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피트(미나리 제작사 설립), 어디 계셨죠?' 아카데미도 빵 터뜨렸다
'여영, 정으로 부르는데 모두 용서'
아 배우 마구잡이식 호칭에 일침'
'아들의 일하라는 잔소리 덕에 수상'
정이삭 고 김기영 감독에도 큰 감사
'마침내 만나게 됐군요 브레드 피트, 반가뵤습니다.
저희가 영화 찍을 땐 어디 계셨죠?'
25일 오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미국 로스앤젤러스 유니온 스테이션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74)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재치있는 입담으로 시상식을 뒤집었다.
브래드 피트는 '미나리' 제작사 플렌B 설립자.
생중계 카메라엔 윤여정의 농담에 활짝 웃는 브래드 피트의 모습이 잡혔다.
윤여정의 촌천살인은 계속됐다.
윤여정은 '유럽분들이 제 이름을 여영 정이라고 부르는데 여정'이라며 '모두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백인들이 아시아 배우의 낯선 이름을 마구잡이식으로 부르는 것에 대한 농담 섞인 일침에 객석에선 웃음이 터졌다.
윤여정도 '엄마'였다.
질긴 생명력으로 버틴 55년간 버텨온 배우는 수상의 기쁨을 두 아들에게 돌렸다.
그는 '미국분들이 한국 배우들에게 굉장히 많은 관심과 환대를 보여주시는 것 같다.
두 이들에게도 감사하다'며 '아들들이 저한테 일하러 가라고 종용을 하는데 그래서 감사하다'며
.아들들의 잔소리 덕분에 엄머가 열심히 일했고, 이런 상을 받았다'며 웃었다.
윤여정은 동료 배우에 대한 예우도 갖췄다.
그는 '글렌 클로스가 있는데 어떻게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란 상상을 했겠냐'며
'오히려 전 그분의 휼륭한 연기를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동료 배우를 챙겼다.
글렌 클로스는 '힐빌리의 노래'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윤여정은 수상의 기쁨을 '이 모든 것은 제 캡틴이자 감독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며
'미나리'를 연출한 리 아이작 정(한국명 정이삭) 감독에게 돌렸다.
더불어 자신의 데뷔작 '화녀'를 연출한 김기영 감독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그는 '제 첫 영화의 감독이셨던 김기영 감독님에게도 감사드린다'며
'여전히 살아계셨다면 제 수상을 기뻐해주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윤여정 55년 연기사 발자취
TBC서 알바 도중 탤런트 공채 합격
전성기 못 누리고 조영남과 미국행
이혼 주홍글씨에 한동안 방송 차질
한국형 어머니 파격적 인물 오가며
안방극장.스크린서 종황무진 활약
배우 윤여정(74)이 25일 오후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미나리'의 연기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품은 오스카 트로피다.
1966년 동양방송(TBC) 탤런트로 연기에 입문한 지 55년 만이다.
활동 반백년이 넘어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는 진귀한 장면을 70대 중반에 연출했다.
윤여정은 우연한 기회로 배우가 됐다.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국문학과를 다니던 때였다.
방학을 맞아 등록금을 벌 요량으로 TBC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김동건 TBC 아나운서가 윤여정에게 공채 탤런트 응시를 권해 시험을 봐 합격했다.
1967년 드라마 '마스터 공'으로 정식 데뷔했다.
1969년 MBC로 옮겨 1971년 드라마 '장희빈'에서 표독한 장희빈을 연기해 세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 김기영(1919~1998) 감독의 영화 '화녀'로 스크린 데뷔식을 치렀다.
배우 캐스팅이 까다로웠던 김 감독은 곧바로 '충녀'(1972)에도 윤여정을 주연으로 기용할 정도로 신뢰했다.
윤여정은 전성기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카메라 앞을 떠났다.
유명 사수 조영남(76)과 약혼한 후 1974년 미국으로 가 결혼식을 올렸다.
조영남과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1976년 조영남과 일시 귀국해 일일극 '여고동창생'에 출연하기로 했다.
윤여정은 1984년 MBC 단막극 '베스트셀러극장-고깔'로 연기에 본격 복귀했다.
윤여정은 1986년 국내에 완전 정착한 후 이듬해 조영남과 이혼했다.
조영남은 훗날 자신의 외도가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이혼 후 국내 방송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윤여정은 최근 미경제매체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이혼은 주홍글씨 같았다'며 '(이혼녀는)'남편에게 순종하고
결혼 약속을 자켜야 한다'는 것을 어긴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TV에 나오거나 일자리를 얻을 기회도 없었다'고 밝혔다.
김수현 작가의 인기 드라마 '사랑과 야망'(1987)에 출연하며 방송가에서 입지를 다졌다.
2003년은 '바람난 가족'으로 '죽어도 좋은 걍험'(1995) 이후3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윤여정은 전형적인 한국형 어머니 약할을 소화하면서도 파격적인 인물을 마다하지 않았다.
2010년대 들어선 '꽃보다 누나(2013~2014)와 '윤식당'(2018) '스페인식당'(2019)등 예능프로그램에 잇달아 출연하며
젊은 세대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윤여정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진 영화 '여배우들'(2009)에서 우스개 섞인 이런 대사를 한다.
'그래, (송)혜교는 중국시장, (최)지우는 일본시장...나는 재래시장이나 지킬라구' 재래(한국)시장으로
자신의 활동 범위를 한정한 윤여정은 12년 뒤 새계 최고 무대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리제기 영화전문기자
'최고란 말 싫어...연기하다 죽으면 참 좋을 것 같아'
기자 간담회도 직설 화법
오스카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나
그게 전부는 아냐...살던 대로 살 것
너무 큰 응원받아 눈에 실핏줄 터져
김연아가 느꼈을 부담감 알게 됐다
'살던 대로 살아야죠.
오스카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는 건 아니잖아요'
배우 윤여정(74)은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연기사을 거머쥐고도 의연했다.
그는 25일 제93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 이후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에서 특유의 유쾌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소감을 밝혔다.
'아카데미가 전부가 아니고, 지금이 최고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는 윤여정은
'남한테 민폐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하다 죽으면 참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수상 소감은
'진심으로 ('힐빌리의 노래'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글랜클로스가 받길 바랐다.
주변에서 내가 받는다고 했는데 안 믿었다.
오래 살면서 배반을 많이 당해봐서 그런 것 바라지도 않았는데, 진짜로 내 이름이 불려지는데...영어도 못하지만
그보단 잘할 수 있는데 엉망진창으로 얘기했다.
그게 좀 창피하다'
'연기 인생 통틀어 최고의 순간 아닌가
'난 '최고' 이런 말이 참 싫다.
너무 1등, 최고 그러지 말고 '최중'되면 안 되나.
같이 살면 안 되나.
최고의 순간인지 모르겠고,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다.
최중만 되면서 살면 된다'
솔직하고 재치있는 언변의 비결은
'오래 살았다.
좋은 친구들과 수다도 잘 떤다.
수다에서 입담이 나왔나 보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예순이 넘어 바뀌었다.
그전엔 나름 계산을 했다면 이젠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좋으면 한다.
미나리는 대단한 기교로 쓴 작품이 아니고, 진심으로 쓴 잔짜' 얘기였다.
그게 나를 건드렸다.
감독을 만났는데 '요새 이런 애가 있나' 싶어서 한 거다'
성원해준 국민들께 한마디 한다면
'상을 타서 보담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사람들이 너무 응원을 하니까 나중엔 눈에 실핏줄이 다 터질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2002년 월드컵 때 축구 선수들이나 김연아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운동 선수 심정을 알게 됐다.
세상에 나서 처음받는 스트레스였다.
그건 별로 즐겁지 않았다.
그냥 우리는 즐거우려고 했다.
세상에 우리가 오스카까지 가는구나.
구경이나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권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