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평면 배다리 출신,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시인 황지우 교수가 최근 광주나들이를 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지난 16일 저녁, 광주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토크 콘서트 '지금, 윤상원 with 황지우'에는 400여 시민들이 눈 속을 뚫고 달려와 밤중까지 자리를 지키며 윤상원 열사의 정신과 오늘의 의미를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콘서트의 이야기꾼으로 초대된 황지우시인은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는 윤 열사의 마지막 말을 상기하며 '윤상원 정신'이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는 말을 이어갔다. 막혀가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내자는 것이다. 그동안 재직했던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직을 문광부의 '표적감사'압력으로 물러난 후 교수직까지 박탈당하자 황지우 시인은 국가를 상대로 교수직위확인소송을 냈었고 승소를 했지만 또다시 대법원까지 가는 과정에서 2년여 동안 심한 마음고생을 겪었다. 그러다 홀연히 중국으로 떠나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吉林大學)의 외국인 초빙교수로 머물며 강의와 연구, 창작활동을 계속해왔다. 교수직 복귀가 이뤄지면서 그는 2학기 강의를 위해 지난 7월에 귀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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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저녁 광산구청이 주최한 '지금 윤상원 With 황지우'라는 토크쇼에 참석하여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황지우시인. 그토록 자유, 인권을 외치던 성직자들마저 몸을 사리던 시대에, 윤상원의 희생이 없었다면 광주정신은 얼마나 퇴색되었겠느냐며 오늘 우리가 다시 윤상원을 불러내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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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신문에서 황 교수님의 토크쇼기사를 읽고 꼭 고향인 해남신문 금요초대석에도 모시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연말 무렵 연락을 드렸는데 안계시더군요. 그동안 중국에 쭉 계셨습니까? 네. 작년 8월에 나갔다가 올해 7월에 귀국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생계형 망명'(웃음)이라 놀려대기도 했지만,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교 한국어과에서 1년 동안 한국문학 강의하면서 놀다 왔어요.
중국 길림성지방은 겨울에 보통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고 하는데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꼭 중국에 가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장춘, 하얼빈, 대흥안령 등 만주 일대의 겨울을 최소 옷 다섯 벌을 입고 지냈어요. 노출된 얼굴 살갗을 면도날로 긋는 것 같은 그 혹독한 추위가, 돌이켜 보면, 뭐랄까, 중독성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리워집니다. 제 첫번째 시집에서부터 '길림'이나 '봉천' 같은 낯설고 먼 지명에 대한 동경이 언뜻언뜻 비춰나는데, 우리 젊은 시절에 그런 거 있었잖습니까? 가슴에 밀서 하나 품고 만주 설원을 가로 질러 가던 우리 독립군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예요.
그곳에서 무엇을 하시고, 또 시인의 눈으로 무엇을 보셨습니까? 장춘은 우리 식민지 강점기 때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있던 만주국 수도 신경이었죠. 나쓰메 소세키 등이 만주 기행을 통해 대륙 이주 러시를 조성하면서 우리 문학예술에서도 소설가 염상섭, 시인 백석, 작곡가 김동진, 김순남 등이 한때 거쳐 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더군요. 우선 저는 필담 외에는 말이 안 통하니까 완전히 고립된 개인으로서 어슬렁거리며 응시하는 익명의 산책자로만 지냈죠. 저로서는 오랜만에 보장받은 이 단절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격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중국'. 그건 두려움이었어요. 거리의 붉은 고딕체 표어들이 '문명(文明)'과 '과학기술(科學技術)'에 집중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표어가 현실이 될 때 14억 인구로 소용돌이치는 중국 현대성의 블랙홀 가장자리에 근접해 있는, 그것도 분단된 한반도가 더 또렷이 바라다 보였습니다.
네. 그렇죠. 그럼 화제를 좀 바꿔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지만 대학복귀를 우선 축하드리고요. 당시 임기가 아직 남은 총장직을 사퇴한 이유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이들도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정부 들어 대학을 비롯한 문화예술계가 당면한 어려움들은 무엇입니까? 이 정부는 건들어서는 안 될 것들, 즉 강과 문화를 건들었습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숨 쉬는 것들입니다. 문화예술은 근본적으로 가만 둬야 스스로 흐름을 만들고 창의성의 젖을 선사하는 거 아닙니까? 임기가 보장된 현대미술관 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마치 포클레인으로 찍어 긁어내듯이 했을 때 저는 어떤 눈먼 권력의 도취상태 같은 것을 느꼈는데요. 특히 이른바 '한예종 사태'에 대해 UN 문화 분과가 이런 식으로 "정부가 대학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성명을 표하기도 했지만, 전 그때 이거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가해지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종의 '반달리즘'(문화파괴행위)이라고 말한 바 있죠. 작년 대법원 승소 판결에 의해 올 9월에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 활력에 넘쳤던 학교 분위기가 어딘가 우울해요.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 같고요. 올해에 4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카이스트에 이어 한예종도 자살 클로스터가 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염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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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보 ● 1952년 북평면 배다리 출생 ● 광주서중 3학년 때 학원 문학상에 입상, 광주일고 졸업 ● 1972년 서울대 미학과 진학 2학년 때 유신반대 시위연루로 구속된 뒤 강제징집 ●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沿革」이 입선 ● 같은 해『문학과 지성』에 시「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등을 발표하며 등단 ●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 가담혐의로 구속 ● 1983년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발간 ● 1985년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발간 ● 1986년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 1987년 시집『나는 너다』출간 ● 1990년대 들어 선(禪)적인 세계에 몰두, 조각에 몰두 ● 1990년 『게 눈 속의 연꽃』발간 ● 1994년 한신대학교 문창과 교수 ● 1995년 조각과 시를 한데 묶어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발간. 조각전(학고재 화랑) 개최 ● 199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교수 ● 1999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발간 ●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총장 ● 2010년 9월~2011년 8월 중국 길림성 길림대학교 연구교수 ● 2011년 ~ 현재 한국종합학교 교수 수 상 ● 1983년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제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 1991년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 1993년 『뼈아픈 후회』로 제8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 1999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제 1회 백석문학상 수상 ● 2006년 옥관문화훈장 | |
이번 토크쇼에서 "질식해가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내자"고 하셨는데요. 윤상원 정신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80년대 한국문학은 숫제, 광주 오월에 내가 거기에 없었다는 알리바이에 대한 죄의식의 표현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미안함, 죄책감, 이런 것이 지나쳐 피하고 싶은 기억, 부담감, 나중에는 또 광주야? 하는 식상함까지… 어느 정치학자는 그때의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태도'를 '절대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걸 읽은 적 있는데, 그 코뮌의 한 가운데 윤상원을 비롯해 도청의 마지막 날을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 자리에 안 있을 수 있었지요. 역사가 피치 못할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서 누군가를 호명할 때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그분들… 사람들에게서 어쩌다 정전기처럼 나타나는 '숭고'의 광채를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 육십인데, 그 당시 스물예닐곱 되었을 청년 윤상원은 이 절대적 공동체의 대명사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의 잔인한 나무가 요구하는 피를 기꺼이 헌혈한 그의 자유의지와 숭고, 그게 저한테는 윤상원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5·18정신을 오늘에 살려내자' 입버릇처럼 해온지가 수십 년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고 보시며, 만약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면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오월 정신의 핵심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크겠지요.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에 사실 우리가 상당 정도 안도하거나 안이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죠. 반성해야죠. 어쨌든 그러는 사이 오월 정신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좀 시들해진 듯한 느낌? 그러나 우리가 청춘을 바쳤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실감시키는 오늘의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오월 정신으로부터 답을 찾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또 이제는 오월 정신이 어떤 불의한 외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끈 치솟는 것이 아니라 외압이 없더라도 스스로 우러나오는, '작용하는 정신'으로 퍼졌으면 합니다.
황지우 총장님은 몰라도 황지우 시인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컸습니까? 초등학교시절 학우들과 고향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제가 네 살 때 일가족이 광주로 이사 나온, 전후 이농 1세대로서 저의 탯자리 해남을 고향 이야기로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다만 어머님 말씀과 대조해 보면 제 기억이 두 살 무렵까지 소급한다는 걸 알았고, 두륜산 남사면 기슭이 거침없이 내리뻗어 너른 들녘을 치마폭처럼 주름지게 펼쳐놓고 바다로 쑥 들어가 버리는 북평면 배다리 일대의 풍경이 저의 정서적 원형질을 이뤘다 하겠습니다. 제 첫 시집 첫 번째 시, <연혁>은 그 빼어난 명승을 배경으로 한 겁니다. 언젠가 문인 친구들과 그곳 여행을 갔을 때 "여기서 시인 하나 나올 수밖에 없네" 하는 말로 내 고향의 보답을 다 받았습니다. 시는 사춘기를 앓던 중학교 시절에 처음 썼습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나는 오늘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 '게눈속의 연꽃'같은 시들은 시 제목이 그대로 시집표제가 되어 교과서에도 실리고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매우 난해하고 격렬한 풍자시가 이처럼 많이 읽히는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정 바랍니다. 전 베스트셀러 시인은 아니고요, 스테디셀러에 가깝다 해야 하나요? 제 독자의 상당수는 소위 옛날 386 세대인 거 같애요. 그들과 시대감이 같았다 할까요?
시인이자 교육자이며 조각 등 당양한 장르의 예술에도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고 계시는데 최근 가장 몰두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냥 멍청하게 있습니다. 가끔 '주역'도 뒤적여보고, '시경', '굴원 초사'를 기웃거리고 있죠.
네. 작년 8월에 나갔다가 올해 7월에 귀국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생계형 망명'(웃음)이라 놀려대기도 했지만,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교 한국어과에서 1년 동안 한국문학 강의하면서 놀다 왔어요.장춘, 하얼빈, 대흥안령 등 만주 일대의 겨울을 최소 옷 다섯 벌을 입고 지냈어요. 노출된 얼굴 살갗을 면도날로 긋는 것 같은 그 혹독한 추위가, 돌이켜 보면, 뭐랄까, 중독성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리워집니다. 제 첫번째 시집에서부터 '길림'이나 '봉천' 같은 낯설고 먼 지명에 대한 동경이 언뜻언뜻 비춰나는데, 우리 젊은 시절에 그런 거 있었잖습니까? 가슴에 밀서 하나 품고 만주 설원을 가로 질러 가던 우리 독립군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예요. 장춘은 우리 식민지 강점기 때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있던 만주국 수도 신경이었죠. 나쓰메 소세키 등이 만주 기행을 통해 대륙 이주 러시를 조성하면서 우리 문학예술에서도 소설가 염상섭, 시인 백석, 작곡가 김동진, 김순남 등이 한때 거쳐 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더군요. 우선 저는 필담 외에는 말이 안 통하니까 완전히 고립된 개인으로서 어슬렁거리며 응시하는 익명의 산책자로만 지냈죠. 저로서는 오랜만에 보장받은 이 단절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격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중국'. 그건 두려움이었어요. 거리의 붉은 고딕체 표어들이 '문명(文明)'과 '과학기술(科學技術)'에 집중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표어가 현실이 될 때 14억 인구로 소용돌이치는 중국 현대성의 블랙홀 가장자리에 근접해 있는, 그것도 분단된 한반도가 더 또렷이 바라다 보였습니다. 이 정부는 건들어서는 안 될 것들, 즉 강과 문화를 건들었습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숨 쉬는 것들입니다. 문화예술은 근본적으로 가만 둬야 스스로 흐름을 만들고 창의성의 젖을 선사하는 거 아닙니까? 임기가 보장된 현대미술관 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마치 포클레인으로 찍어 긁어내듯이 했을 때 저는 어떤 눈먼 권력의 도취상태 같은 것을 느꼈는데요. 특히 이른바 '한예종 사태'에 대해 UN 문화 분과가 이런 식으로 "정부가 대학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성명을 표하기도 했지만, 전 그때 이거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가해지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종의 '반달리즘'(문화파괴행위)이라고 말한 바 있죠. 작년 대법원 승소 판결에 의해 올 9월에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 활력에 넘쳤던 학교 분위기가 어딘가 우울해요.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 같고요. 올해에 4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카이스트에 이어 한예종도 자살 클로스터가 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염려됩니다. 80년대 한국문학은 숫제, 광주 오월에 내가 거기에 없었다는 알리바이에 대한 죄의식의 표현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미안함, 죄책감, 이런 것이 지나쳐 피하고 싶은 기억, 부담감, 나중에는 또 광주야? 하는 식상함까지… 어느 정치학자는 그때의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태도'를 '절대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걸 읽은 적 있는데, 그 코뮌의 한 가운데 윤상원을 비롯해 도청의 마지막 날을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 자리에 안 있을 수 있었지요. 역사가 피치 못할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서 누군가를 호명할 때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그분들… 사람들에게서 어쩌다 정전기처럼 나타나는 '숭고'의 광채를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 육십인데, 그 당시 스물예닐곱 되었을 청년 윤상원은 이 절대적 공동체의 대명사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의 잔인한 나무가 요구하는 피를 기꺼이 헌혈한 그의 자유의지와 숭고, 그게 저한테는 윤상원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래도 오월 정신의 핵심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크겠지요.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에 사실 우리가 상당 정도 안도하거나 안이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죠. 반성해야죠. 어쨌든 그러는 사이 오월 정신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좀 시들해진 듯한 느낌? 그러나 우리가 청춘을 바쳤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실감시키는 오늘의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오월 정신으로부터 답을 찾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또 이제는 오월 정신이 어떤 불의한 외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끈 치솟는 것이 아니라 외압이 없더라도 스스로 우러나오는, '작용하는 정신'으로 퍼졌으면 합니다. 제가 네 살 때 일가족이 광주로 이사 나온, 전후 이농 1세대로서 저의 탯자리 해남을 고향 이야기로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다만 어머님 말씀과 대조해 보면 제 기억이 두 살 무렵까지 소급한다는 걸 알았고, 두륜산 남사면 기슭이 거침없이 내리뻗어 너른 들녘을 치마폭처럼 주름지게 펼쳐놓고 바다로 쑥 들어가 버리는 북평면 배다리 일대의 풍경이 저의 정서적 원형질을 이뤘다 하겠습니다. 제 첫 시집 첫 번째 시, <연혁>은 그 빼어난 명승을 배경으로 한 겁니다. 언젠가 문인 친구들과 그곳 여행을 갔을 때 "여기서 시인 하나 나올 수밖에 없네" 하는 말로 내 고향의 보답을 다 받았습니다. 시는 사춘기를 앓던 중학교 시절에 처음 썼습니다.정정 바랍니다. 전 베스트셀러 시인은 아니고요, 스테디셀러에 가깝다 해야 하나요? 제 독자의 상당수는 소위 옛날 386 세대인 거 같애요. 그들과 시대감이 같았다 할까요?그냥 멍청하게 있습니다. 가끔 '주역'도 뒤적여보고, '시경', '굴원 초사'를 기웃거리고 있죠. |
첫댓글 한국의 대시인을 이명박 정부의 딴따라 출신 문화 관광부 장관 유인촌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자리에서 쫓아 냈다. 이것은 시대의 비극일까 희극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