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 ⑨
늪을 빠져나오지 못한 ‘노라’의 비극
- 샘 멘데스의<레볼루셔너리 로드>
도시 중산층 여성의 자아 찾기
1960년대 페미니즘 선구자였던 미국의 여성학자 베티 프리단(1921-2006)은 그의 혁명적 저서였던⟪여성의 신비⟫(1963)를 통해 가사와 육아에 메달리던 전통적 여성상을 질타하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벽속에 갇혀 있던 여성들로 하여금 사회로 뛰쳐나와 여성적 정체성을 찾을 것을 요구했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은 ‘내가 누구인지, 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말할 수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목표를 원한다면, 자신이 이기적이거나 신경과민이라고 느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여성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샘 멘데스가 연출한〈레볼루셔너리 로드〉(2008)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 해방이라는 거시적 담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1999년 35살의 젊은 나이로 연극 연출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샘 멘데스는 첫 작품⟨아메리칸 뷰티⟩로 제72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등 5개 주요 부문을 석권하여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이어 2002년에는⟨로드 투 퍼디션⟩, 2005년에는⟨자헤드⟩를 연출했으며, 2008년에는〈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연출하여 다시 한 번 영화적 감성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 영화는 1992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소설가인 리처드 예이츠가 1961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2005년에 미국의 시사주간지⟪타임⟫지가 1923년에서 2005년 현재까지 발표된 영어권 100대 소설에 조지 오웰의〈1984〉, 피츠제럴드의〈위대한 개츠비〉,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 톨킨의〈반지의 제왕〉등과 함께 당당하게 선정된 작품으로, 1961년 출간 당시 전미 도서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른 작품으로 그에게 ‘작가들의 작가’라는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이 소설은 ‘저주 받은 걸작’으로 탁월한 심리 묘사로 사후에 오히려 빛을 본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50년대 중반의 미국 코네티컷 교외의 중산층지역을 배경으로 프랭크 휠러(레오나드 디카프리오 분)와 그의 아내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분) 부부의, 평온하고 안정된 중산층의 생활처럼 보이지만 늪처럼 고여 있는 무기력하고 가식적인 일상을 다루고 있다. 그들의 이웃으로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는 헬렌(캐시 베이츠 분)과 하워드 부부와 그들의 아들 존, 셰프와 밀리 부부가 등장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헬렌과 하워드 부부의 아들 존은 그리 많이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프랭크 부부의 허위와 가식에 가득 찬 일상의 무기력함을 선명하게 반영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수학을 전공한 박사로 지식인이지만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에서 갓 퇴원한 인물이다. 그의 정신분열은 허위와 무기력으로 뒤범벅이 된 채 현재적 삶에서 일탈을 꿈꾸지 못하는 중산 계층의 공허한 정신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셰프와 밀리 부부 역시 프랭크 부부의 자기 반영적 인물이다. 남편 셰프는 현재적 삶에서의 일탈을 꿈꾸지만 그것을 표면화하지 못한 채 감추고 있으며, 그의 아내 밀리는 남편의 일탈을 두려워하면서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자 하는 중산층의 전형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인물이다.
일탈과 안주의 불협화음, 혁명 정신의 상실
프랭크 부부는 1950년대 중반의 미국 중산층 계급의 전형적 인물이다. 프랭크는 사무기 회사의 샐러리맨으로 미모의 아내와 두 자녀를 거느리며 이웃들로부터 선망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에이프릴은 한때는 연극배우로 활약한 경험이 있지만, 변화가 없는 나른하고 무기력한 일상적 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일탈을 꿈꾸고 있다. 어느 날 에이프릴은 프랭크가 2차 대전 참전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감추어 두고 있던 일탈의 욕구를 슬며시 꺼낸다. 그러면서 남편 프랭크에게 파리로 이사를 가서 새로운 삶을 꾸릴 것을 제의하게 된다. 아내의 집요한 설득에 프랭크 역시 동의하기에 이르고,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혁명적 발상을 주위에 공공연하게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의 그러한 꿈과 희망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회사의 사장이 프랭크에게 승진과 함께 새로운 보직을 제의하게 되고, 또한 그의 아내 에이프릴은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에이프릴은 아이를 낙태하겠다는 결심까지 하면서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지만 프랭크는 현실에 안주하기를 바라면서 그들 두 사람은 격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와중에 프랭크는 같은 회사의 여직원과의 불륜을 고백하지만, 에이프릴은 이웃집 남자인 셰프에게 자동차 안에서 몸을 허락한 사실을 감추게 된다. 헬렌과 하워드 부부의 아들인 존은 프랭크 부부의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프랭크 부부의 꿈과 이상을 잃은 무기력한 중산층의 허위적 삶을 통렬하게 야유하며 비난하게 되고, 프랭크는 평온한 삶을 뿌리째 뒤 흔드는 그의 돌출적 발언에 격노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리처드 예이츠의 원작 소설에서는 “모든 생각과 모든 감성을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통속화, 대중화해서 잘 넘어가는 이유식같이 만들어 버리는 것, 이 낙관적 태도, 매사를 웃음으로 때우고 쉽게 해결하려는 감상주의가 모든 사람의 인생관 아니야?”라고 헬렌 부부의 아들 존은 프랭크 부부를 비롯한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살고 있는 모든 중산층 가정의 허위와 가식의 삶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 영화의 결말은 혁명적 꿈과 이상을 포기한 에이프릴의 비극적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에이프릴은 꿈을 포기하고 현실의 삶에 안주하려는 평온한 삶을 택하려는 듯 남편 프랭크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며 웃음으로 그의 출근을 배웅한다. 그리고 나서 에이프릴은 낙태 기구를 이용하여 낙태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녀는 출혈 과다로 병원에 실려 가게 되지만 비극적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네를 타고 노는 두 자녀를 애틋하고 절망적인 눈길로 응시하는 프랭크의 쓸쓸한 모습을 보여주는 엔딩 시퀀스는 ‘지금 이곳’의 삶에 안주해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인가를 자문하게 한다.
꿈을 좀먹는 절망적 공허에 대한 풍자적 은유
이 영화에서 프랭크 부부를 비롯한 중산 계층이 살고 있는 교외 지역인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어느 특정 지역을 지칭하고 있기보다는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한 혁명적 일탈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낙관주의적 삶을 고집하는 새로운 중산층 계급에 대한 풍자적 은유로서의 공간이다. 그리고 에이프릴이삶의 터전을 옮겨 살고자 염원하는 프랑스 파리 역시 특정적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현실적 낙관주의와 감상주의를 떨쳐내고 꿈과 이상을 이루기 위한 모험을 시도하는 의지와 용기를 상징적으로 은유하는 공간일 것이다. 작가 리처드 예이츠는 작품을 통해 이러한 꿈과 희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를 잃은 당시 사람들의 혁명정신의 부재를 풍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비록 죽음으로 꿈과 희망을 접게 되었지만 늘 현실에의 일탈을 꿈꾸는 여주인공 에이프릴의 혁명적 시도에 찬사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에이프릴의 남편 프랭크는 베티 프리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성의 꿈을 옥죄는 기부장적 이데올로기의 경직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집을 나와 주위를 응시하는 에이프릴의 장면이 있다. 그녀가 바라보는 주위의 풍경은 마치 늪 속의 고인 물처럼 평온한 나른함에 젖어 있다. 그러한 풍요 속의 무기력한 공허함을 응시하는 에이프릴의 절망적 표정은 섬뜩하리만치 비정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꿈과 희망으로서의 미래적 비전을 포기한 채 현재적 삶에 안주하려는 우리들의 소시민적 안락함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성찰하게 하고 있다.
영화〈타이타닉〉의 비극적 연인 이후 11 년 만에 다시 만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은 이 영화에서는 부부로 다시 만나 중산층 가정의 균열적 삶을 비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프랭크를 연기하는 디카프리오의 연기보다는 혁명적 일탈을 꿈꾸는 중년 여인의 정신적 공허함을 냉정하게 표출하는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완숙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케이트 윈슬렛은 이 작품을 연출한 샘 멘데스의 아내로 2009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의 탁월한 연기로 5전 6기 끝에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게 되는 영광을 안았다.
첫댓글 지금 서면 CGV, 서면 메가박스, 해운대 메가박스 등에서 상영하고 있는데 아마 곧 끝나겠지요.
저 이거 보려고 갔는데 우리 양산영화관에서는 안하더라구요. 그래서 주식전쟁 <작전>을 대신보고 왔었어요 정말 보고 싶었는데 예고편 2번 보고 딱 찍었는데...보려면 서면, 해운대 멀리로 가야겠는데 시간이.....양산이 촌은 촌인가보다
비디오 나오면 조용히 집에서 보세요.
부부 싸움이 아주 실감나더군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공감이 가는 영화였습니다. 평도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