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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희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뒤 만공 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비구니 선원총림으로 세운 덕숭산 견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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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굴레’ 깨고 성불 빗장 열다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호젓한 솔밭길을 5리쯤 오르니 견성암이다. 멀리 보면 돌담 너머로 옹색한 듯하지만, 정작 ‘견성’(성품을 봄·깨달음)의 자리는 툭트여 넘침도 모자람도 없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비구니 수좌(선승)들이 수행하는 곳이다. 오고가는 니승(여승)들의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는 듯하다.
다시 수덕사에서 20여리 떨어진 가야산 보덕사 선방 옆 연못 위엔 단아한 부도탑이 서 있다.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날으는 백설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느 누가 당대의 문장가 탄허 선사로부터 이런 칭송을 받았을까. 한 니승이었다.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
역사 이래 정치와 종교의 지배자였던 남성의 편견과 업보론, 여성의 자기 비하 등이 만들어낸 이런 ‘정신적 감옥’은 여성 출가자가 넘어야할 첫 관문이었다. 더구나 조선 500년 동안 ‘남존여비’의 인습에 묶여 있던 뒤끝의 여성들이야 두 말할 나위가 있었을까.
90여년 전. 그럼에도 덕숭산에 25살의 한 니승이 찾아왔다. 훗날 덕숭산의 비구니총림이 된 견성암의 초대 총림 원장 법희 선사(1887~1975)였다.
충남 공주 탄천면에서 태어난 법희는 세살 때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할머니 등에 업혀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맡겨졌다. 경북 김천 청암사에서 경전을 공부하던 그가 ‘덕숭산에 도인 스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허의 법제자 만공 선사를 찾아왔다. 홀로 3일을 쉬지 않고 걸어 녹초가 된 그가 덕숭산 정상 정혜사로 들어서자, 만공이 “이런 수좌가 올 줄 알았다”고 기뻐하며 입실(참선 제자로 받아들임)을 허락했다.
비구니가 비구들처럼 참선 정진하며 수좌가 된다는 것은 어림도 없던 시절이었으나 만공은 이 나라 여승들의 참선 길을 과감히 열어젖혔다.
화두선을 하려면 세 요소가 필수적이다. 신심(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 분심(그런데도 자신의 불성을 보지 못하는 분함), 의심(이토록 명백한데도 왜 나는 알지 못하는가 하는 의심)이다. 선사들은 이 마음이 없으면 수억 겁을 앉아있더라도 소용없는 짓일 뿐이라고 한다.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 ‘남존여비’ 인습딛고 만공과 당당히 ‘법’ 겨뤄 비구니 선맥 주춧돌
만공은 이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천재였다. 당시 덕숭산엔 가는귀가 먹어 대중들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한 니승이 있었다. 만공은 그 니승을 몰래 산 속으로 불러내 자신의 계략을 꼼꼼히 일러주었다. 다음 날 수많은 대중들이 수덕사 대웅전에 모인 법문 때였다. 법좌에 오른 만공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숨을 죽인 대중들 앞에 주장자를 높이 들었다.
그 때 그 니승이 대중의 뒤에서 일어나 벼락 치듯 “할”하고 외치더니, 법당 안을 조용히 세 바퀴 돌고선 물러나 앉았다. 만공이 “네가 드디어 알았구나”라고 (깨달음을)인가하니, 대중들은 ‘어떻게 저런 바보가 깨달을 수 있을까’란 생각에 의아해했다. 만공이 한참 설법을 하다가 이번엔 조용히 단주를 들어올렸다. 대중들은 그 뜻을 몰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데, 다시 그 니승이 나와 만공에게 3배를 하고 물러앉았다. 만공은 “그것 봐라, 틀림 없지 않느냐”며 인가를 재확인해주었다. 저런 바보도 깨닫는데, 자신들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으니, 다른 비구, 니승들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덕숭산은 분심과 의심으로 넘쳐 흘렀고, 누구도 잠을 자려하지 않고 용맹 정진했다.
△ 경기도 용인 법륜사 극락암에 모셔진 법희 선사 영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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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승들은 결코 얻기 어려운 참선 기회를 놓칠세라 잠을 잘 수 없었고, 비구들은 그런 니승들에게 뒤지면 어쩌랴 싶어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심으로 정진하던 법희가 30살 되던 해. 드디어 마음이 홀연히 열려 만공의 인가를 받음으로써 근대 비구니 선맥의 주춧돌이 놓여졌다.
북한산 승가사를 오늘의 거대 사찰로 키운 상륜 스님(76)은 출가한 날부터 스승 법희를 한 방에서 모셨다. 승가사에 이어 불사 중인 용인 원삼면 법륜사로 찾아갔다. 밤 12시면 일어나 활동을 시작해 새벽에 하루 일을 다해버려 늘 주위를 놀라게 하는 그의 부지런함은 스승을 닮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자신은 스승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스님(법희)이 잠을 두 시간 이상 자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낮엔 늘 울력하고 도량의 풀을 뽑았는데 얼마나 일을 했던지 손가락이 크게 휘어져 있었지요. 달 밤에도 남몰래 텃밭에서 호미질을 했고, 자는가 싶어 보면 늘 앉아 참선하고 있었지요.”
그런데도 대중들이 법(진리·깨달음)을 물어도 법희는 아는 체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비구니 선맥이 자리 잡기도 전에 꺾일 것을 두려워한 만공의 뜻에 따른 행동이기도 했다. 만공의 뒤를 이어 덕숭산을 이끌던 벽초 선사는 상륜 스님에게 입버릇처럼 “너희 스님의 진가는 200년 뒤에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법희의 영정 사진을 뒤로 하고 법륜사 마당에 나서니 대웅전엔 대규모 돌부처가 모셔지고 있다. 단박에 ‘성’과 ‘편견’의 굴레를 벗어버린 법희의 할을 한 줄기 봄바람이 전해준다. 이 돌부처는 남성인가, 여성인가.
예산 덕숭산/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
묘리비구니 법희선사 탑비
스님은 단기4220년(1887) 정해 2월 9일에 충남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태어나니 유창주(兪昌周)의 둘째 딸이다. 스님의 나이 겨우 4살이 되었을 때 그의 외조모가 등에 업고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데리고 들어가 출가시키니, 때는 경인년 3월 9일이였다. 14세에 귀완(貴完)비구니에게 삭발하고 동운(東雲)스님에게 귀의하여 사미비구니계(沙彌比丘尼戒))를 받았으며, 23세에 해인사에 들어가 구족계를 받고, 다시 동학사 만우회하(萬愚會下)에 들어가 경전과 어록 등을 배웠고, 25세에 이르러 덕숭산 견성암에 들어가 방(榜)을 붙이고 참선을 하던 중에 마음과 안목이 문득 열리니 만공(滿空)스님이 그를 칭찬하고 법희(法喜)라는 법호를 내려 주었다.
하루는 만공스님이‘가섭의 찰간(刹竿)’이라는 화두를 들어 대중에게 “너희들을 시험삼아 말해보도록 하라”고 하자,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고기가 헤엄치니 물이 혼탁하고, 새가 나니 깃이 떨어집니다” 라고 하였으며, 또 하루는 용운(龍雲)법사의 “흰눈 속에 복사꽃이 어지럽게 난다” 라는 구절을 들어 대중에게 “날아가 어느 곳에 있는가?” 라고 물으니,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눈이 녹으니 한 조각 땅입니다.” 이에 만공스님이 “다만 한 조각 땅일 뿐이다”
고 말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사불산 윤필암(潤筆庵), 지리산 구층암(九層庵), 서울 정릉동 인수재(仁修齋)와 덕산 한림에 주석하면서 자적(自適)하였으며, 80여 노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수덕사 비구니 총림으로 들어가 원장의 직을 맡아 크게 선풍(禪風)을 떨치며 날을 보내다가 정사년(1977) 3월 9일에 열반하시니 세수는 89세요, 법랍은 85세이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큰 시냇물로서도 그의 청백함을 비유할 수 없고 하얀 눈으로서도 그에 소박함을 비유할 수 없다. 앞으로 백세의 과거와 이후로 백세의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성대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문도인 상륜 종현 청공 등이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도모하기에 나는 문장이 능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위와 같이 전말을 서술하는 바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는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요, 지엽과 화려한 문장은 힘쓴 바 없다.
응화 3006년(1979) 기미 중추절 오대산인 탄허 김택성은 짓고 아울러 쓰다. |
첫댓글 _()_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