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5.12) 말씀/ 에베소서 5:16-17 짧은 인생을 길게 사는 지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도스트예프스키의 백치를 보면 책의 서문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는 일반인들이 언젠가 읽어야 할 작가이고,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1순위로 꼽히고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그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니체로부터 그를 선구자로 추앙하는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이르기까지 20세기 사상과 문학은 그의 영향 아래 있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의 작품 중에 저는 죄와벌, 카라마죠프 형제 그리고 백치를 읽어보았습니다. 백치 속에 보면 그가 삶아온 삶 중에 ‘생애 마지막 5분’이라는 이야기로 죽음 앞에서 그의 심정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1849年 12月 러시아 세묘뇨프 광장에 위치한 사형장 사형대 위에 반체제 혐의로 잡혀온 28歲의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집행관이 소리쳤습니다. “사형 前 마지막 5分을 주겠다.” 단 5分 사형수는 절망했습니다. ‘내 人生이 이제 5分 뒤면 끝이라니, 나는 이 5分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먼저 가족과 동료들을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 먼저 떠나는 나를 용서하고 나 때문에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너무 슬퍼하지도 마십시오.” 집행관은 2分이 지남을 알렸습니다. “후회할 시간도 부족하구나! 난, 왜 그리 헛된 시간을 살았을까? 찰나의 시간이라도 더 주어졌으면…” 마침내 집행관은 마지막 1分을 알렸습니다. 사형수는 두려움에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매서운 칼바람도 이제 느낄 수 없겠구나, 나의 맨발로 전해지는 땅의 냉기도 못 느끼겠구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겠구나, 모든 것이 아쉽고 아쉽구나!” 사형수는 처음으로 느끼는 세상의 소중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 이제 집행을 시작하겠소." 사격을 위해 대열을 이루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속에 간절한 바램이 일어났습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이라도…” ‘철컥’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가 그의 심장을 뚫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소리가 저멀리서 들려왔습니다. “멈추시오, 형 집행을 멈추시오!”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형장으로 달려왔습니다. 사형 대신 유배를 보내라는 황제의 급박한 전갈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사형은 멈췄고 사형수는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형수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자신 이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날 밤 도스토예프스키는 동생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인생은 신의 선물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 있었던 것을 조금 젊었을 때 알았더라면…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이후 시베리아에서 보낸 4年의 수용소 유배생활은 그의 人生에서 가장 값진 인생이 되었습니다. 혹한 속에서 무려 5kg나 되는 족쇄를 매단 채 지내면서도 창작활동에 몰두했습니다. 글쓰기가 허락되지 않았던 유배생활 이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종이 대신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외워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유배생활을 마친 후 세상 밖으로 나온 도토예프스키는 인생은 5分의 연속이란 각오로 글쓰기에 매달렸고 1881年 눈을 감을 때 까지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했습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 등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작품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는 훗날 “백치” 라는 장편소설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에게 마지막 5分이 주어진다면 2分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2分은 삶을 돌아보는데, 그리고 마지막 1分은 세상을 바라보는데 쓰고 싶다. 언제나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5分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때 사형으로 죽지 않 극적으로 살아난 것은 정말 기적같은 일로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 외에 해석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은 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돈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 개념이 달라지면 우리의 인생도 달라지게 됩니다. 돈을 쫓는 인생에서 생명을 사랑하고 사는 삶으로! 몽테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돈을 꾸어달라면 당신은 주저할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놀러가자고 하면 당신은 쾌히 응할 것이다. 사람은 돈보다 시간을 빌려주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 만일 사람들이 돈을 아끼듯이 시간을 아낄 줄 알면 그 사람은 남을 위해보다 큰일을 하며 크게 성공할 것이다.” 자, 우리 자신도 한번 돌아보지요. 돈을 이끼렵니까? 시간을 아끼렵니까? 우리에게는 얼마나 시간이 남았을까요? 우리에게도 역시 5분이 남았다고 생각해보세요. 돈이 필요할까요? 명예가 필요할까요? 학벌, 권력이 필요할까요? 과거의 추억이 필요할까요? 아닐겁니다. 도스트예프스키는 인생은 5분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새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살게 된다면 앞으로 몇 년이 남았든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 더욱 질적인 삶, 더욱 가치 있고 행복한 삶! 그러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지난 주 5. 2일 서을에 엘리와 사위가 내려와서 사위와 딸들이 미리 칠순 생일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제주에서 6년 사역을 하고 87년 청계에 와서 37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35살정도에 왔을 때 형제들은 20 살의 학생들 이었는데 어느새 저는 칠십이 되고, 재중 지홍 명남 집사님들은 50이 넘었습니다. 앞으로도 크로노스의 물리적 시간은 금방 지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남은 시간은 5분!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우리가 시간과 나이는 붙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 관리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16절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4:14-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세월을 아끼려면 우선 순위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물리적 시간은 크로노스는 똑같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태도로 사는가에 따라서 천 년을 하루처럼 사는 사람도 있고, 하루를 천년처럼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 즉 의미의 시간이 되어 길게 늘려 쓸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려면 정말 중요한 시간들응 삶의 앞자리에 놓아야합니다. 알맹이 없고 영양가 없는 삶의 습관들을 가지치기 해야 합니다. 노인들은 미래에 소망이 없고 형실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과거를 추억하며 살고, 젊은이들은 미래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현실을 너무나 무가치하게 보내버립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현실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말씀 준비하면서 과거 70년동안 간직해 온 사진첩들 졸업장 등 다 버렸습니다. 현재 살기도 바쁘고, 미래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과거에 시간을 쓸 수 없는데 언제고 책장에 저렇게 꽃혀있는 이유가 무엇일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성공에 취해서, 어떤 사람은 과거의 불쾌한 일에 사로잡혀 원망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둘 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과거는 현재를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재 해석 되는 미완성입니다. 지금 실패를 하면 과거의 성공은 빵빠래가 아니라 실패의 시작이 됩니다. 현재를 행복하게 잘 살면 과거의 불행이나 운명같은 삶도 오늘의 행복을 위한 밑거름으로 반전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공과 행복은 미래의 씨앗이 됩니다. 그리고 시간 관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본질과 비본질적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지혜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분주하고 해야할 일이 많아도 비본질을 붙들고 살게 되면 나중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인생을 후회하게 됩니다. 본질을 붙들면 한순간을 살아도 잘 했다는 생각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느 대기업 회장의 죽어가면서 후회하는 내용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닙니다. 사업 업무에만 철저하고 가족들에게 따듯하게 대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가족들 형재난에 휩싸여 원수가 되어있는 인생을 돌아보니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좀더 사랑하며 살 것을 .. 돈 많이 벌어 성공하면 무얼 하겠습니까? 가족들과 더불어 이웃들과 더불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려고 일 한 것 아니겠습니까?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 자수성가했을지라도 자녀들이 상처투성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녀들 역시 부모 곤경보다 부모의 돈을 기대하며 살 것입니다. 성공은 돈이 아닙니다. 지금 형재 사랑하고 우애 있게 지내야 하고, 지금 조금이라고 베풀고 나누며 이웃 사랑 실천하며 지낼 수 았는 것이 성공입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삶의 본질입니다. 이걸 잡으면 다 잡는 것이지만 이것을 놓치며 다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 관리를 잘 해서 본질을 추구하려면 우선 삶을 단순화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잡다한 일들은 우리의 삶을 산만하게 하고, 이것저것 생각을 분산시키며 필요없는 고민을 하게 합니다. 소유도 너무 많으면 관리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삶의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가장 중요한 일 몇 가지를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도 피상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꼭 필요한 소수이 사람과 깊은 만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인 종교적인 생활에 바쁘게 쫒겨다니다보면 본질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또 시간이 되면 놀지 않고 또 이 모임 저 모임 참여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지 않으면 외로워서 못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쁘게 사는데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삽2니까? ?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주식회사 어빌리티 트레이닝 대표이사였던 기노시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 변한다. 저도 그동안 얼마나 미 본질적인 것을 붙들고 살았는가! 성경의 본질, 우리들 삶의 본질, 지식의 본질, 본질이 무엇일까요? 사랑! 이걸 깨달으면 모든 것이 다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는 성숙입니다. 익어가는 것입니다.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붙들고, 알고 행해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본질이 아닌 비본질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남는 것이 없으면 어리석었다고 후회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0:17-22을 보면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예수님게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말씀하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어려서부터 그렇게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 한 말씀에 이제까지 쌓아온 신앙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청년의 문제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형식을 지키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오고 성실한 삶은 칭찬할만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본질 하나를 놓쳤습니다. 그런데 본질이 다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하나만 붙들었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랑 하만 붙들었다면 다 잘했을 것인데 예수님이 보실 때 이무것도 지킨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지키는 생활하지 마세요. 주일 예배, 수요얘배 빠지지 않고 지키기, 기도모임 지키기, 십일조 헌금 지키기, 봉사모임 빠지지 않기...성경 빠지지 않고 몇 페이지씩 읽기...나중에 주님은 이런 것 하나도 보지 않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사랑했으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으며 얼마나 간정한 심정으로 물질을 드렸으며, 많은 말씀이 아니더라도 한 말씀을 지키려고 얼마나 애를 썬는지...중심을 보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규칙을 지켜야 마음이 편하고 안심이 됩니다. 로마서 13:9-10을 보십이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는 인생을 열심히 살았다지만 헛살아온 것입니다. 그는 다른 것은 다 지켰지만 사랑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사랑은 본질의 문제이며 성숙의 문제입니다. 성숙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라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는 늦었다고 생각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런 청년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볼 것이 잇습니다. 가끔 인생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게 됩니다. 이 말의 뜻은 꼭 헛되이 놀아서만은 아닙니다. 학창 시절 공부를 안 한다고 핀잔을 듣던 사람도 사회에 나오면 정신차리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합니다. 잘 것 못 자고 먹을 것 못 먹으면서 매일 새벽부터 폐지 줍는 성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바닷가에 나가 말씀 묵상하고 책을 읽다보면 낮이고 밤이고 겨울이고 여름이고 바다 뻘밭을 뒤지며 낙지를 잡는 분이 있습니다, 난 큐티를 하는데 이 분은 새벅 바닷바람을 쐬며 낙지를 잡습니다. 돈이 되니까 합니다. 가족들을 부양하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나뿐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애쓰며 살아도 정작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자신의 정말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결국 허송세월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나중에 한탄합니다.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입고 자식들 잘 되라고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인생 헛살았다, 왜 자식을 위해삽니까? 자식은 나와 다른 고유한 존재입니다. 왜 자식의 행복이 문제입니까? 그렇게 살아달라고 자식들이 부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삽니까? 내 삶이 없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식 위해 살고, 남편 위해 살고, 나라는 존재의 고유한 삶은 없고, 모두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남보다 열심히 산 것이 보람, 남보다 성공한 것이 행복, 남보다 공부를 잘 한 것이 자랑, 남보다 내 자식이 잘되는 것이 자랑.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냥 누구 엄마, 세탁소 사장, 정비소 아저씨 이런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면 인생은 어느 순간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먼저 내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사야 54장에 이사야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하나님의 자로 살아야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면 고아로 살면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받아 죽을 죄인에서 하나님 아버지 자녀로 돌아가서 고유한 나로 존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심을 따라 삶의 핵심 키워드로 쫓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랑 없이 산 사람은 반드시 후회하지만 사랑하면 산 사람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삶 자체가 행복하고 보람있고 죽음의 순간이 와도 행복합니다. 결론적으로 인생은 5분 입니다. 길어도 5분의 연속일 뿐입니다. 1분 1분 어떻게 지혜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바쁠수록 본질을 붙들어야 하고, 성숙하게 익어가는 삶을 위해서 시간 안배를 잘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게 돌아와서 하나님 자녀로 살며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생명 사랑인란 본질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루를 천년처럼 의미있게, 순간을 영원처럼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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