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1장 한을 품고 죽다 ② |
친구들과 이웃의 항의 데모
한일민 주임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통틀어 부산 경찰의 가장 유능한 형사로 꼽혀왔다. 집념과 끈기, 냉혹한 승부의식과 깨끗한 처신은 그를 수사 경찰관들의 귀감으로 만들었다. 그가 전경렬 씨를 용의자로 떠올린 것은 근하 군의 집 주변 탐문수사에서였다. 그는 범인이 根夏(근하) 군이나 근하 군 집과 연고를 가진 사람이란 전제 아래에서 戶口(호구)조사를 통하여 후보자를 찾고 있었다. 범행 현장과의 거리, 근하와의 親面(친면), 가정환경, 목격자들이 말한 범인의 인상착의 등등 열 몇 가지의 조사 항목을 만들어 수사 대상자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 전 씨였다.
한편 한 주임의 동료인 천현준 주임은 근하 친구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근하 주변에 나타난 적이 있는 수상한 어른들을 조사해갔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수사 대상자로 나타난 것이 또 전 씨였다. 두 주임이 우연하게도 같은 인물을 찍고 있다는 것을 서로 알게 된 것은 11월1일. 두 주임은 부하 형사들을 合班(합반)하여 전 씨를 공동 신문하기로 약속했다. 성공만 하면 1계급 특진은 따 놓은 堂上(당상)이었다.
전경렬 씨는 11월1일 오후 2시쯤 동대신동파출소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형사들은 전 씨가 화랑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근하 군과 같이 논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전 씨는 근하의 얼굴도 모른다고 답했다. 전 씨는 네 시간 뒤 풀려나왔다. 그가 두 번째로 연행된 것은 2일 오전 2시였다.
<서부산경찰서에 들어가자마자 서너 명의 경찰관이 다짜고짜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근하 군을 죽이지 않았느냐?’, ‘박스를 들고 서 있지 않았느냐?’고 고함을 치면서. 오전 9시까지 자백 강요를 받았으나 나는 버티었다. 9시30분쯤 나는 보수동 모 여관의 골방으로 끌려갔다.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고 주먹과 발이 날아왔다. 그래도 억지 자백을 하지 않았다. 이날 오후 7시쯤 나는 대연파출소 2층으로 옮겨졌다. 발가벗겨진 뒤 저녁 12시까지 물을 먹었다. 경찰이 쓰라는 대로 자백서를 썼다.
‘근하 군을 죽였다. 미안하다. 아버지는 손을 다쳐 있고 어머니는 발에 무좀이다. 근하와는 농구를 같이 하며 논 적이 있다. 17일 오후 6시께 화랑초등학교 근처 문방구점 앞에서 범행을 구상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쳤다. 오후 9시30분에 다시 현장에 나타나 근하를 기다렸다, 범행은 혼자서 했다.’ 이 자백서는 ‘비행기를 태운다’는 따위의 협박을 받아가며 쓴 것이다.>(〈조선일보〉 1967년 11월7일 사회면)
〈국제신보〉의 호외가 뿌려진 것은 이 자백 뒤 일곱 시간이 흐른 3일 오전이었다. 이 호외에 가장 크게 당황한 것은 다른 언론기관의 기자들이었다.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그들은 號外기사를 바탕으로 갈팡질팡하며 혼란 속의 취재를 벌이기 시작했다.
수사본부는 아직도 ‘범인’이란 말은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 씨가 자백을 했으며 증거품과 傍證(방증)을 수집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범행 자백’을 ‘범인 검거’로 받아들였다. 경찰이 워낙 큰 사건이므로 신중을 기하기 위해 공식 발표를 미루고 있다고 그들은 판단했다.
이날 정오에 나온 부산의 兩大(양대) 신문은 모두 ‘진범 검거’ 기사를 1면과 사회면에 크게 실었다. 사회면의 약 4분의 3이 검거 기사였다. 〈국제신보〉 기자들에게 있어서 이날은 ‘승리의 날’이었다. 맞수인 〈부산일보〉가 3일자 석간에서 그들의 특종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들을 도취케 하였다.
‘18일 만에 풀린 원혼’이라고 〈부산일보〉의 사회면 머리기사는 소리치고 있었다. ‘써놓은 유서 발견이 단서’, ‘잡히면 자살한다고 미리 유서 써두어’, ‘과외수업 옮긴 데 앙심’, ‘수사관들에게 감사―근하 군 가족’, ‘손뼉 치며 환호성―화랑교 어린이들’.
두 신문은 온통 잔치 기분을 내고 있었다. 〈부산일보〉는 “범인은 대학시험에 떨어진 태권도를 닦은 놈팡이”라고 보도했다. 〈국제신보〉는 공범 손 모 씨도 함께 붙들었다고 했다. 범인 검거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근하 군의 부모 사진이 〈부산일보〉에 실렸다. 〈부산일보〉는 “범인은 너무나 태연하여 형사들이 어리둥절했었다”고 전하고 수훈을 세운 한 주임의 약력도 실었다.
이 잔치 기분을 깨고 나온 것은 다음날 〈조선일보〉(11월4일자)였다. 〈조선일보〉는 부산의 두 신문과는 달리 범인이란 말 대신 용의자로 표기하고 전 씨에게 가명을 씌웠고 그의 사진도 싣지 않았다. 이 신문은 “전경렬이 자백을 번복했다”고 쓴 뒤 핵심을 찔렀다. “근하 군이 살해된 시간에 전 씨는 자기 집 다락방에서 네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고 국민학생*들이 증언했다.”(注-현재는 초등학생)
이들 어린이는 오후 7시부터 오후 10시가 넘도록 과외수업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전 씨의 알리바이가 드러나면서 분위기는 급전했다. 이날 석간에서 〈국제신보〉와 〈부산일보〉는 서둘러 방향 전환을 했다.
‘심증으로만 굳힌 범인’, ‘볼 박스 등 物證(물증) 수집에 총력’… 경찰과 법원을 앞질러 바로 하루 전에 ‘진범 확정 판결’을 내렸던 두 신문은 “경찰이 증거품을 확보했다”고 스스로 보도한 사실은 까맣게 잊어먹고 “아직 노끈, 果刀(과도), 박스 등의 출처를 캐내지 못했으며 경찰이 압수한 바지, 잠바도 범행에 사용했다는 확증이 없다”고 썼다. 더구나 전날 두 신문이 보도한 ‘공범 체포’나 ‘자살 예고 유서’는 밑도 끝도 없는 허위였음이 밝혀졌다. 전 씨가 근하의 가정교사였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두 신문의 전날 보도내용 가운데 사실은 전 씨의 이름과 주소, 그리고 ‘자백했다’는 내용 정도였다. ‘자백했다’는 부분도 ‘강압 아래서’란 상황 설명을 생략했었기 때문에 결코 진실을 전한 것은 아니었다.
방송과 신문들의 誤報(오보)에 들고 일어난 것은 전 씨의 모교인 경남상고 학생들이었다. “엉터리 수사와 신문 오보로부터 청소년의 인권을 보호하자”고 결의하고, 거리로 뛰쳐 나와 데모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들은 4일 오전 국제신보,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을 차례로 돌며 “특호 활자로 오보를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전 씨의 이웃 사람들 약 서른 명도 수사본부에 몰려가 집단항의를 했다. 그들은 “구속영장도 없이 무고한 사람을 사흘간이나 가두어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대들었다. 전 씨의 가르침을 받던 어린이 네 명도 수사본부를 찾아와 “억울한 우리 형님을 내놓아주셔요”라고 울먹였다.
전 씨가 경찰에서 풀려나온 것은 연행 92시간만인 5일 오후 10시였다. 부산지검 김용제 검사장이 이날 오전 “물증을 못 찾으면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경찰도 근하 군이 살해된 시간에 전 씨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알리바이를 깰 수 없었던 것이다. 한일민 주임은 뒤에 말했다.
“신문의 앞지른 보도가 수사를 망쳤다. 우리는 전 씨를 진범으로 단정한 적이 없었고 다만 수사 대상으로 선정했을 뿐이었다. 수사가 익기도 전에 신문이 오보를 함으로써 모든 상황이 흐트러졌고 경찰은 제대로 수사도 못 하고 중간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씨는 풀려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고 나흘간 굶으며 당한 고문을 낱낱이 〈조선일보〉기자에게 털어놓았다.
‘살아 있는 고문 수사, 나는 이렇게 짓밟혔다’―〈조선일보〉는 11월7일 이런 사회면 머리기사로 경찰을 공격했다. 그 뒤 형식적인 ‘고문 경찰관 조사’가 있긴 했으나 처벌받은 형사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미쳐버리지 않을까 겁이 났다”
내가 1981년 6월, 열네 해 만의 첫 기자로서 전 씨 집을 찾았을 때 사진을 통해 낯이 익은 전 씨는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남동생과 노부모 및 아내와 딸 등 다섯 식구를 부양하는 의젓한 30대의 家長(가장)으로 변한 그의 모습에서 기자는 지난날의 고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흔 평의 垈地(대지) 위에 두 해 전 새로 지었다는 스물두 평짜리 아담한 양옥은 부산 동래 금정산 기슭의 숲을 배경으로 하여 깔끔하게 그들 가족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언젠가는 한번 밝혀야 할 얘기지만….”
전 씨는 부엌일에 바쁜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아직도 그의 마음과 몸속에 살아 있는 ‘악몽’을 되씹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내보내 주기 전에 고별 대접을 해주더군요. 해운대 여관에서 나흘 만에 처음으로 밥도 먹이고 목욕도 시키고…. 그런데 목욕탕에서 몸을 씻는데 말입니다, 천정에서 물방울이 뚝뚝 내 몸에 떨어지는데 그것이 깜짝깜짝 놀랄 만큼 아픈 거예요. 내가 이거 신경이 좀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전 씨는 풀려나온 뒤 동부경찰서 바로 옆에 있는 봉생신경외과에 입원했다. 이틀 뒤 그는 다시 부산대학병원 신경외과로 옮겼다. 2주 뒤 그는 퇴원했다. 전 씨는 그때 진단서를 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떼어주겠다는 의사가 없더란 것이다. 진단서가 없으니 고문을 받았다는 증거도 세울 수 없었다.
퇴원 뒤 通院(통원) 치료를 받다가 곧 돈이 떨어졌다. 그때 전 씨의 집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1급 상이용사였다. 전 씨의 첫돌 날에 징집된 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부대에서 이탈, 고립됐다. 그는 어깨에 총상을 입은 채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1950년 겨울부터 1953년 4월까지 신의주 포로수용소에서 고생하다가 포로 교환으로 살아 돌아왔다. 凍傷(동상)으로 오른쪽 세 손가락을 잃고서. 이 불구 아버지의 연금 6000원과 어머니의 구멍가게 수입금 월 7000원으로 전 씨네 여섯 식구가 생계를 잇고 있었다. 전 씨가 再修(재수)하면서 가정교사를 하여 월 7000원쯤을 보탰는데 이것을 그 소동 뒤 집어치웠다.
퇴원 뒤 치료비가 모자라 전 씨는 집에 누워 있기만 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몽롱한 정신 상태가 계속됐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전 씨를 손수레에 싣고 거적으로 덮은 뒤 시경 마당으로 밀고 들어가 “내 아들 살려내라”고 대들기도 했다. 그제야 형사들이 찾아와 합의를 하자고 했다. 합의금으로 5만 원을 제시했다.
결국 전 씨는 25만 원에 경찰과 합의, 민·형사 간에 앞으로는 더 문제 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로도 전 씨의 정신 상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우선 속골이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마취를 하지 않고 생다리를 절단하는 그런 아픔보다 더한 것 같았어요. 그 고통이 몇 시간이나 계속되곤 했어요.”
길을 걸으면 땅이 45도쯤 비스듬히 기울어져 보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 전봇대를 붙들고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기도 했다.
이웃의 동정은 극진했다. 그러나 전 씨를 꺼림칙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경찰에서 전 씨를 내놓았을 때 몇몇 신문들은 “경찰은 傍證(방증) 수집을 계속하겠다고 말했으며 증거가 드러나면 언제든지 구속할 수 있다”고 꼬리를 달았다. 마치 증거가 없어 못 잡아넣는 것처럼 보도했다. 이 때문에 전 씨를 속으로는 의심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는 것이다.
전 씨 부모는 아들의 환경을 바꿔주려고 그를 양산 통도사의 취운암에 보내 靜養(정양)을 시켰다.
“이 암자에 한 친구가 위문 차 놀러 왔더군요. 그 친구는 사흘 동안 같이 자면서 나의 손목시계 얘기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겠어요. 뒤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경찰의 부탁을 받아 뭘 캐내려고 날 찾아왔을 것이란 거예요.”
이 암자의 방세가 너무 비싸 1968년 봄 전 씨는 양산군 기장면 백두사로 옮겼다. 혼자 산속에서 조용하게 있어도 그의 病勢(병세)는 좋아지지 않았다.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고 신경통 환자처럼 뼈마디가 쑤시면 자살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내가 잘된 뒤 보자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순전히 오기로 버틴 것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이러다간 미쳐버리는 게 아닌가 겁이 솟아나기도 했어요.”
“근하 군 살해범 일당 네 명이 일망타진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 씨가 들은 것은 바로 이 암자에서였다.
검찰의 일망타진 발표
1968년 5월29일 전국 신문들은 또다시 기뻐 날뛰었다. ‘근하 군 살해범 일망타진’이란 제목이 1면 머리(<국제신보>와 <부산일보>)와 사회면 머리를 장식했다. 주범 최형욱(가명․ 당시 40세), 하수인 정대범(당시 21세), 살해 교사범 김기철(당시 29세), 김금식(당시 33세) 씨의 사진이 큼직하게 실린 것은 물론이었다. 사건을 해결한 부산지검 김태현 부장검사의 흡족해하는 표정 사진과 ‘어린이 유괴 살해사건 수사의 명검사’란 프로필 기사가 또한 빠질 수 없었다. 그것은 근하 군 살해사건의 ‘제2代 진범’ 대관식에 걸맞은 신문의 대접이었다. 이 대관식에 ‘초대 眞犯(진범)’이 빠질 수는 없었다. 기자들은 전경렬 씨의 부모를 찾아가 소감을 받아갔다. 전 씨의 아버지는 ‘멀쩡한 자식을 병신 만들어놓은’ 경찰을 원망하면서 이제 공식적으로 누명을 벗었으니 개운하다고 말했으나 어머니는 ‘아들 물어내라’고 통곡을 터뜨렸다.
전국의 신문들이 신들린 것처럼 이 검거 기사를 크게 취급한 것은 결코 호들갑이 아니었다. 검찰의 발표 내용은 강력사건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극적 요소를 망라하고 있었다. 主犯(주범)이란 최형욱 씨는 근하의 친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이 조카의 살해를 원격 조종하고 협박장이 오면 매부의 돈 백만 원을 직접 들고 나가 하수인들에게 건네주기로 계획했었다는 발표 내용은 독자들을 분노케 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외삼촌은 비정했다’는 사회면 머리기사, ‘나는 오빠를 저주한다’는 근하 어머니의 手記(수기. 기자가 재구성한 듯)는 이런 분노에 부채질을 했으나 과하다는 느낌은 별로 주지 않았다.
이들은 점조직과 가명을 써가며 범행을 저질렀고 潮水(조수)의 流動(유동)을 계산, 시체를 대마도 쪽으로 실어 보내 버리려 했다는 대목도 이 사건을 흥미롭게 윤색했다. 이들이 ‘국가가 보장하는 알리바이’를 얻기 위해 대구교도소 교도관들을 매수, 복역 중이던 김금식을 범행 당일 하루만 빼내어 사용한 뒤 다음날 다시 감방으로 복귀시킴으로써 완전범죄를 노렸다는 줄거리는 어떤 추리소설의 경지도 앞서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검찰 엘리트가 역시 경찰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서 이 어려운 사건을 풀어간 김태현 검사의 쾌거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6월20일 검찰은 네 명의 교도관을 포함한 일곱 명[정대범 씨는 현역병으로 軍裁(군재)에 돌림]을 가중 뇌물 약속, 허위 공문서 작성, 동 행사, 간수자 도주 원조, 강도 살인, 사체 유기, 도주, 직무유기 등 여덟 가지 罪名(죄명)으로 기소했다.
부산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여섯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범행을 부인했다. 검찰 수사에서 자백을 한 피고인들도 그것이 자신들을 공산당으로 모는 절박한 상황에서 한 임의성 없는 자백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김금식 씨만은 범행 사실을 적극 시인했다. 그마저 10월21일의 9회 공판 때부터는 심경 변화를 일으켰다. 지금까지의 자백은 경찰과 검찰의 수사능력을 시험, 우롱해보기 위한 창작이었다고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검찰이 발표한 범인이란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각본에 속은 검사가 配役(배역)에 맞춰 잡아들인 무고한 양민들이며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라고 폭로하고 자신에게 베푼 검사의 야릇한 대접까지 까발렸다.
그러나 1심 판사는 1968년 11월22일 전원의 有罪(유죄)를 인정, 최형욱, 김기철, 김금식 씨에게는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심 선고 공판은 그 이듬해 3월21일 대구고법에서 열렸는데 이번엔 전원에게 無罪(무죄)가 선고됐다. 6월25일에는 대법원이 전원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2대 진범들’도 가시관을 쓴 무고한 사람들로 밝혀진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