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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과 긍정의 리더십으로 무장한 '희망 전도사'
"첼시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여전히 가능하다." (Chelsea can still win the Premier League)
첼시의 지휘봉을 잡은 거스 히딩크 감독의 취임 일성이다. 긍정과 낙관으로 스스로를 독려하는 이 남자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 같다. 덕분에 위기에 강한 남자라는 평을 듣는 히딩크지만 첼시 감독직 수락은 여러 면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위기의 커리어를 극적으로 되살린 그에게 첼시는 어쩌면 위험한 도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믿는 이 용감한 네덜란드 인에게 도전은 그 자체로 이미 또 하나의 흥미진진한 성취인지 모른다.
히딩크 감독의 긍정적인 호언장담과 달리 현재 첼시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인 것이 아니다. 올 시즌 25라운드를 마친 현재 첼시는 49점의 승점을 얻어 프리미어리그 4위에 올라 있다. 1위 맨유, 2위 리버풀에게 각각 10점과 5점의 승점 차로 뒤쳐져 있는 상태다. 06/07 시즌과 07/08 시즌, 25라운드까지 공히 승점 54점을 따내며 각각 2위와 3위를 달리던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마지막으로 리그를 제패했던 05/06 시즌 25라운드의 승점인 66점까지 떠올리면 올 시즌의 급락은 더욱 두드러진다. 게다가 첼시는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그것도 부임한 지 고작 6개월 여 밖에 되지 않는 감독을 경질한 상태다. 프리시즌에 부임한 감독이 첫 시즌을 채 끝마치지도 못한 채 해고된 것은 첼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팀 안팎에서 느끼는 사태의 심각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몇 년간 첼시가 기대어왔던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자금력도 예전만 못한 상황으로 변했다. 그의 주머니는 더 이상 화수분이 아니다. 전력 공백을 돈으로 해소할 수 없다면 제 아무리 첼시라 하더라도 단기적인 위기 극복 방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히딩크 감독의 등장은 이런 점에서 더욱 주목받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애스턴 빌라에게 3위 자리마저 내준 현재 상황에서 첼시가 시도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변화가 매우 희망적인 선택으로 이뤄진 덕분이다.
그렇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남자 거스 히딩크는 ‘희망’이라는 단어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다. 무모한 꿈을 놓지 않는 망상가가 아닌, 누구나 성공에 접근할 수 있다는 논리로 목표 달성을 독려하는 뛰어난 리더로서,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가치를 꾸준하게 입증시켜 왔다. 지난 20 여년 간 그가 보여준 행적은 모두가 ‘No’라고 말하던 팀을 ‘Yes’의 증거로 변모시킨 히딩크 리더십의 은근한 위력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낙관의 힘과 긍정의 위력이 저변에 깔린 히딩크 감독의 화려한 커리어를 통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그의 20년을 돌아본다.
1. PSV에인트호벤 1988 '축구 역사상 최고의 신인 감독'
화려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성공적이었던 15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친 뒤 친정팀 그라프샤프와 코치 계약을 맺으며 지도자 생활에 입문한 히딩크는 1987년 PSV에인트호벤 사령탑을 맡아 감독 데뷔전을 치른다. 이전 4년 동안 PSV에서 수석코치로 일하며 팀이 8년만에 네덜란드 리그 정상에 오르는 데 역량을 발휘한 그는 그 공을 인정받아 감독 계약을 맺은 터였다.
부임 직후 탁월한 리더십과 승부욕으로 팀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감독 데뷔 첫 시즌에 유럽을 제패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다. 87/88시즌 UEFA 챔피언스컵에 출전한 PSV는 히딩크의 지휘와 로날드 쿠만(전 발렌시아 감독), 에릭 게레츠(현 마르세유 감독) 등의 활약 속에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결승전에서는 벤피카를 꺾고 팀 사상 처음으로 이 대회 우승컵을 차지한다. 8강 두 경기(원정 골 우선 승), 4강 두 경기(원정 골 우선 승), 결승전(0-0 뒤 승부차기 승)에 이르는 5경기를 모두 무승부로 마친 것은 논란거리였지만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열세에 놓여있던 PSV를 유럽 챔피언으로 만든 것이 ‘초보감독’ 히딩크의 힘이었다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화려했던 데뷔 시즌의 끝에서 히딩크 감독은 세 개의 트로피를 손에 쥐고 있었다. 신인 감독이 UEFA 챔피언스컵, 네덜란드 리그, 네덜란드 컵 우승, ‘트레블(3관왕)’을 달성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PSV에서 보낸 첫 번째 재임 기간 3년 동안 리그 우승 2회, 리그컵 3연패, 유럽 챔피언 1회라는 업적을 남겼다.
(한편, 이 과정에서 그라프샤프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 은사였던 드 비셔 감독의 기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수비수로 뛰던 히딩크와 함께 그라프샤프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끌기도 했던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PSV의 스카우트로 일했는데 1988년에는 히딩크에게 호마리우를 추천, 대어를 낚게 했다. 이후에도 PSV에 호나우도, 알렉스, 파르판, 고메스 등의 영입을 제의한 그는 2005년부터 첼시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이적 관련 컨설턴트로 일하는 중이다. 아브라모비치에게 히딩크를 소개한 인물이기도 한 그는 히딩크의 첼시 감독행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발렌시아 1994 공격 축구
히딩크 감독은 발렌시아에 머문 3년 동안 단 하나의 우승컵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PSV 시절과 다른 공격 축구로 팬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특히 마지막 시즌인 93/94 시즌은 안팎에서 호평을 받은 때다. 1년 전 영입한 멘디에타가 데뷔한 이 시즌에 발렌시아는 시즌 초부터 줄곧 리그 선두를 유지했고 UEFA컵에서 프랑스 최강팀 낭트를 꺾는다. 하지만, 1993년 11월 UEFA컵 2라운드에서 독일 칼스루에를 상대로 홈에서 3-1로 이기고도 원정에서 무려 0-7로 패해 비난을 받는다. 히딩크 공격 축구의 위상은 흔들렸고 결국 그는 자국 리그에서 선두를 내준 뒤 경질되고 만다.
이후 4개월 여만에 다시 발렌시아 감독에 복직되어 팀 정상화에 힘쓰지만 시즌 종료와 함께 팀을 떠난다. 발렌시아는 당시 막 끝난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 우승을 이끈 파헤이라 감독을 그 자리에 앉힌다. 히딩크 감독은 당시 스페인 리그에 공격 축구로 강한 인상을 남긴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3. 네덜란드 대표팀 1998 월드컵 4강의 시작
1995년의 시작과 함께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 업무를 맡은 이 시절은 한국을 월드컵 본선에서 5-0으로 격파할 당시의 콧수염으로도 국내 팬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히딩크 감독은 부임과 함께 스타 선수들의 기를 잡는 데 공을 들였다.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은 네덜란드 클럽들의 성공과 우수한 유망주들의 끊임없는 등장으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모두가 자신이 주전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불평과 질투가 넘쳐났다.
유로96을 앞두고, 팀 내 부주장을 맡고 있던 에드가 다비즈를 대표팀에서 축출한 것은 히딩크 리더십의 오랜 성공사례로 회자된다. 성격 강한 미드필더였던 다비즈가 훈련장에서 불평을 터뜨리자 과감히 그를 돌려보낸 것인데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팀 내 결속력을 강화하고 감독의 리더십을 확장하는 계기여서 이후 그가 팀을 효과적으로 주무르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사건이다. (다비즈는 나중에 다시 히딩크 사단으로 복귀해 주축 멤버로 활약한다.)
이후, 자신이 원하는대로 팀을 직조한 히딩크는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근래들어 가장 흥미진진한 축구를 보여주는 팀’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4강 진출에 성공한다. 판 데 사르 골키퍼, 야프 스탐, 데 부르 형제, 오베르마스, 코퀴와 베르캄프 등을 앞세운 네덜란드는 한국을 5-0으로 누르고 진출한 16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2-1로 잡은 데 이어 8강에서 아르헨티나 역시 2-1로 꺾는 데 성공하지만 아쉽게 4강에서 만난 브라질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한다. 8강전에서 데니스 베르캄프가 경기 종료 직전 유명한 발끝 트래핑으로 만들어낸 극적인 결승골 장면은 지금도 많은 축구팬들에게서 인상적인 월드컵 순간으로 기억된다.
4. 대한민국 2002 그리고, 대~한민국
월드컵이 끝난 직후 레알 마드리드 감독에 부임한 히딩크는 경력 최고의 절정기를 의심하지 않은 채 베르나베우 경기장에 입성한다. 하지만, 레알과의 인연은 길지 않았고, 운영진과의 연이은 충돌, 국내 리그 성적의 부진 등이 겹치면서 7개월만에 지휘봉을 놓는다. 1년 뒤 레알 베티스 감독직을 맡지만 이번에도 성과는 지지부진했고 결국 시즌 종료와 함께 계약을 끝내고 스페인 축구계를 떠난다. 그 뒤로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대한민국과 인연을 맺는다.
역대 한국 대표팀 감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도자 경력의 소유자였던 히딩크는 전 국민의 관심을 등에 업고 한국 땅을 밟는다. 핌 베어벡 코치, 이용수 기술위원장과 함께 대표팀을 이끈 그는 모두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1년 반 동안의 임기를 시작한다.
‘16강’이 목표였던 한국인들은 ‘성공’을 호언장담하던 히딩크가 말과 달리 2연속 0-5 패배를 당하자(체코, 프랑스전) 그에게 ‘오대영 감독’이라는 별명까지 붙이며 조롱하지만 정작 히딩크는 이전 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선수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홍명보를 배제하고 기존에 대표급으로 거론되지 않던 선수들을 적극 중용해 팀 내 분위기를 일신한다. 그리고, 단순한 분위기 쇄신을 넘어 홍명보의 자기 극복, 송종국, 김남일, 박지성, 최진철 등 상대적으로 대표팀 발탁 기회가 적던 선수들의 자신감 회복을 유도하며 팀을 만들어 나간다.
특히, 자신이 재능을 인지한 선수들에 대해서는 웬만한 실수도 눈감아주며 지속적인 기회를 부여했는데 이 밖에도 각 선수들에게 각자 개성에 맞는 맟춤 지도로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마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설기현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했다는 ‘거울’ 일화와 안정환을 조금씩 자극해 결국 최대치를 끌어낸 대목은 긍정의 힘으로 선수들의 가능성을 현실로 꽃피운 그의 역량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다.
위기 관리에도 능해서 2002년 월드컵 개막 직전 한 미디어에 ‘최용수 태업’설이 보도되자 다음날 아침 선수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니 해당 기자에게 어필하겠다”고 선언한 후 해당 기자에게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방식으로 선수들의 신뢰를 회복한 장면은 가장 극적인 순간의 기억이다. 당시 대표팀에 소집되어 있던 한 선수는 “당시 팀 내에서도 말이 많았는데, 감독님의 그 행동 하나로 모두가 큰 위안을 받았다. 우리를 지켜주는 사람,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준 것”이라고 회고했다. (히딩크 감독은, 그 뒤 비공개 석상에서 해당 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표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이러한 팀내 결속력과 감독에 대한 신뢰는, 히딩크 자신의 선수 개개인에 대한 확실한 분석과 만나 월드컵 본선에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모두가 고작 16강을 꿈꿀 때 그 너머를 노리던 이 남자는 16강전을 앞둔 상황에서 ‘8강 상대가 될 지 모를’ 스페인 전을 보러 떠나는 무모한 혹은 낙관적 행위를 통해 기존 한국 감독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감의 크기를 내보였고 결국 이를 현실화하는데 성공해 추락하던 자신의 커리어를 완벽하게 되살린다.
5. PSV에인트호벤 2005 다시, 유럽으로
월드컵에서의 성공은 유럽 커리어의 부활로 이어졌다. 지도자 경력의 고향이라할 PSV에인트호벤으로 복귀한 히딩크는 스페인에서의 실패와 대한민국에서의 성공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PSV를 다시 유럽 명문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PSV 2기’ 동안 네 시즌을 보내면서 세 번의 리그 우승을 일궈낸 히딩크는 2005년 이영표, 박지성과 함께 PSV를 유럽 4강(04/05)에 올려놓는 혁혁한 전과를 거둔다. 내로라하는 슈퍼스타 한 명 없이 이룬 성과였고 특히 4강 AC밀란 전에서 동점을 이루고도 원정 골 우선 원칙에 따라 결승행이 좌절될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기록이었다. 그는 박지성(맨유), 판 봄멀(바르셀로나), 이영표(토트넘), 포겔(AC밀란), 보우마(애스턴 빌라) 등 주전 11명 가운데 5명이 무더기로 팀을 떠난 와중에도 팀을 추스려 2005/2006 시즌 우승까지 일궈내 모두를 놀라게 했다.
PSV에서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식견에 대한 믿음과 선수들에 대한 신뢰를 역시 동시에 유지하며 성과를 내 더욱 각광받았다. 특히, 박지성의 경우 2003년 입단 이후 꽤 긴 시간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박지성의 가능성과 능력에 대한 자신의 식견을 저버리지 않고 (홈 팬들의 비난을 피하라는 의미에서) 홈 경기에는 출전시키지 않는 등의 극단적 조치를 통해 그의 커리어를 완벽하게 되살려냈다.
6. 호주 2006 불가능은 없다
하지만, ‘투 잡’에 도전한 2005/2006 시즌, 그는 리그 우승과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주전급 선수들이 대거 빠진 상황에서 유망주 위주로 팀을 꾸려 리그 우승을 잡은 것도 놀랍지만, 대다수 주전급 선수들이 유럽 진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팀을 조련해 월드컵 데뷔 팀을 16강(이탈리아를 거꾸러뜨릴 뻔한!)까지 끌어올린 역량 또한 높이 평가해야할 부분이다. 이 대회에서는 경기 종료 6분 전까지 일본에게 0-1로 끌려가다 막판 6분 동안 세 골을 몰아치며 극적인 역전승을 거둬 ‘역시 히딩크’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특히, 이 날 세 골은 모두 히딩크가 교체 투입한 선수들에게서 터져 나와 더 극찬을 받았다. (팀 케이힐 2골, 존 알로이시 1골)
7. 러시아 2008 또 한 번의 4강
“히딩크의 기본적인 모티베이션(동기부여)는 ‘돈’이다.” 세금 탈루 의혹을 받기도 했던 히딩크에게 러시아행은 부담스러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돈의 액수에 따라 진로를 결정한다고 비판하던 사람들은 저런 주장으로 히딩크의 진로에 핀잔을 주었다. 30억 연봉을 제안할 수 있게 한 석유 재벌의 펀딩이 없었다면 러시아 대표팀이 히딩크 감독을 끌어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히딩크가 성공에 대한 확신 없이 팀을 떠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히딩크는 유로2008을 통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네덜란드나 한국 대표팀을 비롯한 대부분의 팀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존에 ‘부동의 주전’으로 꼽히던 노장급 선수들에게 등을 돌리며 팀을 빠르게 장악한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를 유로2008 4강에 올려놓는다.
조국 네덜란드와의 8강전은 히딩크의 힘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승부였다. 경기를 앞두고 “네덜란드를 잘 안다.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자신감을 피력한 히딩크는 경기 내내 네덜란드를 교묘하게 제압하며 멋진 승부를 펼치더니 연장 접전 끝에 3-1 완승을 이끌어낸다. 85분을 압도하고도 정규 시간 종료 직전에 판 니스텔로이에게 동점을 내줘 연장에 들어갈 때조차 자신감에 넘치던 히딩크는 결국 연장에서 토르빈스키와 아르샤빈의 연속골이 터지자 환호작약했다. 특히, 이날 맹활약을 펼친 아르샤빈은 대회 전 A매치에서의 퇴장으로 조별 리그 3경기 중 2경기에 출전할 수 없는 상태였고 러시아의 조별 리그 통과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8강 진출을 확신하던 히딩크 감독의 확신에 따라 최종 엔트리에 포함된 선수여서 더욱 주목받았다. 이런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감독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쉽게 답할 수 있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 같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필자는 경기 직후 기자회견이 열린 컨퍼런스 룸에 히딩크가 다리를 절룩이며 입장하자 기자들이 기립박수로 환대하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객관적 열세에 놓인 팀이 세계 축구의 강호를 희롱하듯 압도하며 깨부수는 축구적 로맨스의 실황을 눈 앞에 펼쳐보인 히딩크 축구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8. 첼시 2009
그리고, 이번엔 첼시다. 은사 드 비셔 감독의 소개로 연을 맺은 첼시의 아브라모비치 구단주. 그의 거듭된 제안을 거절할 수 없던 히딩크는 일단 3개월 임시직으로 감독을 맡았다. 남은 3개월의 성과는, 성공하면 자신의 몫이지만, 실패해도 잃을 것이 없는, 편리한 열매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리한 선택은 서두에 적은 히딩크의 장담과 만나면서 엄청난 기대를 만들어낸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았던 히딩크는, 결코 승산 없는 싸움에 뛰어들지 않는 남자다. 자의식이 강한 캐릭터 탓에 운영진의 입김이 센 곳에서는 늘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래서 거듭된 사양을 통해 그 최후의 장애물마저 걷어낸 히딩크에게 첼시는 희망을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강팀을 맡았을 때의 성과는 기대만 못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지금의 첼시는 누가 봐도 ‘최강’이 아니다. 그리고, 히딩크는 위기에 놓인 팀을 맡아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 최후에 웃는 자가 되는 데에 특출난 재주를 갖고 있는 지도자다.
아직은 푸른 옷과 잘 어울리지 않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될 지 모른다. 히딩크 감독의 행보를 지켜보는 일은 이런 것이다. 긍정하고 낙관하며 기대감을 품는 것. 그래서, 축구 감독 히딩크는 단순히 승리를 따내는 사람만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처럼 최소한 몇 년 정도는 그의 행보에서 희망을 본 사람들이라면, 그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희망 전도사라는 흔한 표현에 정확히 들어맞는 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09년 2월의 히딩크는 그래서 더욱 더 반가운 이름이다. 히동구 감독, 건투를 빕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60&aid=0000000120&
첫댓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신인 감독'.......감독이 되자마자 트레블을 하다니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마법사라는 말이 딱이넹...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서는 무캐기라고 욕먹는 감독이 수두룩한데...5무로 우승 ㄷㄷㄷㄷㄷㄷ정말 희대의 명장이에요...심리전 전술 등등,,,ㄷㄷ
서형욱 그냥싫다
글을 안보시면 될텐데 왜 굳이 들어오셔서.............;;
히딩크 감독의 영향으로 부수적으로 성공한 케이스인데. 사람이 기회를 잡는다는 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노력이 뒤따라야죠.
뭔가여 이 만케비치 같은 메타포는...
축구계의 로멘티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