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상 대표적인 ‘독재자’를 뽑자면, 두 인물을 거론할 수 있겠습니다. 이전 시간에 다루었던 ‘아돌프 히틀러’와 더불어 ‘이오시프 스탈린’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 두 독재자 간의 전투는 세계를 뒤흔들 만큼 큰 사건인 동시에 그 전쟁 상황 역시 끔찍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현재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지역을 당시 ‘스탈린’의 우상화를 위해 ‘스탈린그라드’라 불렸었습니다. 이 지역의 명칭만 보아도, ‘스탈린’의 이름을 딴 매우 상징적인 지역이었죠. ‘스탈린그라드’ 이 지역은 공업도시로써 군수공장이 포진해 있고, 볼고강을 따라 운반에 용이한 전략적인 이점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로써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도시였죠.
사실 또 다른 설도 있습니다.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딴 도시이기 때문에 그 상징성이 짙었고, 이 역시 ‘히틀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딴 그 도시를 짓밟아버리고 싶은 욕망이 든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을 겁니다. ‘스탈린’은 반대로 절대로 이 도시만큼은 사수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독한 독재자답게 어린 아이들, 심지어 어린 여자아이들까지 전투에 참여시켰죠.
그렇게 1942년 8월,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독일군은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스탈린그라드‘ 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가합니다. 폭격기 600대가 한꺼번에 한 도시를 폭격하였는데, 당시 그 도시에는 민간인들이 고스란히 있었습니다. 피난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죠. ’스탈린‘은 도시의 민간인들의 피난을 금하였습니다. 시가전에 참여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죠.
그렇게 시민 4만여 명이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맙니다. 폐허가 된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한 독일 군을 처음 맞이한 것은 기본적인 교전 훈련도 받지 못한 여성병사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독일 군은 의아해했습니다. 정규 소련군은 보이지 않고, 주변의 시체들은 대부분 여성병사들이나 민간인들뿐이었죠.
이러한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폐허가 된 건물 속에서 소련군이 갑자기 튀어나왔고, 격렬한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그다지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요. ‘히틀러’는 병력을 더 투입 시켜, 결국 이러한 방어선을 결국 뚫어버립니다. 그렇게 이제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점령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상황은 ‘스탈린그라드’ 북, 서, 남쪽이 이미 독일 군에게 포위된 상태였고, 소련 병사들은 ‘볼고 강’ 근처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을 뿐이었죠. 이때 ‘스탈린’이 명령을 하달합니다.
“볼고 강을 건너 도망가려는 병사들을 즉결 처분하라.”
목숨을 걸고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는 것이었죠. 소련군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필사적으로 싸우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스탈린’이 행했던 대숙청을 직접 봐왔기 때문에 도망가는 것은 처참하게 죽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이렇게 평균 생존시간 24시간 이라는 끔찍한 소모전이 진행되게 됩니다. 독일 군 역시 기존에 전차와 폭격기를 활용한 전술에 적응되어 있던 터라, 시가전이 괴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순히 보병의 화력과 기동력만으로 승패가 갈리기 때문에 여타 전술이라 할 것도 없었죠.
시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시가전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습니다. 진격하는 내내 여기저기서 소련군이 튀어나왔고, 심지어 겨우 20m 사이를 둔채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양측의 사상자는 삽시간에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이러한 아수라장 속에서 소모전은 결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이 작정하고 소련군을 섬멸하려하면, ‘볼고 강’을 통해서 병력과 물자들이 계속 보충되었죠. 이 보급로를 차단하지 않고는 승산이 없겠다고 독일 군은 생각했습니다.
당시 소련의 군대는 엉망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충족되는 병력 대다수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인데다가 일부 아시아계 소련군들도 간혹 보였죠. 급한 대로 시베리아나 동아시아 쪽에서 징집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과는 보나마나이었죠.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보시면 알겠지만, 병사들이 제대로 총을 들고 싸워보지 못한 채 무더기로 죽어나갔습니다. ‘스탈린’은 그래도 계속해서 닥치는 대로 인력들을 긁어모았습니다. 자신의 상징과 같은 ‘스탈린그라드’를 뺏긴다는 것은 아마 전략적요충지라는 요인도 있겠지만,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 남기는 것과 같았겠지요.
지루했던 소모전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됩니다. 이제 그동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처절한 전투가 끝을 향해 스퍼트를 내고 있었죠, 붉은 10월 제철소와 마마이 언덕 부근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같은 곳에서만 연일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양측 병사들 수 개 사단 이상 병력이 괴멸하게 됩니다. 이젠 독일군의 피해도 감당하기 힘들 수준에 이른 것이죠. 처절한 전투 끝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90%이상을 점령하게 됩니다. 남은 소련군들은 겨우 ‘볼고강’ 서쪽에 고립된 채 농성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대반전의 서막이 벌어집니다. 소련군은 끈질긴 병력 보급으로 결국 ‘볼고강’ 교두보를 사수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스탈린’ 휘하의 참모들은 머리를 싸매고 독일군을 이길 방안을 생각하게 됩니다. 방어만 하다가는 결코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스탈린’ 휘하의 참모 두 명의 작전, 일명 ‘천왕성 작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볼고강’ 부근의 소극전인 수비를 떠나서 대규모 공세로 한 번에 남부 러시아 전선을 뒤집는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작전을 승인한 ‘스탈린’은 앞으로 모든 명령은 구두로 전달하고, 무선이나 문서 사용은 금지하라고 명령합니다. ‘천왕성 작전’에 사활을 걸겠다는 굳은 의지였죠. 이렇게 소련군은 ‘볼고강’ 부근에 최소한의 병력만 보급하고, 대대적으로 병력을 집결시킵니다. 그 결과 9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모이게 되죠.
1942년 11월 19일 마침내 ‘천왕성 작전’이 개시됩니다. 엄청난 대병력 앞에서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은 삽시간에 무너지게 되고. 11월 20일 남동쪽에서 독일군을 격파합니다. 허무하게도 작전 개시 3일 만에 ‘천왕성 작전’은 성공하게 되죠. 이제 전세는 완전히 뒤집어 지게 됩니다. 독일진역 측 병사들은 이젠 소련에게 포위당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죠.
독일 참모들은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히틀러’에게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계획을 제안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시 ‘히틀러’가 이를 승인할 리가 없었죠.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 슬라브 민족 따위에게 패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스탈린’ 이나 ‘히틀러’나 당시 광적으로 후퇴, 패배라는 단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한 사람의 과욕과 광기가 포위된 병사들에게 생지옥을 안겨주었지요. 보급도 끊긴 상태에서 남은 병사들은 굶어죽거나, 시체를 파먹었다는 설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후에 포위망을 뚫기 위해 독일 측에서 ‘겨울폭풍 작전’을 실행하지만, 이 역시 히틀러의 망상에 기반한 작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었습니다. 실탄마저 떨어진 상황에서 독일군의 선택은 단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승인을 하던 하지 않던 ‘항복’이 그들의 마지막 답이었지요. 사실 개별적인 ‘항복’을 할 수 도 있었으나, 포로가 되면 끔찍한 신세가 될 것이 불보듯뻔한 상황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항복’한 병사들은 극소수였습니다. 이렇게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3년 2월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 간의 대결, 그 끝은 결국 양측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게 되었고, 사상자 역시 200만이라는 엄청난 숫자를 기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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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 간의 대결,
그 끝은 결국 양측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게 되었고,
사상자 역시 200만이라는 엄청난 숫자를 기록하게 된다.
그들은 광신자 전쟁은 멸망이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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