정할 수 없는 별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해병대 사이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MRE 주메뉴를 몰아주는 내기가 성행했다.
사진은 관행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당시의 제임스 매티스
보관성이나 편리성은 분명 뛰어났지만, 이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한 결과 전시의 스트레스로 인해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민감한 입맛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 주된 원인이다. (보관만 잘 한다면 맛 자체는 ‘평범한 인스턴트 식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걸프전 당시에는 촉감이 좋거나 맛이 강한 쇠고기 스튜나 미트볼 등 일부 메뉴만이 ‘그나마 먹을 만 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가능한 모든 MRE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4년동안 더운 선박이나 창고 구석에 박혀 있던 물자들도 일부 섞여 들어갔다. 진공포장의 특성 상 식중독이나 그와 유사한 질환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맛이나 식감이 좋지 않은 쪽으로 변하는 바람에 새로운 전투식량에 대한 악평에 크게 일조했다. 쿠웨이트 방면에 투입된 해병대 병사들 간에는 인기 있는 주 메뉴 교환이 빈번히 이뤄졌고, 전선 북단의 미국-프랑스 연합군 사이에서는 프랑스제 전투식량이 특히 우대를 받기도 했다.
또 가열이나 조리 수단이 제대로 강구되지 않아서 (비연소 히터는 1990년에 등장해 극히 한정된 양만 공급되었다) 전차나 보병전투차의 승무원들은 차량의 라디에이터에 레토르트 파우치를 끼워 넣어 덥혀 먹었고, 그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는 포장만 뜯고 식사를 해결했다.
페르시아만과 지중해와 대서양 건너편의 본토에서는 하이테크 푸드가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고 있다거나, 사막에서 스팸을 닮은 구시대의 녹색 깡통(C레이션을 뜻한다)을 몰아내는 전투식량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내용의 기사가 대서특필되곤 했지만, 당장 다국적군 총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마저 “접착풀을 억지로 삼키는 기분”이라며 MRE의 맛과 질감을 혹평하는 상황에서 호의적인 평가가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준비기간과 정리기간을 합쳐도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전쟁 중에 이미 생산된 전투식량을 개선하기란 불가능했고,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묵묵히 먹어서 응원하는 것뿐이었다.
데저트 바는 사막의 열기에도 쉽게 녹지 않는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걸프전에서 모든 생산량을 쏟아낸 데저트 바는 이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부식으로 제공된 초코바의 경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급양부서들은 섭취 용이성과 부족한 열량, 당분의 급속 보충을 위해 초코바를 배식했는데, 사막의 경우 고온으로 초코바가 쉽게 녹아버릴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걸프전에서는 최대 60도의 온도에서도 녹지 않는 특수한 초코바가 유명 초콜릿 업체인 허쉬의 남서아시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데저트 바라는 이름으로 일선에 배급되었다. 병사들은 녹지 않는 초콜릿의 등장은 높이 평가했지만, 식감이나 당도에 대한 평은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