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이 남긴 1950년대 영화 평론을 중심으로, 그가 살았던 명동 일대의 풍경과 전후 한국의 문화생활상을 추적한다. 짧은 생애 속에서 박인환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며, 시와 영화 너머의 시대를 들여다보는 일종의 탐사 역사 에세이다. <편집자주>
영화 잡지 '영화세계' 소식통(消息通) 잡글 코너 속 박인환의 부고
박인환의 부고는 1950년대 영화 잡지 『영화세계』에 단신으로 실렸다. 소식통(消息通)이라는 잡글 코너에서이다. 다소 변변찮은 대우를 받는 듯 싶은 느낌이지만 글귀는 그래도 예의를 갖추고 있다. 이렇게 써 있다.
“영화평론가이며 시인인 박인환은 지난 3월20일 심장마비로 고인이 되었다니 다시금 생의 무상함을 통감치 않을 수 없나이다. 신이시여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
부고기사 치고는 다소 정돈되지 않은 글귀들이고 당시 표현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비문도 섞여 있다. 예컨대 ‘박인환은’의 ‘은’은 ‘이’가 돼야 하는 게 맞다. ‘주옵소서 아-멘’도 기사체로 보기 어렵다. 이런 부고 기사와는 별개로 많은 문단의 동료들이 추모 기사를 썼을 것이다. 당시 『영화세계』의 편집장은 노만 선생이다. 박인환과 동갑에 가까운 1935년 생이고 아직 생존해 있다. 박인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나 안타깝게도 거동이 불편하고 부인이 위독해 이번 연재 때는 만나 보지 못했다. 더 이상 수상한 시간이 넘어 가기 전에 그의 얘기를 들어야 할 때이다. 마음이 급해진다.
박인환이 글을 게재했던 영화잡지와 문예지
『영화세계』 1956년 4월호는 3월말에 나온 것이다. 월간 호수는 한달 앞서서 카운팅된다. 이 4월호에 박인환이 사회를 본 대담 <한국영화의 신구상>이 실렸다. 이 좌담 직후 박인환은 사망했다. 이 글은 일종의 그의 유작인 셈이다. <한국영화의 신구상 – 영화 전반에 걸친 대담>은 박인환 영화평론 전집(맹문재 엮음, 푸른사상刊) 300쪽에서 320쪽까지 고스란히 실려 있다.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영화에 대한 시선, 식견의 한계가 녹록치 않다. 아마도 그건 당시의 한국영화산업 자체의 한계처럼 보인다. 참석자는 작가 김영수와 만화가 김용환(동아일보 신문 만평 <코주부> 작가)이었으며 장소는 동화백화점 지하 식당이었다. 동화백화점은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이다. 동화는 1955년에 개점했다.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을 본 뜬 것이다. 미쓰코시는 도쿄 니혼바시에 있다. 한국의 동화백화점도 사실은 1906년 미쓰코시 서울지점이란 이름으로 열렸다가 1955년에 동화백화점으로 재개장한 것이다.
시미즈 히로시 다큐 <경성 1939>
당시 서울, 곧 경성의 모습은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경성 1939’에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1925년 문을 연 돈까스 집 ‘그릴’에서 양식을 먹는 젊은 남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다. 이 ‘서울역 그릴’은 우둔하게 서울역에 보존시키지 못한 채 폐점됐다. 잠실 롯데몰에 ‘1925 서울역 그릴’이란 레스토랑이 있지만 양측간 연관성은 없다.
시미즈 히로시는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거장 오즈 야스히로와 쌍벽을 이뤘던 1920년대 감독이다. 그가 만든 78분짜리 ‘아리가토 상’(1939)은 지금 다시 봐도 걸작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원작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친절하고, 밝고, 명랑한 버스 기사이다. 그는 버스에 한 가득 사람과, 그에 준하는 한 가득 사연들을 싣고 달린다. 1930년대 불황을 겪는 일본 서민들의 애환을 담았다. 그런 사람들과 달리 일본의 군부는 중일전쟁을 터뜨리고 진주만 습격을 모의중이었다. 폭탄의 세상 한 가운데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고 유연한 작품이다.
뇌피셜로 상상을 해 보면 영화평론가 박인환은 경성의 그릴 레스토랑에서 돈까스와 와인을 마시고 동화백화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환담과 잡담을 즐겼을 것이다. 시미즈 히로시의 ‘아리가토상’ 얘기를 하며 버스 안 룸 미러를 통해 버스 기사와 여성 승객 두명 간의 심리적 ‘밀당’을 표현한, 1930년대로서는 획기적인 편집 기법에 대해 입에서 침을 튀기며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일본에는 벌써 로드 무비라는 것이 나오고 있는데 조선(한국)은 아직 멀어도 너무 멀었다는 얘기를 나눴을 수도 있겠다. 시미즈 히로시의 영화, 현대 일본영화는 그렇게 박인환 등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신구상> 대담을 보면 몇 가지 특이점들이 발견된다. 일단 당시의 영화사들은 영화 제작에 있어 면세(免稅)의 대상이었고 그것이 일정한 모랄 해저드를 유발시킨 모양이다. 박인환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영화가 지난 번 세계에서도도 없는 무세(無稅)라는 것이 되었지 않습니까. 이 무세 바람에 영화업자들은 대체적으로 전혀 논의되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 가지고 도리어 무세를 악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가까운 예로는 <양산도>야 말로 참 볼 수가 없었어요. 나운규 이전의 활동실진(活動實眞 활동사진)입니다.”
동료 문인과 함께 한 박인환(오른쪽)
1960년대 이전에 국내 영화제작사는 20개로 제한돼 있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들은 안다. 이 20개 제작사의 영업 목표는 사실 외화, 특히 할리우드 영화를 들여 오는 수입 쿼터 권한을 얻는 것이다. 방화, 곧 국산영화를 4편 만들면 외화 한편 수입 권한을 주는 식이다. 이 시스템은 6,70년대에 들어서면 점차 진화하는데 만약 국산영화가 해외에서 상을 타거나 아니면 해외에 진출한 증명 자료가 있으면 외화 수입 쿼터를 따낼 수 있게 됐다.
일부 한국 영화사 제작자들은 일본의 한 여자대학 공연장에서 아무 손님도 없는 밤 시간에 (돈을 내고서라도) 영화를 틀고, 그것이 해외상영 사례라며 외화 수입 권리를 얻고는 했다. 그런 편법을 가장 잘 활용한, 영리한 영화사가가 합동영화사였으며 한국영화사상 굴지의 제작자로 불리던 故곽정환이다. 그의 부인은 유명한 여배우 고은아이다.
박인환 시대에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20세기 폭스 사장이 내한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거리다. 폭스는 아시아 시장의 교두보로 한국을 생각했던 것 같고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독대도 가졌던 모양이다. 이때 나왔던 얘기가 10만달러 매칭 설이었다. 폭스가 10만 달러를 내고 이승만 정부가 10만 달러를 내서 한미합작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전후인 만큼 6.25 전쟁 반공영화가 나옴직 했던 얘기이다. 그러나 박인환, 김영수, 김용환 등은 그 전에 한국영화의 수준이 올라가야 함을 역설한다. 작가 김영수는 이렇게 말한다.
“(배우의) 키를 크게 뵈(보여주)기 위해서는 카메라는 언제든지 통 앵글에 삼각대(풀 쇼트 평면각)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전부가 하이 앵글 말하자면 머리 위에서 카메라를 대기 대문에(부감 쇼트) 전부 난쟁이로 보여요. 더군다나 층대(층계)를 내려갈 때 카메라가 위에서 피트업하기 때문에(틸 다운) 여배우는 아주 난쟁이로 뵙니다. 그 여배우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소행입니다……카메라맨, 감독은 많이 앞으로 공부해야 할 줄 압니다.”
박인환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한국 영화계의 발전은 앞당겨졌을 것인가. 그건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그리고 전두환 독재까지 수십년의 정치적 암흑기는 아무리 박인환 류라 하더라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분루의 술잔만 더 늘었을 것이다. 다만 비평의 영역은 확장됐을 것이다. 그는 계속 쓰고 또 썼을 것이다. 박인환의 평론은 늘 영화계를 긴장시켰을 것이다.
박인환의 시 <투명한 버라이어티>는 그가 얼마나 영화적 심성을 지닌 ‘모단 보이’였는지를 보여 준다.
(전략)
나는 옛날을 생각하면서
텔레비전의 LATE NIGHT NEWS를 본다
카나다 CBS 방송국의
광란한 음악
입 맞추는 신사와 창부
조준은 젖가슴
아메리카 워싱톤 주
비에 젖은 소년과 담배
고절된 도서관
오늘 올드 미스는 월경이다
(중략)
스트립 쇼우
담배연기의 암흑
시력이 없는 네온사인,
그렇다 성(性)의 10년이 떠난 후
전장에서 청년은 또 다시 도망쳐 왔다
자신의 영예와
구라파의 달(月)을 바라보던 사람은…
혼란과 질서의 반복이
물결치는 거리에
고백의 시간은 간다
(하략)
오동진 영화평론가/ 뉴스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