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동안 지속됬던 중세의 암흑기를 걷어내고 15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시작된 문화적 진보를 역사적인 용어로 '르네상스'라 칭한다. 이탈리어어 'rinascita(부활)'에서 기원된 르네상스는 서구 유럽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이 르네상스 운동으로 탄생된 변혁이 1700년대부터 시작된 서구 유럽의 황금기를 잉태시켰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자체는 당대로 따지자면 그 영향력이 오직 유럽에만 한정되있었지만, 그 파급력은 전세계로 뻗어나갔고, 이때문에 중요한 부분으로 다뤄질 수 밖에 없는 것.
어느 시대, 어느 지방에서든지 이러한 거대한 사회문화적 운동이 일어나는 데에는 다각적인 이유가 혼재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경우에는 특히, 그 역사적인 배경에 상당한 절묘함이 내재되있다는 점이 꽤나 신묘하기 그지없다. 먼저 르네상스 발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그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이 보존하고 있던 고대의 지식과 보고들이 이탈리아에 유입된 것이었다. 물론 15세기의 유럽에서도 자체적으로 대학들이 건설되고 학술적 연구가 진행된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진보들은 어디까지나 당시 유럽을 주름잡던 교회, 또는 국왕의 조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부수적인 지식들이었으며, 이에 반하는 모든 인식들은 이단Nobody expects the Spanish inquisition!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중세 유럽의 학문적 성과는 고대 그리스보다 뒤쳐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간극을 바로 이 비잔티움의 보고들이 메워준 것이었다.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은 1492년에 일어난 그라나다 왕국의 함락이었다. 그라나다 왕국은 당시 이베리아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다.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레콘퀴스타(Reconquista,재정복) 운동에 힘입어 그라나다가 함락되며 전 이베리아는 732년, 투르-푸아티에에서 이슬람의 진격이 저지된 이래로 약 800년간 이어져 내려온 무슬림 통치를 끝내고 '기독교인의 땅'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레콘퀴스타가 가지는 의미는 서유럽인들이 이슬람의 발달된 지식을 접하고, 그대로 흡수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12세기, 톨레도를 회복한 기독교인들은 그곳에 저장된 대규모의 장서를 번역하며 고대 그리스의 저작과 이슬람의 과학 지식들을 받아들였고, 이는 르네상스와 서유럽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이슬람의 지배를 수백년간 받아왔던 알 안달루스(안달루시아)를 손에 넣으며 또 다른 지식의 보고를 손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어느평행세계의그라나다는신대륙을개척하고있다카더라
또또 다른 역사적 배경은 1453년, 백년전쟁이 종결된 것이다. 잔 다르크의 활약과 반영감정의 고조는 114년 동안 걸쳐왔던 지루한 전쟁의 승리를 프랑스에게 안겨줬다. 이 당시 영국 왕가는 프랑스 본토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집중하면서도 국내 귀족들의 분열 또한 신경을 두어야 하는 막장 상황이었는데, 실제로 백년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1455년 영국에서는 장미전쟁이 벌어진다. 양국의 최종적인 종전 협상은 1475년에 치뤄졌지만, 실상 1453년에 영국령 보르도가 함락되고,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내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사실상 전쟁이 종결된 것으로 본다. 백년전쟁이 끝나며 서유럽의 안마당인 프랑스는 전화에서 벗어나 안정기를 가지게 되었고, 전쟁기에 축적된 과학 지식, 그리고 의식의 변화(몇몇 학자들은 백년전쟁이 끝나면서 원시적인 국민,민족 의식이 프랑스에 태동했다고 한다. 비약이 조금 심하지만.)는 남서와 남동에서 불어온 변화의 바람에 섞이며 서유럽 르네상스의 교류망을 형성하게 된다. 유럽짱깨탄생에유로파유저들비명소리가들려온다
또또또 다른 역사적 배경은 1444년에 일어난 기나긴 원정(Long Campagin)이라 불리는 오스만에 대항한 십자군(바르나 십자군)이었다.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이끌었던 이 십자군은 당시 비잔티움을 빈사 상태로 만들고 한창 승천하고 있던 오스만 튀르크를 견제하기 위해 조직된 십자군이었다. 초반에는 그래도 승기를 잡기는 했으나, 바르나에서 문자 그대로 개발살이 나며 끝장이 난다. 어느 정도 개발살이 났냐면.. 폴란드 국왕이 전사 -_-;;; 이 십자군이 실패로 돌아가며 유럽에는 '아니 이러다 개종크리 당하는 거 아님?;;;걱정마세요코어200%헝가리가있잖아요'라는 위기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기독교결전병기오스만을 막아야 한다는 위기 의식에 사로잡힌 유럽 각국,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북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서는 기술적 진보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의 성립에 적잖이 영향을 끼친 게 사실이다.
이들 사건을 시간순으로 나열해보자면 1444년(바르나 십자군)-1453년(백년전쟁 종결)-1453년(콘스탄티노플 함락)-1492년(레콘퀴스타 종결)으로 불과 이 네 개의 역사적 사건들이 모두 반 세기도 안되는 연대에 합류해 있다. 촉진제를 써도 보통 한 두 종류를 쓰는 게 고작이나 이놈의 유럽에 네 개를 끼얹어버렸으니 이래서야 뭔가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 이 정도쯤되면 절대자가 인과율 조정에 실패한 수준이라고까지 생각될 수준. 실로 이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결국엔 그래서 유로파 유니버셜리스4의 시작 연도가 1444년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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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다 쓴 걸 그대로 옮겨온 거라 존대가 없는 것은 양해를..ㅠㅠ 지적 환영입니다!
첫댓글 확실히 유럽에서 그시기가 격동을 주는 시대의 서막이기는 했죠.
물론 그 격동을 극복하고 강해지기까지 오스만 투르크에게 많이 맞았죠. 맞고 살았죠.
억울하면 강해진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다만 어디까지 맞은건 동유럽~이탈리아 한정이고 서유럽은 기껏해야 에스파냐 정도 빼면 오스만? 그게 뭥미...일텐디.
프랑스는 오스만이랑 친구 맺으려는 시도도 했고...
그리고 진짜 강해진 유럽은 서유럽이져(...)
테크명부터 너희는 이스턴! 우리는 웨스턴! 제 자리를 지켜! ㅇㅇ;
서유럽의 프랑스는 대신 에스파냐(정확히는 신롬)한테 영혼까지 탈탈 털렸고 영국은 이 시기만 해도 그냥 듣보잡 섬나라였고.
@스팀웨이브 그게 그 이전부터 십자군(교황청에서 주도한 거대한 십자군 만이 아니라 작은 십자군들까지 여러가지 십자군이 있었습니다.)이다 뭐다해서 영혼까지 털렸습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까지 포함해서 영혼까지 털렸습니다. 그게 바로 니코폴리스 전투죠.
http://ko.wikipedia.org/wiki/%EB%8B%88%EC%BD%94%ED%8F%B4%EB%A6%AC%EC%8A%A4_%EC%A0%84%ED%88%AC
백년전쟁 하다가 쉬는 시간에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참여하고 신성로마제국도 참여하며 12만~13만이 참여한 엄청난 수준입니다. 오스만은 최대 6만 최소 2만이라고 위키백과에 나오는군요.
그리고 영혼까지 털립니다. 괜히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데 유럽국가들이 무심한게 아닙니다.
@스팀웨이브 가도 못이긴다고는 확신이 있었어서 안간겁니다.
진짜 최후의 비잔티움 황제게 눈물없이 볼 수 없을정도로 교황청에 빌고 유럽국가들에게 빌었는데, 프랑스, 영국, 신롬 전부 무시한 이유가 이미 니코폴리스전투, 바르나 십자군에서 영혼까지 개털려서입니다.
그래서 오스만 그게 뭥미가 아니라 이미 영혼까지 개털렸어서 안싸우려고 한겁니다. 프랑스도 처음에는 적대적이었다가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까지 먹고 서유럽 최강이되자 그거 견제한다고 오스만과 동맹맺은 거고 그것 때문에 욕 많이 먹었죠.
조선은 오히려 세종대왕으로 안정기에 접어들었죠...흠...
군주 데이터나 땅 판도들은 1400년부터 다 더미데이터로 짜여있는거 생각해보면, 그냥 나중에 크킹 올드갓처럼 시작시점 앞당기는 DLC 팔려고 15세기 중반으로 잡아놓았다는게 합리적입...
역시 돈느님
아니 이런 비밀이..! ㅋㅋㅋㅋㅋㅋ
이말에 완전동감 크킹할때 카롤링거가문왜일캐 쓰잘데기없이 세세하게만들었을까생각했는데... 시대를 200년이나 땡겨버릴줄이야...
사실 비잔틴 망할때 시작하게 하고 싶은데 비잔틴빠들이 욕할까봐 차마 못하고 1444년에 한 기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