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미카엘 주교님을 기리며
- 박정일 주교님 고별식 추도사 -
오늘 우리는 공경하올 박정일 미카엘 주교님을 인간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께 보내드리는 엄숙한 고별식에 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자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의 큰 어른으로서 교회를 위해 평생 헌신하신 주교님께서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1926년 평안남도 평안에서 태어난 박정일 주교님은 주님 품으로 가시기까지 현대사 격동기 질곡의 세월을 온몸으로 겪으시며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사제의 길을 꿈꾸며 덕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해방 이후 북한 공산 정권이 신학교를 폐쇄하는 바람에, 평양에서 서울로 건너와 혜화동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6·25 전쟁 동안에는 대구와 제주, 부산으로 피난하면서도 성소의 꿈을 키우며 임시 신학교에서 사제 수업에 진력하셨습니다. 그리고 1952년 당시 머나먼 로마 우르바노대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1958년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으셨습니다.
사제가 되기까지 그렇게 수많은 역경을 겪으셨던 주교님께서는 무슨 연유일지 모르겠으나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따라 교구장이 되어서도 한곳에만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박정일 주교님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제주, 전주, 마산 등 3곳에서 교구장을 지낸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먼저, 주교님께서는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지내시다가 1977년에 제2대 제주 교구장으로 피명되어 주교품을 받고 5년간 제주교구를 이끄셨습니다. 1982년에는 제6대 전주교구장으로 자리를 옮겨 전주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하고 천호성지와 치명자산성지를 조성하는 등 교구 발전에 기여하셨습니다. 그리고 1988년에 제3대 마산 교구장으로 부임하신 후 2002년에 사목 일선에서 물러나기까지 14년 동안 마산교구가 친교, 봉사, 증거의 교회 공동체로 거듭나도록 헌신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교회는 늘 선교해야 하고, 사회 속에 현존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낯설고 새로운 곳으로 가는 주님의 부르심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주교님의 인생 여정을 들여다보노라면 복음을 전하는 이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언제 어떤 자리에 머물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주저하지 않고 나서는 사제적, 사목적 열정을 주교님을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그동안 여러 곳에서 주님의 일을 하느라 수고하셨으니, 이젠 하느님께서 눈부신 천국에 온전히 정착할 수 있도록 받아 주시고 영원한 안식을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이제 박 미카엘 주교님을 하느님께 보내드리며, 주교님께서 맺은 결실을 기억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주교님은 사제가 부족한 지역에 교구 사제를 한시적으로 선교사로 파견하는 제도인 ‘피데이 도눔(Fidei Donum)’을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먼저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도 보편 교회에 이바지하는 선교 활동에 동참하자는 의도였는데, 이것이 밀알이 되어 현재 여러 교구의 사제들이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세계 지역 교회를 도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교님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일원으로서도 모범적이고 훌륭하게 기여하셨습니다. 이주사목위원회, 정의평화위원회, 신앙교리위원회, 천주교용어위원회,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시며 주교회의 위원회가 활성화되는데 공헌하셨습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는 주교회의 의장 소임을 맡으셨는데, 이 시기에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은퇴하신 이후까지 약 11년간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가 복자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컴퓨터를 활용하시어 주교단의 역할, 순교자 현양, 신앙인의 신심을 강조하는 성구와 문구를 넣어 정성스럽게 ‘기도 상본’을 만들어 주교 영성 모임 때마다 나누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런 다양한 기도 상본을 통해 수많은 사제들, 신자들, 지인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시고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신 주교님께 두 손 모아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국 천주교회와 우리는 모두 주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가르침을 고이 간직하며 길이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의 십자가를 모두 내려놓고 하느님 품 안에 드신 지극히 사랑하올 박정일 미카엘 주교님! 주교님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저희의 마음은 못내 슬프고 아쉽기만 합니다. 하지만 주교님께서는 세상 고뇌와 육체적 고통을 다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끝없는 행복과 기쁨이 펼쳐지는 천상 전례에 참여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작별 인사’를 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천상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지상의 순례자의 길을 걷는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박정일 미카엘 주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내리소서.
한국의 순교 성인들과 복자들이여 오소서.
주님의 천사들이여 마주 오소서
이 영혼을 받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앞에 바치소서. 아-멘.
2024년 8월 31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 용 훈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