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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위해 선택된 자들 (마 10:16-39)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출생되어진 자들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신앙생활은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으로서의 태어남의 십자가 정신으로 되어져야 한다.
십자가 정신이란? 한마디로 나라는 존재는 없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정신을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
사도바울은 성도의 존재에 의미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하여
성도는 이제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는 신자란 늘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란 말이다.
저는 이 말씀을 버림의 신앙이라는 말로 말하고 싶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땅 사람으로 출생이 되어진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사람으로 출생이 되어진다.
앞으로 되어질까가 아니라 이미 되어졌다.
이 말은 인간의 조건으로 취소 될 수가 없는 확정된 것이란 말이다.
취소 될 수 없다는 증거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은 늘 성도에게 너는 이제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야! 라고 증거해 주신다.
그런데 하늘에 사람이 되면 그 증거로 옛 사람을 떠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날마다 떠나는 삶을 살도록 강요받게 된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는 인간들이 자기 사랑으로 만들 낸 가짜 하나님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죄인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사는 것을 두 눈뜨고 보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는 범죄한 아담이 살아갈 근거인 땅을 저주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을 만나서 세상적으로 신세를 망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가족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가서 하는 말이 부모친척 고향을 떠나라고 한다.
부모친척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 인연을 끊으라는 말이다.
즉 죽으라는 말이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너는 하늘에 사람이다" 라는 의미로 육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개명시켜 주었다.
이름을 바꿔준다는 것은 새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족보가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름은 부모가 자식에게 지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것은 이제부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부모란 뜻이다.
즉 너는 이제부터 육신의 부모인 데라가 네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 네 부모란 말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부모 형제는 모두가 과거의 사람들이고 이제부턴 하나님께서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만들어 주신다.
그래서 부모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앞으로 아브라함이 만들어갈 새로운 가족들은 모두가 아브라함과 같은 방법으로 부모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서 만들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으로 삼으셨다.
앞으로 나타날 하늘에 백성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낯선 삶이 시작되었다.
이 낯선 삶을 일컬어 성경은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삶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누려왔던 세상의 기득권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믿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서 삶이 불안해지게 된다.
결국 하늘에 사람들에게 평안과 불안에 요소는 환경이 아니라 믿음의 여부이다.
믿음만 있으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안 할 수가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환경일지라도 불안하다.
야곱도 장자권의 축복을 받으면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호시탐탐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채려고 노려왔다.
그런데 막상 장자권의 축복을 받자 야곱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인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아니 복 받을 줄 알고 장자권을 받았는데 집에서 쫓겨나다니 이게 왠 말인가?
집에서 쫓겨난 야곱을 하나님은 벧엘 광야에서 만나서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보호자가 되셔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동행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제부터 야곱의 부모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야곱은 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믿고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야곱처럼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것을 하나님께 복 받은 자라고 한다.
믿음에 눈으로 보면 복이지만 세상 눈으로 보면 저주이다.
누가 집에서 쫓겨나 나그네 신세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복이라고 하겠는가?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을 주어도 복이 아니라고 버린다.)
이러한 하늘 백성으로 만들어지는 역사도 신약에서도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되어 이루어진다.
구약에선 누구든지 하나님이 찾아가면 지금까지의 삶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듯이,
신약에서도 누구든지 예수님이 찾아가면 여지없이 인생 종말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하루하루 가족들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와서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심지어 가족도 버리는 길로 들어서고 만다.
베드로의 마누라 입장에선 예수는 가정파괴범이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몹쓸 인간이다.
왜? 고기 잘 잡고 가정에 충실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찾아와서 풍비박산을 내느냐고 따질 일이다. 이런 일은 비단 베드로뿐만 아니라 12제자 모두가 동일하다.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장래에 출세가 보장된 전도가 유망한 바리새인 중에서도 진짜 바리새인이었다.
잘하면 앞으로 대 제사장까지도 바라 볼 수 있는 기대가 짱짱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가자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전도가 유망한 자가 아니라 민족의 반역자로 유대교라는 조직의 변절자로 낙인찍히게 되어 죽음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잘나가던 바리새인으로서의 사울에 인생은 완전히 쫑나고 말았다.
사울의 부모 입장에선 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예수는 아들에 신세를 망치게 한 웬수이다.
아마 사울의 부모님 입장에선 예수라는 말만 들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홍두께를 들고 죽인다고 달려 들 것이다.
이 모두가 예수님이 찾아가서 일어나게 한 일이다.
이게 바로 예수쟁이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검을 주려고 왔다"고 하셨다.
이는 예수 때문에 가족에 불화가 생기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 예수 믿고 가정에 행복과 안녕을 꿈꾸며 세상에서 잘 사는 복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다른 예수이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짜 예수인 것이다.
그럼에도 본인들을 모른다. 행여 당신이 믿는 그 예수는 가짜입니다 라고 하면 고맙습니다 라고 감사하는게 아니고 오히려 이단이라고 역정을 낸다.
이런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빛이 어둠을 비취니 어둠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을 미워하더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정답을 말하면 자기 답이 맞는지 틀렸는지 확인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너는 왜? 다른 답을 말하느냐! 라고 화를 낸다.
너 어디서 이런 답을 배웠느냐! 너 이단이지! 라고 한다. 하나님은 정답을 원하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성경에 진짜 예수는 안 믿고, 사람들이 만들어 낸 가짜 예수를 믿고 있다.)
이제 땅 사람이었던 사울은 예수를 만남으로서 하늘에 사람 바울이 되어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걸어가는 운명 속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땅 사람 사울이 예수를 만나고 나서 하늘에 사람 바울로 태어난 것이다.
이제 땅에 원리로 살아가는 것에서 하늘에 원리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
아니 어떻게 예수를 만나는 인간마다 인생이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인가?
이런 예수를 과연 누가 믿으려고 하겠는가?
(만약에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고자 하며 원대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가 찾아온다고 해도 오지 말라고 말려야 할 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스스로 예수를 믿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은 하나도 예수를 믿지 못하므로, 예수님이 직접 성도를 선택하셔서 믿도록 하시는 것이다.
세상적인 말로해서 예수님에게 찜 당해 선택을 당한 성도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과 같이 망하는 길로 걸어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세상적인 입장에선 예수는 진짜 만나고 싶지 않는 재수 없는 분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찾아가 만나는 사람마다 세상 인생이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을 일컬어 성경은 구원이라고 한다.
구약시대엔 애굽에 사람은 홍해바다에서 수장되어 죽어버렸고 이제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데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광야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가지도 오지도 움직이지 못한다.
오직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데로 움직여야만 된다.
양식도 자기가 농사지어서 먹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만 먹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얻어먹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죄성이 있어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늘 반항을 한다.
"하나님 난 만나보다 짜장면이 먹고 싶고, 팔보채가 먹고 싶고, 피자가 먹고 싶은데요" 하면!
"하나님이 오냐! 그래 내가 줄게! 라고 하고 가만 놔두지 않고 이놈에 자슥 주는데로 쳐 먹을 것이지 말이 많다" 고 완전히 작살을 낸다.
아니 무슨 하나님이 이러는가? 자유도 없고 완전 독재도 이런 독재자는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나와서 비로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간다.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란 것을 알게 된다.
참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내 좋아하는 것 못 먹고, 내 가고 싶은데도 못 가고 내 자유가 박탈당하고, 독재 당하는 이런 삶을 성경은 복된 삶이라고 한다.
남에게 간섭을 받기 싫어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런 복을 주어도 차 버린다?
그러니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만 믿을 수가 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제는 철저하게 너라는 존재는 없고 오직 하나님이 요구하는 인생으로만 살아가야 되는 인간이 되었다" 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래 난 죽었지! 이미 죽은 놈이지! 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에겐 너무도 편안한 곳이 되지만,
아니야! 내가! 왜? 죽어! 난! 아직 살았어! 난 죽지 않았어! 라고 하며
그래도 내 주권이 있고, 내 의지가 있고, 내 인생이 있는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죽을 지경이 된다.
그러니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나는 죽었구나!" 라고 하며 살면 이것도 감사 저것도 감사가 되는데, "나는 살아야 돼!" 라고 하면 매사가 불평과 원망과 근심 걱정만 쌓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세상 사람을 일컬어 땅 사람이라고 하고, 성도를 일컬어 하늘에 사람들이라고 한다.
땅 사람이란? 땅에 원리로 살아가는 자를 말하고,
하늘에 사람이란? 하늘에 원리로 살아가는 자란 말이다.
그런데 땅에 원리는 끊임없이 받아야 행복해 하는 원리이고, 하늘에 원리는 끊임없이 주어야 행복해 하는 원리이다.
땅에 원리는 피조물의 원리이고, 하늘의 원리는 창조주의 원리이다.
피조물은 받아야 행복하고, 창조주는 주어야 행복하다.
마치 어린아이는 엄마의 젓을 먹음으로 행복해 하고, 엄마는 젖을 줌으로 행복해 하는 것과 같다.
땅은 받아야만 행복해 하는 옛 사람의 원리이고, 하늘은 주어야만 행복해지는 새 사람의 원리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 때에 성령이 임하고 나니 움켜쥐었던 자들이 모두 토해내는 것을 보게된다.
이는 땅 사람이 하늘 사람으로 태어난 증거이다.
우리가 흔히 우스갯소리로 여자는 땅, 남자는 하늘이라고 한다.
여자들의 생리는 받아도 받아도 싫다 소리를 안하고 끝이 없이 다고 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의 비상금까지 긁어내면서 얼굴이 방끗 방끗해 하며 행복해 한다.
(잠언 30장 15절에서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인간들의 탐욕을 거머리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남자들은 한달 고생 고생하여서 아내에게 월급봉투 갖다 줄 때 가장 행복해 한다.
그리고 비상금까지 탈탈 털리면서도 기뻐한다.
(이러한 것은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 줄 때 행복해 하는 본능 때문이며, 여자는 남자로부터 보호를 받을 때 행복해 하는 본능 때문이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늘사람과 땅 사람의 모습을 남편과 아내를 통해서 시청각교제로 쓰고 계신다고 은혜를 받는다.
그래서 천국에는 하나님의 아들만 들어가지 딸을 못 들어가는구나 라고 혼자 생각해 본다.
성도는 아들에 영을 받았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영적으로 아들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은 예수그리스도를 표상하고 아내는 교회로 표상하여 말하였다.
그러니 이 땅에 모든 인간은 다 여자이고 남자는 예수님 한분 뿐이다.
그래서 천국에선 신랑은 어린양 한 분이고 모든 성도는 신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아들에 영인 성령을 받고 보니 이제부터 여자로서의 움켜쥐며 행복해 하던 땅 사람의 삶에서 벗어나 남자로서 나누어주면서 행복해 하는 하늘에 사람으로서의 삶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제가 초두에 성도는 십자가로부터 시작되어진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 것을 버리는 삶, 초월하는 삶을 살으라는 의미에서 말씀드린 것이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하여
하늘에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버리는 자이지 쫓아가는 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다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야 이런 것을 위하여 살지만, 하늘에 사람들인 성도는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사는 자이다. 사람이 살려고 하면 힘들고 고생스러워지는데, 죽고자 하면 편안해 진다.
병들면 죽지! 라고 하면 걱정이 안되는데!, "아니야! 나는 살아야돼!" 라고 하면 힘들어진다.
가난하면 그래 까짓 거! 나는 하늘에 소망이 있는데! 하며 족한 줄로 알고 살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아니냐! 나는 잘살아야 돼! 라고 생각하니 가난한 자기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이다.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은 죽으라고 하면 겁을 내지만 목숨이 두 개인 사람은 죽으라고 하면 겁을 내지 않는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펑크가 날 것을 대비하여 여분의 타이어 하나를 더 준비해 가지고 다는 사람은 펑크가 나도 걱정이 안되는데 여분의 타이어가 없는 사람은 펑크나면 안되는데 라는 생각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운행이 끝날 때까지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죽이겠다고 온갖 협박과 공갈을 치는데도 눈 하나 끔적하지 않은 것은 목숨이 두 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0장 17-18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다.
마귀가 예수님이 가지고 있던 세상 목숨을 가지고 공갈을 치니 "에이 이까잇거! 이게 그렇게 탐이 나냐! 그럼 가지고 가라?" 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땅에서 살아가는 육신의 목숨 말고 하늘에서 살아갈 하늘에 목숨이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버린다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신 것이다.
이는 하늘에 생명이 있는 자는 세상을 죽고자 하며 살아갈 것이지만, 하늘에 생명이 없는 자는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더 오래 살고자 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마귀 앞에서는 하늘에 생명이 없는 자는 마귀가 "너 죽을래" 라고 하면 벌벌 떨면서 "예! 예! 선생님 시키는대로 할테니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라고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처럼 하늘에 또 다른 생명을 가진 자들은 마귀가 "너 죽을래" 라고 하면 "그래 죽여라!" 이까잇거 썩을 목숨 버려!" 라고 하며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가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 자기를 죽이는 자들은 "저 놈 이제 끝장이구나!" 라고 하는데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이 갖고 있는 자기 생명을 보고 있으니 "에이구 불쌍하고 못난 중생들아!" 라며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럽니다! 그러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죽어 가는 사람이 오히려 죽이는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용서나 관용은 가진 자에게서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마귀에게 죽는 자는 천국에 가지만, 하나님께 죽는 자는 지옥에 간다.
그리고 알 것은 성도가 받은 생명은 예수님을 위하여 죽으라고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오실 때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죽기 위하여 오셨다. 이러한 것은 이미 구약의 제사 제도를 통하여서 미리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제사의 제물로 선택된 짐승은 죽이기로 작정된 것이다.
이와같이 성도가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것은 죽기로 선택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들에게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살고자 하지말고 죽고자 하라는 것은 너희들은 이미 죽이기로 선택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6장 9-11절을 보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위 말씀을 보면 지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성도들도 복음 때문에 죽기로 작정이 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죽기 위해 선택을 입은 자들이 바로 성도이다.
그렇다면 누가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인가 하면 복음과 함께 잘 죽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에게 은삼십세겔에 팔렸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몸값인 은삼십세겔을 제사장에게 같다주니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아겔다마' 라는 "피 밭"을 샀다.
그런데 그 피 밭을 나그네들의 무덤으로 삼았다.
성경은 교회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곳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나그네들이 묻힐 무덤인 것이다.
누가 나그네인가? 하늘에 본향을 두고 있는 성도들이다.
그렇다면 나그네들인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무엇을 묻어야 하는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즉 세상에서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두 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이다.
그렇다면 먼저 죽기 이전에 "나는 죽어도 살 생명이 있는지"를 확인하여야 한다.
바울은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님처럼 죽어도 다시 얻을 목숨이 있다면 눈치 볼 것 없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다.
누가 이단이라고 하든 개의치 말라.
주님이 바라는 정답만 가지고 있다면 주변에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이 주신 정답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복음을 속된 것으로 예를 들어 죄송하지만! 화투판에서 끗발 싸움을 할 때 장땡이를 가지고 있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고, 공갈을 쳐도 끔쩍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가진 패가 예수 안에 참 생명의 패를 가지고 있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냥 스데반처럼 씩 웃으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럽니다" 라고 하며 사시기 바란다.
교회 안에서도 누가 무어라 하든 개의치 말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죽으라! 잘 죽는 자가 신앙이 좋은 것이다.
성도의 능력은 복음과 함께 잘 죽는데 있지, 잘 사는데 있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죽는다 하지 않고 잔다고 한다는 것이다.
스데반을 죽었다 하지 않고 잔다고 하였다. 그동안 고생을 했으니 푹 쉬라는 것이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선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고 하였다.
자존심도 죽이고, 욕심도 죽이고, 자랑도 죽이고, 열등감도 죽이고,,,,,
성도에게 주어지는 참 안식은 버리고 죽을 때 주어지는 것임을 간과치 말라.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바울과 같이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죽고자 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살고자 하면 죽음이 두려워진다.
예수님은 버리라고 하는데 우리는 안 버리려고 한다.
마태복음 10장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데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셨다.
육적으로 보면 참으로 고약한 운명으로 보내어진 자들이다.
일부러 이리에게 잡아먹히라고 보내신 것이다.
우리 대장이 살아서 돌아오지 말란다.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대장의 뜻은 알겠지만 막상 그 명령에 따르려고 하니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말을 거역한다.
신앙의 아픔이란? 원리를 안다고 해서 그대로 살아지지가 않는데 문제가 잇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우리가 원튼 원치 않튼 당신의 뜻대로 끌고 가실 것이다.
죄인이 안 죽으려고 하는게 죄임을 알아야 한다.
누가 죽음을 슬프다고 하였는가?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란? 군대에서 제대하는 것과 같이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믿어지기까지는 숱한 세월이 지나고 수많은 시행 착오를 거듭한 끝에서야 비로서 알게 된다.
사랑이 나를 울리게 하네요!
은혜가 모두에게 임하시길 고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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