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호는 이제 주변의 말들에서 완전히 귀를 막아버렸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부실 안에서 공연히 크게 울렸다. 민호는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 자신임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창밖으로 먹구름이 스멀스멀 몰려오는 게 보였다. 일기예보에서는 저녁이나 돼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지만 상태를 봐서는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신발끈이 잘 묶이지 않았다. 괜히 급해질수록 손이 엉켰다. 타앙- 공허한 하늘을 소란스럽게 하는 총성이었다. 김주민이 연습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다른 것들로 부터는 등을 돌리는 것이 가능했지만 역시 주민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발걸음, 가속! 가속! 가속! 을 외치는 근육의 움직임, 요동치는 심장박동이며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의 춤사위마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상상만으로도 압도적인 속도였다. 마치 바람이 밀어주는 듯한 가벼운 몸놀림, 이길 수 있을까? 민호는 무겁게 내려앉는 물음을 발에 묶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호는, 말하자면 구름 같은 사람이었다. 태평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 하며 지독한 평화주의적 성격이 그랬다. 느긋한 성격 덕에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으면서도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없었고 쫓아가려 해도 보기와는 다르게 민첩해서 쉽게 따라갈 수 없었다. 매사에 원만한 방법으로 넘어가려는 기질이 있지만 일단 머리에 피가 쏠리면 우박이든 천둥번개든 쏟아낼 것처럼 무섭게 화를 냈다. 민호가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동생 희민이 반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장 교실로 찾아가 쑥대밭을 만들었고 다른 한 번은 소꿉친구인 민아가 유치원 원장에게 추행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원장의 팔을 살점이 뜯겨나갈 때까지 물어 뜯었다. 그 두 번의 사건 이후로는 한 동안 화창한 상태였는데, 이만큼이나 민호의 속에서 먹구름이 부글거리는 건 꽤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 자리를 뺏겼어.
민호는 운동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민과 눈이 마주쳤다. 주민은 엷게 미소 지으며 출발선으로 돌아갔다. 여유 있는 행동이 괜히 더 신경에 거슬렸다. 민호는 끓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천천히 운동장 주변을 돌았다. 붉은 트랙 위로 전에 없던 활기가 돌았다. 종합체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이렇게 열심이었던 적은 없었다.
어차피 또 천민호가 다 할 텐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응원이나 해야지.
딱 작년 이맘때였다. 민호를 도마 위에 올려두고 갈기갈기 조각을 냈던 말들, 일 학년 풋내기 선수가 보여준 종합체전 1위의 반동은 코치와 감독, 많은 선생님들의 기대와 더불어 육상부 부원들의 질투, 혹은 시기로 돌아왔다. 육상부의 모든 시스템이 이 학년이 된 민호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민호의 컨디션이 좋은 것 같으면 훈련의 강도를 높였고 몸 상태가 이상하다 싶으면 느슨한 선에서 끝냈다. 다른 부원은 고려하지 않았다. 민호가 달릴 때면 항상 서슬퍼런 눈과 가시돋친 입이 민호의 뒤를 바짝 쫓았다.
"같이 달리자."
먼저 다가온 것은 주민이었다. 민호는 다만 어리둥절했다. 코치는 종합체전 2연속 우승에 빛나는 민호와 연습하는 게 도움일 될 것이라는 주민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민호가 트랙을 밟는 것을 허가했다.
붉은 지평선. 두 달만의 황홀한 풍경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했다. 출발선 앞에 선 민호는 땅을 밟는 느낌을 확인하듯 제자리에서 걸었다. 착, 착, 발에 감기는 감촉마저 소름돋게 반가웠다.
"여유로워?"
주민의 말 한 마디에 달아오르려고 하던 민호의 몸이 금세 식어버렸다. 주민은 벌써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긴장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골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고 이기려는 투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한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민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코치가 하늘을 향해 권총을 들었다. 민호도 크라우칭 자세를 잡았다. 구경꾼이 많았다. 중거리반, 단거리반, 투척반, 심지어 축구부도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민호는 속으로 스위치를 떠올리고, 꺼버렸다. 그렇게 하면 주변의 거슬리는 것들을 차단할 수 있었다. 적막 가득한 서계에서 민호와 주민만이 호흡하는 것 같았다. 어째선 주민의 존재는 꺼버릴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타앙-.
나지막한 떨림으로 신호탄이 터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민호는 곧장 튀어 나갔고 주민은 조금 뒤쳐졌다. 달려, 달려, 달려. 다리를 움직여. 머릿속이 하얘졌고 주변 풍경이 스치듯 지나갔다. 흰 선이 어느새 눈 앞에 당도해 있었고 다리는 시동이 걸려 점점 빨라졌다. 그제야 정신이 든 민호는 주민과의 차이가 제법 벌어졌다는 것을 인지했다. 탁 트인 시야가 기분 좋게 펼쳐져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먼저 결승선을 끊는 것은 당연했다. 등을 밀어주는 바람 덕에 속력을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이 더 불었으면... 더, 더, 더!
-바람의 열쇠
속삭임이었다. 아주 작은 음성이었지만 스위치를 끈 집중상태의 민호가 주민의 목소리를 놓칠 리 없었다. 어디선가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그때부터 바람이 변하기 시작했다. 민호의 등을 떠밀어주던 바람이 역풍으로 바뀌었고 바로 옆 레인을 달리는 주민에게만 길을 열어주었다. 그동안 벌려두었던 차가 삽시간에 좁혀졌다. 이내 주민의 등이 시야에 들어왔고 점점 멀어져갔다. 아무리 발악해도 다가갈 수 없었다.
골......
민호는 도착한 즉시 주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 없었다. 두 달 전 그때도, 지금도 갑작스레 상황이 변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 더러운 수를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호가 주먹을 치켜 들었다. 주민은 아무 저항도 없이 씩 웃었다.
또?
주변의 술렁거림이 민호의 주먹을 멈춰 세웠다. 경멸과 혐오의 시선이 민호에게 날아 들었다.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주민이 뭔가 속임수를 썼다는 것을 알고 열이 받아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고 모두가 민호의 흥분한 모습을 목격했다. 모두가 주민의 편이었고 모두가 주민의 기적 같았던 막판 스퍼트를 똑똑히 보았다.
'자만심에 빠진 육상부 에이스가 불현듯 나타난 전학생에게 보기 좋게 지고 분노해 폭행사건을 일으켰다!'
두 달 전 학급신문을 장식했던 기사였다. 그리고 민호는 출전정지를 당했다. 오자마자 폭행을 당한 불쌍한 전학생은 육상부 부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새로운 에이스로서 부상했다.
그런 에이스가 되고 싶었다고. 나도.
민호는 주먹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걸음을 돌려 운동장에서 떠났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표면적 진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