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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생존 성공?>
-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노브고로드 공작에서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옮긴 후에도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계속 존재했다. 한때 반몽골 봉기가 벌어졌지만 이는 네프스키에 의해 제압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페이푸스 호수 전투의 패배 이후 튜튼기사단이 전열을 재정비, 프로이센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노브고로드에 집적대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행히 1260년 사모기티아(1) 반란군에게 튜튼기사단이 스쿠오다 전투에서 대패하고 사모기티아를 다시 리투아니아에게 뱉어내면서, 프로이센에서 헤르쿠스 만타스의 반란이 터졌다. 튜튼기사단의 주력은 프로이센의 대반란을 진압해야 했기에, 노브고로드는 어느정도 한숨을 돌리는 듯 했다. 하지만 역으로 본부가 반란 진압에 신경이 팔린 틈에 안그래도 독립적이던 리보니아 지부가 노골적으로 노브고로드 재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네프스키도 죽은 상황에서 잘못하면 노브고로드는 리보니아 지역에 존재했던 예르시카 공국, 코크네스 공국(2)처럼 멸망할 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공국들에게는 다우만타스란 인물이 존재했다.
- 프스코프의 지도자 다우만타스 -
다우만타스는 리투아니아 왕 민다우가스의 친척이었다. 그러나 민다우가스가 그의 아내를 강탈하자, 그는 트레니오타가 민다우가스를 죽일 때 함께 하였다. 하지만 이 행보로 인해 그는 민다우가스의 살아남은 아들 바이슈발카스가 군사를 이끌고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탈환하자, 프스코프로 추방되었다.
- 13세기 후반 러시아 군대를 묘사한 오스프리 삽화. 1번은 중무장한 서부 러시아 기병, 2번은 프스코프에서 온 보야르 귀족, 3번은 남동부 러시아 기병이다. -
추방된 그는 1265년 프스코프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프스코프의 군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튜튼기사단 리보니아 지부가 노브고로드를 침공해오자 노브고로드와 함께 이들에 맞서 싸웠고 에스토니아로 역공을 가했다. 1268년 2월 18일 에스토니아의 라크베레에서 노브고로드-프스코프 연합군 2만여명 가량은 비슷한 수의 리보니아 군과 충돌했다. 초기에는 러시아인들이 강철돼지라고 부른 기사들을 앞세운 리보니아측이 우세했지만 러시아인들은 거짓 후퇴 전술로 이들을 몰살시켰다. 이 공으로 다우만타스는 1299년 병으로 죽을 때 까지 프스코프를 통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스코프는 노브고로드의 영향력이 적어지며 사실상 자립하게 되었다. 결국 노브고로드는 1348년 볼로토보 조약으로 프스코프의 독립을 인정했다. 프스코프 공화국이 성립된 것이다.
한편 라크베레 전투 이후에도 노브고로드는 서방 세력과 계속 충돌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그들이 존재할 기간 동안 스웨덴과는 26번, 튜튼 기사단과는 11번 싸웠다고 전해진다. 주요 충돌 지점은 에스토니아나 카렐리야, 핀란드 지역이었다. 그러나 한자동맹의 성립과 세차례의 십자군 원정을 통해 핀란드에서 스웨덴이 우세를 점하게 되면서 노브고로드와 서방 세력은 일종의 공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쪽 모두 서로 무역을 통해 이득을 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323년 스웨덴과 뇌테보리 조약을, 3년 후에는 노르웨이와 노브고로드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을 확정짓게 되었다. 물론 이후로도 간혹 충돌은 있어왔지만 이 충돌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 "알아서 기어라잉. 알간?" -
이 무렵 다른 문제가 터져나왔다. 바로 같은 러시아인들의 위협이었다. 첫번째로 트베르 공작 미하일이 노브고로드에 노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는 사건이 터졌다. 노브고로드는 미하일에 대항하기 위해 모스크바와 연대하였다. 노브고로드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미하일은 칸의 여동생을 살해한 범인으로 취급되어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트베르 공의 힘이 약해지자 모스크바가 노브고로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기 시작했다. 시메온이 토로츠크를 강탈해간 이후 모스크바는 조금씩 노브고로드를 위협해나가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이무렵부터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자신들을 벨리키 노브고로드, 즉 위대한 노브고로드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당시 노브고로드는 가죽을 얻기 위해 동쪽으로 뻗어나갔다. 동시에 우슈쿠니키라는 해적집단이 만들어져, 핀란드, 시베리아, 볼가강 유역에서 해적질을 하기 시작했다. 보야르들이 연관되어있던 이 해적집단들은 14세기 러시아에서 맹위를 떨쳤다.
<트베르-맹수가 되고자 했지만 현실은 고양이>
트베르 공국은 1241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동생 야로슬라프가 트베르를 분봉받으면서 성립되었다. 사실상 블라디미르 대공국 휘하의 여러 공국들 중 하나였지만, 킵차크 지배속의 혼란 속에서 트베르는 점차 그 힘을 강화시켜나갔다. 문제는 모스크바도 같이 강해졌다는 거지만.
- "내가 이제 블라디미르 대공이다! 으하하하하!" -
하지만 초기에는 트베르가 모스크바보다 유리했다. 트베르는 노브고로드에서 출발하는 무역로 상에 위치해있었지만 모스크바는 무역로와는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져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트베르 공 미하일은 1304년 경쟁자인 모스크바 공 유리를 군사력으로 억누르고 자신이 블라디미르 대공이 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노브고로드 공으로 선출되지만 노브고로드 공으로써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다가 폐위되었다. 그러나 그는 노브고로드를 포기하지 않았고, 노브고로드는 모스크바와 동맹을 맺었다. 거기에다가 유리 자신이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의 호의를 얻으면서 그는 블라디미르 대공 자리도 빼앗기게 되었다. 유리는 내친김에 트베르를 박살내기 위해 몽골군까지 끌어들여 트베르를 공격했지만 미하일이 오히려 유리의 군대를 괴멸시켜버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유리의 아내이자 우즈베크 칸의 여동생이 죽어버린 것이었다. 유리는 바로 그녀가 미하일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주장했고, 우즈베크 칸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미하일을 체포해 처형시켰다.
이후 트베르 공이 된 그의 아들 드미트리가 음모를 꾸며, 유리를 사라이로 소환되게끔 하였다. 이후 그는 유리를 암살했는데 이게 꼬리가 밟혀서 1326년 우즈베크 칸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의 동생 알렉산드르가 뒤를 이어 트베르 공이 되었다.
- "트베르는 불타고 있는가?" "예. 아주 잘 불타고 있습니다." -
이듬해 몽골 다루가치들이 세금 징수를 위해 트베르에 왔는데 그들은 트베르에서 행패를 부렸다. 그러자 트베르에서는 킵차크 칸국이 알렉산드르를 죽이고, 이슬람교를 트베르에 전파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폭동이 일어나 트베르 시민들이 다루가치들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꼭지가 돈 우즈베크 칸은 킵차크 칸국의 군대와 모스크바 군대를 동원해 트베르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렸다. 알렉산드르는 겨우 탈출해 프스코프로 망명했다.(3)
이후로도 트베르 공국은 존속했지만 미하일 2세가 리투아니아의 도움으로 잠시 블라디미르 대공이 됬을 때를 제외하고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약소국 신세가 되었다. 맹수를 꿈꾸었지만 사라이의 미움을 단단히 산 탓에 공들이 계속 처형되고 도시가 쑥대밭이 되면서 몰락한 것이다.
<갈리치아 볼히니아-식탁 위의 맛있는 통닭 한마리>
1240년 경 몽골이 러시아 남부를 휩쓸 때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의 공 다닐은 헝가리로 도주하였었다. 서방으로 망명해있던 그는 1245년 바투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사라이로 찾아가 바투에게 충성맹세를 하였다. 바투는 그가 본래의 영지를 통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단 이 충성 맹세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 "내 언젠가 몽골 놈들을 몰아내리라!" -
그는 리보프(4)에 수도를 둔 그는 독일인, 폴란드인 상인들을 초대하고, 아르메니아인들과 유대인들이 그의 도시에 거주할 수 있게 해주는 등 인구를 모으며 공국을 재건했다. 또한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서방 세계와 접촉했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아니지만 1253년에는 교황으로부터 루스의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로써 그의 공국은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이듬해 리투아니아와 조약을 맺어 그의 아들을 민다우가스의 딸과 결혼시키며 리투아니아와 혼인동맹을 맺기도 했다.
이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행보와는 반대되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서방을 더 위협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몽골을 공물만 꼬박꼬박 바치면 별로 해롭지 않은 존재라고 보았는데 그는 서방에 친숙했으며 몽골을 적대시한 것이었다. 사실 배경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데 네프스키가 살았던 블라디미르나 노브고로드는 서방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것이 12~13세기 경 부터였고, 그것도 서방의 일방적인 군사적 침공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던 반면 갈리치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서방과 접촉해왔고, 전쟁도 있었지만 결혼등 으로 서방과 혈연적으로도 엮이는 등 접촉의 방법이 좀 더 평화로웠던 것도 고려해야 될 것이다.
- "아버지. 불효 같아보이지만 살려면 서방을 멀리하고 몽골을 가까이 해야 됩니다." -
어찌 됬든 이런 행보를 지켜본 사라이는 1259년 군대를 보내 갈리치아-볼히니아를 짓밟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보여주었다. 5년 후인 1264년 다닐이 죽고, 그의 아들인 레프가 왕이 되었다. 그는 5년 전 사건의 영향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정책을 뒤집고 몽골에 충성하였다. 그는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했는데 1267년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바이슈발키스를 죽였고, 7년 후 리투아니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군대에게 패배했고, 오히려 검은 루테니아로 알려진 벨로루시 북부 지역을 상실했다. 단 다른 지역에 대한 확장은 성공해 보헤미아와 동맹을 맺어 잠시 크라코프를 점령하고, 루블린을 폴란드에게서 빼앗았으며, 헝가리령이었던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도 점령하였다.
- 갈리치아 볼히니아 왕국의 영토 -
그러나 1301년 레프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유리가 즉위하자마자 루블린과 카르피타아 루테니아는 다시 폴란드와 헝가리령이 되었다. 유리가 죽은 뒤 유리의 아들인 안드레이와 레프 2세가 공동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들은 리투아니아와 킵차크 칸국에 맞서기 위해 폴란드, 튜튼 기사단과 접촉하였다. 그러나 리투아니아는 떠오르는 해였으며, 킵차크 칸국은 아직 이빨이 살아있는 사자였다. 리투아니아 군대는 1321년 레프 2세의 아들을 루츠크에서 죽였고, 2년 후 킵차크 칸국이 갈리치아-볼히니아를 침공해 두 왕을 살해했다. 두 왕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갈리치아-볼히니아의 왕통은 단절되었다.
그러자 게디니마스의 막내 아들이자 안드레이의 딸과 결혼한 데메트리우스와 유리의 외손자인 마조비아의 볼레슬라우가 왕위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주인이 사라지니 주인 재산 두고 이웃들이 다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싸움은 데메트리우스가 바디스와프 1세의 포로가 되는 바람에 볼레슬라우에게 유리해지더니, 결국 갈리치아 귀족,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합의에 따라 볼레슬라우가 동방 정교회로 개종한다는 전제하에서 갈리치아의 왕이 되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 "거 진짜 주인인 류리크 가문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으로 한 번 피아스트 가문이 해먹었으니 이젠 우리가 해먹어야된는거 아니오. 매부. 근데 이게 뭔 짓이오!" -
하지만 볼레슬라우도 후사 없이 1340년 귀족들에 의해 감금되더니 독살되었다. 폴란드의 왕 카지미에슈 3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군대를 일으켜 리보프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리투아니아의 지원 요청을 받은 킵차크 칸국이 리보프를 공격했다. 이 혼란을 틈타 리투아니아가 갈리치아를 침공했고, 1344년 일전에 포로가 된 적이 있던 데메트리우스가 볼히니아를, 카지미에슈가 갈리치아를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참고로 카지미에슈는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의 여동생 알도나와 결혼하고,(5) 반튜튼기사단 동맹을 맺은 상태였는데 땅(그것도 원래는 남의 땅) 욕심 앞에서는 친척이고 뭐고 없었다. 물론 이건 알기르다스도 마찬가지였다.
- "흥! 갈리치아는 이제 폴란드의 영토다. 처남이고 뭐고 다 꺼져라" -
그런데 1348년 리투아니아가 튜튼기사단에 패하자 카지미에슈가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움직여 데메트리우스를 쫓아내고 볼히니아도 점령했다. 리투아니아는 바로 모스크바 공국 및 트베르와 혼인 동맹을 맺어 후방을 안정시키고 갈리치아를 공격했다. 결국 1352년 볼히니아 지역은 다시 리투아니아로 넘어갔다. 그러나 1366년 폴란드가 다시 침공했고, 리투아니아는 볼히니아를 다시 뱉어내야 했지만, 4년 후 카지미에슈가 죽자 헝가리 왕 로요슈와 협상을 통해 리투아니아가 볼히니아를 다시 얻어냈다. 그러나 이후로도 분쟁이 지속되어 요가일라가 폴란드 여왕과 결혼할 때까지 이 남의 땅 두고 다투기는 지속되었다...
(1) 리투아니아 해안지대. 당시 일시적으로 튜튼기사단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2) 두 공국들 모두 현재의 라트비아 지역에 존재했던 러시아계 공국들로 리보니아로 몰려오던 독일인들과 덴마크 인들에 의해 멸망당했다.
(3) 알렉산드르는 이후 리투아니아, 스웨덴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프스코프로 돌아온 후 우즈베크 칸에게 싹싹 빌어서 겨우 트베르 공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1339년 아들인 표트르와 함께 사라이에서 우즈베크 칸의 명령에 의해 몸이 4조각으로 나뉘어지는 형벌로 처형됬다.
(4) 우크라이나 어로는 리비우라고 한다.
(5)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도나는 처남, 매부가 서로 남의 땅 가지고 주먹질 시작하기 전에 죽어서 이 막장 풍경을 보지는 않았다.
첫댓글 킵차크 칸국 칸들은 슬라브족 처자들을 얼마나 따묵따묵했나요?
러시아나 중동에서도 원나라처럼 초야권을 행사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