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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정례법회] 청년법회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원기 106년 04월 03일
설교 : 전성욱 교무님
타이핑 : 박준성
오늘 비가 오고 있습니다. 비가 오니까 좋으신가요 싫으신가요? 벚꽃을 못 보신 분은 비에 벚꽃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답답했던 하늘을 보면서 '아, 오늘 비가 깨끗하게 씻어주겠구나.' 좋아하실 분도 계실 것 같고, '천지 기운 따라 오고 가는 것이지' 하면서 덤덤하실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혹시 진리 소식을 들으신 분은 없으신가요? 그냥 빗소리만 들리던가요? 오늘 원리편 문답을 할 텐데 읽으신 분들은 오늘 일어나는 빗소리와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문답 법회를 하는데 우리가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다 읽고 질문하기. 먼저 질문 있으신 분들은 질문해주세요.
Q. 심현승 교우님
원리편 51장을 보면 '인과가 무서워서 옳은 일을 못 하는 사람은 인과를 모르는 사람만 못 하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모르는 것이 무서워서 일을 못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질문드립니다.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 제5 원리편 51 |
김 홍철(金洪哲)이 묻기를 [공을 위하여 상극의 업을 지으면 그 과보가 어떻게 되나이까.] 답하시기를 [사적으로 상극의 과보는 면할 수 없으나 그 일로 인하여 공중에 큰 공덕이 되었다면 그 공덕으로 인하여 크게 진급이 되므로 그 과가 경하게 받아지나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인과가 무서워서 옳은 일을 못하는 사람은 인과를 모르는 사람만 못하나니라.] |
A. 전성욱 교무님
여러분들은 이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인과가 무서워서 못한 것. 제일 흔한 이야기가 뭘까요? 잘못한 것 보고 이야기 못 하는 것. 왜 못하나요? 그 사람이 나 싫어할까 봐. 내가 지적하면 상대방이 싫어할 것 같아서 무서워서 말 못 하는 것이죠. 자주 있는 일이죠? 누가 침 뱉고 가면 침 뱉지 말라고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한 대 맞을까 봐, 뭐라 할까 봐, 시비붙을까 봐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크게 생각하니까 그렇지 그냥 들여다보세요. 엄청 많습니다. 이것은 인과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근데 그것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요? '어 침 뱉으면 안 돼요.' 바로 이야기하죠? 어떤 결과가 올지 잘 모르니까요. 그럴 때는 차라리 인과를 모르는 것이 더 나은 것이죠. 여기서 취사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옳은 일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비를 봐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과에 매인다는 것은 이해에 매인다는 것입니다.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옳은 일임에도, 시임에도 불구하고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옳은 일이라고 이야기하기가 쉬운가요 어려운가요? 어렵습니다. 시비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지만 이해는 그 사람과 직접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해야 합니다. 시비는 내가 그냥 마음속에서 접어버리면 끝나는데 이해는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두렵죠. 물론 상황 따라 해야겠죠. 덩치가 우람하시고 무섭게 생기신 분한테 이야기하기 어렵겠죠. 그러면 나보다 약한 사람한테만 이야기 해야 할까요? 우리는 법이 있습니다. 법이 있어서 요즘에는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아도 법으로 의탁하면 도움을 받을 일이 있습니다. 도울 일도 있고요. 누가 주차 위반하면 제가 밀어서 옮겨놓을 필요 없이 요즘에는 사진 찍어서 신고하면 됩니다. 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활용하면 되고, 내가 인과 때문에, 돌아올 이해 때문에 내가 옳은 일을 못 한다면 인과를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일을 하고 못함에 있어서 시비를 기준으로 잡으세요. 특히 나와 관련된 일. 내 일만이라도 그렇게 생각해보세요. 다른 사람 관련된 일은 쉽지는 않지만 스스로 판단할 때, 나 혼자 관계된 일인데도 판단의 기준을 시비로 하지 않고 이해로 잡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인과가 두려운 것이죠. 내 일만이라도 시비를 기준으로 잡아보세요. 그게 공부죠. 내 마음공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과를 알자고 합니다. 인과는 진리의 변화된 모습이죠. 그 인과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요. 나타난 모습이죠. 그것을 사실 정확하게 알면 더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까 뭐라고 못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이해로서 내가 저 사람과 싸우거나 무슨 소리를 들을까 봐 못하는 것이지만 진짜 인과를 아는 사람은 그 너머까지 볼 수 있어요. 그 뒤까지 볼 수 있기 때문에 하게 됩니다. 인과를 그냥 내 이해 돌아오는 것만으로 하지 마시고 넓게 멀리 깊게 보고 인과를 알아가야 인과를 무시하거나 놓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의 시비이해를 본다고 하죠? 옳고 그름으로 기준을 잡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특히 공적인 일은 더 그렇습니다.
Q. 이경주 교우님
원리편 9장을 보면 '견성에 다섯 가지 계단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넷째는 보림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되어있어서 어떻게 보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 제5 원리편 9 |
말씀하시기를 [견성에 다섯 계단이 있나니, 첫째는 만법 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이요, 둘째는 진공의 소식을 아는 것이요, 세째는 묘유의 진리를 보는 것이요, 네째는 보림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대기 대용으로 이를 활용함이니라.] |
A. 전성욱 교무님
견성한다고 하면 성품을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옛날에는 '아하!' 하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산종사님께서 다섯 단계로 나눠주시면서 마지막 단계, 대기 대용으로 활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불의 단계입니다. 견성을 아는 것에서 끝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알아서 활용하는 것까지 가는 것입니다. 여기 단계가 있죠. 처음에 하나인 것을 아는 것. 만법 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 진공의 소식, 묘유의 진리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내용입니다. 일원상의 진리가 이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아는 것이 이 단계를 알아가는 것이고, 일원상 서원문에 뭐가 있나요? 이것을 활용하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림 하는 공부를 왜 넣어놓으셨냐,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스승님들 하신 행적을 보면 보림을 꼭 하셨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 대종사님을 원기 3년에 만나러 오셨죠. 그때 대종사님이 무슨 일을 시키셨나요? 토굴로 안내를 하셨습니다. 그때 정산종사님이 오셔서 이미 진리적으로 견성뿐만 아니라 이적이 나타나는, 마음의 힘이 밖으로 나오는 시기이었나 봐요. 대종사님께서 그것을 함축하도록, 흐르지 않도록, 안으로 모을 수 있도록 토굴로 안내를 하셨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공부하다가 하나가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막 알리고 싶지 않으신가요? 내가 알았다고, 내가 풀었다고. 우리 아이들 보면 '엄마 나, 이거 알았어!' 하고 자랑하고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뭐예요? 그러면 그것이 완전하게 알았느냐? 그때는 안 것 같은데 나중 가면 또 모릅니다. 그런 경우 없으신가요? 저는 많습니다. 내가 완전히 안 것 같은데 잊어버립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는 것을 확실하게 다시 응축해야 합니다. 확실하게 알도록. 그것이 보림입니다. 그렇게 해야 다음에도 안 잊어버릴 거에요. 견성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알았다고 해서 내가 이거 알았어! 교당 와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는 아는 것 같은데 조금 이따 물어보면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는 알고 계속 알아서 완전히 뭉쳐서 내 것으로 확실하게 만들어놓지 않으면 잊어버립니다. 깨친 것 같지만, 아닙니다. 그만큼 어려운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경계 속에 노출되면서 다시 옅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빈자리를 알았다. 묘유 자리를 알았다. 하나인 것을 알았다 해도 이것을 응축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흩어지거든요. 그래서 반드시 보림 하셨습니다.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대산 종사님도 보림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림 했다는 이야기를 법문에 해놓으셨습니다. 반드시 보림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법주가 된다. 그냥 내가 아는 거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은 큰 그릇은 못됩니다. 그때 잠깐 유명해질 수는 있죠. 그런데 보림 하지 않는 사람은 놓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큰 스승님들이 반드시 보림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소식을 하나 들었어요. 그러면 감정을 받으라고 합니다. 교당 내왕 시 주의사항을 보면 해오가 있으면 그 감각된 바를 보고해서 감정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감정받고 다시 보림 하는 것입니다. 맞냐 아니냐만 확인하고 다시 보림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을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견성을 하고 나면 보림을 하세요. 감정을 받고 나서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보림. 그래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래야 완전한 내 것이 되어야 대기 대용으로 활용이 됩니다. 완전히 알지 못하면 머뭇머뭇하게 되어있습니다. 자신 있게 말도 못 하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단계를 나눠주신 것이 그 이유에서 보림을 하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Q. 이승민 교우님
길거리에서 침 뱉는 사람을 보면 뭐라고 하고 싶은데 저 사람이 기분 나빠할까 봐 그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례를 들어주셨는데, 저는 바로 말을 해버리는 스타일이고, 석 달 전에 제가 새로 이사한 곳 앞집에 새벽 3시에 드럼을 두드리는 분이 계셨습니다. 외국 분이셔서 대화도 어렵고 인상도 좋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다른 층 이웃들도 드럼 소리로 인해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대화도 통하지 않고 주먹부터 날리셔서 병원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내가 맞기만 하면 안 되겠다 해서 3단 봉을 들고 가서 제가 위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런 일들을 겪었을까 돌아보니까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불편했을 텐데 왜 나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는 부모님이랑 따로 살게 된 지 7년이 좀 넘었습니다. 그래서 잃을 것이 없습니다. 원리편 2장에 보면 '일원상의 원리는 모든 상대가 끊어져서 말로써 가히 이르지 못하며'라고 시작을 해주셨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제게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근처에서 뭐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다 보니까 일시적으로 용기가 생겨서 이런 일들을 한건데, 관계를 끊는 게 진리에 도달하는 쉬운 길이라면, 관계가 없어지면 무엇이 남는지 궁금합니다.
A. 전성욱 교무님
버라이어티한 사건이 있었네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요즘은 직접 해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법이 있고, 공권력이 있습니다. 내가 불편한 거죠? 밤에 드럼 소리가 들리는 것이 불편한 거잖아요. 내가 안 들리게 막거나, 그 사람이 못하게 하는 것이 해결 방법이죠? 그런데 내가 들어서서 폭력으로, 얘기 들어보니까 좋은 말로는 안 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주먹이 날아왔겠죠. 어떤 분쟁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지금 당장 눈앞에서 잘못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최대한 부드럽게, 감정을 놓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지난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해결 방법은 아닙니다. 해결 가능성도 낮고요. 집에서도 보세요. 여러분이 잘못했는데 어머니가 나중에 '너 예전에 그랬었잖아.' 하시면 기분 나쁘거든요. 왜 그때 이야기 안 하고 지금 이야기하냐고 그러거든요. 마찬가지에요. 좋은 말도 아니라면 더욱 그렇겠죠. 그리고 이것은 내가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과 문제가 있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죠. 그럴 때는 그런 것을 해주기 위해서 경찰이 있고 법이 있는 것입니다. 하면 안 되는 법이 있잖아요. 활용하시면 좋겠고. 원문에서 상대가 끊어졌다. 일원의 진공의 체 이야기를 하면서 원리편 2장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 상대를 끊는다는 것은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있는 분별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너, 나, 잘난 놈, 못난 놈, 옳고, 그름, 예쁘고, 못난 것, 좋고, 나쁜 것, 흰 것, 검은 것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들 그러한 관념들을 끊자는 것입니다. 그 관념에 얽매여서 내가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또는 옳은 판단을 못 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진리가 비어있습니다. 진공 자리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신 거예요. 그것이 상대를 끊는 것입니다. 우리 둘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고요. 설마 대종사님께서 관계를 끊으라고 진공 자리를 이야기하시진 않으셨겠죠. 관계를 끊는 것은 이제 나중에 가서 취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원리들을 바탕해서 물론 그럴 수 있겠죠. 관계를 끊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에 연예인들이 당하는 일이 많은지 모르겠는데, 돈이 들어서면, 특히 큰돈이 들어서면 욕심을 놓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일이 자주 생깁니다. 그래서 돈이 관계된 일은 가족 간에도 사실 잘 믿으면 안 돼요. 저는 근본적으로는 맡긴 사람이 잘못했다고 봐요. 그 돈이 있는데 본인이 관여하면서 해야지 그냥 다 믿어버리고 맡겨버려요? 그렇게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 권리가 이미 다 상대방에게 다 넘어가 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취사를 잘못한 거죠. 물론 안타까운 일이지만, 원인관계를 따져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관여했었다면 욕심을 그렇게까지 못 냈겠죠. 그런데 아예 맡겨버리고 놔버렸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그런 일이 계속 생겨요. 그래서 자력과 타력이 같이 가야 합니다. 이제 그런 일이 생겼다.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만약 거기서 원수지자고 달려들면 어쩔 수 없죠. 포기하거나 싸우거나 하겠죠. 싸우면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형제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재산과 관련해서 싸울 일이 생기면 한쪽에서 포기하지 않는 한 싸우고 관계는 끊어집니다. 그런걸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몇 번 봤습니다. 관계를 끊으려면 소송하고 싸우라고 하고, 잘 마무리할 거면 합의를 보고, 그것도 안 되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는 끊어집니다. 특히 돈 문제와 관련된 것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돈이 관계된 문제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습니다. 그렇게 안 했으면 서로 그렇게 관계가 나빠질 일이 없습니다. 분명하게 하면 서로 조심하기 때문에 좋은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죠.
여기서 질문한 것은 진공 자리를 질문한 것이고 상대가 끊어졌다는 것은 구분되는 것들, 그것을 표현하는 말, 생각들을 다 놓아라. 원래 그것은 없는 자리라는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름도, 형상도, 다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근본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깨침의 자리입니다. 깨침이라고 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고, 계속 대조해보면 됩니다. 빈자리를 계속 대조해보세요. 그래서 더 이상 의심이 가지 않으면 깨침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완전한 믿음으로 넘어가서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빈자리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물론 의두연마를 통해서도 하지만 생활 속에서 빈자리를 확인하는 것이죠.
Q. 임도운 교우님
원리편 5장에 삼신불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주셨는데, 법신불이라는 만유의 본체를 바탕으로 보신불과 화신불로 나눠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보신불과 정화신불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 제5 원리편 5 |
말씀하시기를 [법신불이라 함은 곧 만법의 근원인 진리불을 이름이요, 보신불과 화신불은 그 진리에서 화현한 경로를 이름인 바, 화신불 가운데에는 진리 그대로 화현한 정화신불이 있고 또는 진리 그대로 받지 못한 편화신불이 있으니, 정화신불은 곧 제불 제성을 이름이요 편화신불은 곧 일체 중생을 이름인 바, 비록 지금은 중생이나 불성만은 다 같이 갊아 있으므로 편화신불이라 하나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고 바른 때에는 곧 내가 정화신불이요 삿되고 어두울 때에는 편화신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 |
A. 전성욱 교무님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은 다 같습니다.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다만 나타났느냐, 나타나지 않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삼신불과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께서 사용하는 표현이 조금 다르기도 합니다. 위력이라고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법신불을 통해서 나타나는 위력, 그 본체, 법신불이 바탕이라면 거기서 나타나는 본체, 그것이 직접 보이는 것이 화신불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진리는 실체가 없죠? 일원상이 진리의 내용이고 진리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법신불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에서 써왔습니다. 법문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근원, 진리, 그리고 나타난 것입니다. 법문에 불성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직접 만나는 것은 화신불이고,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알아야 할 것은 법신불이죠. 그대로 같은 불인데 나타난 것으로 보냐, 감춰진 것으로 보냐, 근본으로 보냐, 나타난 면으로 보냐의 차이인 것이죠. 화신불에 집중해서 공부를 해보세요. 내가 언제 정화신불이고 언제 편화신불인가. 거기에 집중해서 공부를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Q. 이도상 교우님
10장에 보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본래 청정하나 경계에 따라서 선악의 분기점에서 선으로 가거나 악으로 간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어서 11장에서 보면 중생과 부처의 다른 점을 정산종사님께서 설명을 해주셨는데, 입교하면서 법연으로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지만 건너건너 이야기를 듣다 보면 법연 간의 관계가 꼬여있는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같은 일원의 진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이지만 영겁의 관계라고 생각하더라도 끊어내고 저의 길을 가는 것이 나은지 궁금합니다.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 제5 원리편 10 |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의 분기점이요, 바르게 발하면 정(正)이 되고 굽게 발하면 사(邪)가 되나니 이것이 정사의 분기점이요, 가리움을 받으면 어둠이 되고 참이 나타나면 밝아지나니 이것이 지우의 분기점이니라.] |
A. 전성욱 교무님
손절을 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그 이야기인가요? 우리가 살다 보면 저 사람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 혹은 끊지 못해 산다. 이런 인연도 있습니다. 보통 가족이죠. 또는 직장 내에서 그럴 수 있죠.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계속 봐야 하는, 특히 내가 윗줄이면 상관없는데 내가 밑에 있으면, 내가 약자의 입장에 있을 때는 더 그렇죠. 과연 이것을 내가 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곳을 떠나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제가 이런 예시를 한번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같이 공부하는 예비 교무님이 있었습니다. 전무 출신을 하게 되면 평생 동기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꼴 보기 싫은 사람을 어떻게 같은 기숙사에서 계속 봐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도저히 볼 때마다 성질이 나고 복도 끝에서 오기만 해도 보기가 싫고, 돌아서 가고 싶고, 어떻게 해야 하나 이걸 가지고 상담을 받았습니다. 지도 교무님께서 그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해라. 근데 도저히 마음이 안 났습니다. 미워죽겠는데 어떡하죠? 처음에는 거짓으로라도 해라. 그 마음이 안 나도 옳은 기도는 적을 수 있죠? 어떤 대상을 위한 기도는 적을 수 있죠?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도 적을 수 있습니다. 기도문을 적고 그 앞에 그 사람의 이름을 넣어서 처음에는 그것이 진심이 아니지만, 기도를 계속해봤습니다. 그랬더니 묘하게 마음이 돌려집니다. 나중에는 진짜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고, 관계도 풀어졌습니다. 밉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챙겨주게 되었습니다. 묘하더라고요. 물론 그 기간이 짧지는 않습니다. 한 1년 넘게 걸렸던 것 같네요. 끊을 수 없는 관계라면 해결을 하는 것이 좋겠죠.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심으로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없는 셈 치고 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계속 괴롭다면 해결하는 것이 좋겠고, 만약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도를 하는 것을 권해보고 싶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간절한 기도는 위력이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전달되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그 체험을 했고, 그렇게 체험하고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미신처럼 들리고 왠지 안될 것 같고 그러는데 우리는 한 기운으로 다 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랑 싸우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를 해코지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때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나를 괴롭히려고 존재하는 사람 같고 내 잘못을 보려고 존재하는 사람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입니다. 직장 상사가 맨날 나를 꼬투리 잡으려고 나만 보고 있을 것 같아요? 관심 별로 없습니다. 다만 그일 그일 따라서 하는 것이죠. 그런데 나만 착각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 별로 없고, 있어도 그때 잠깐뿐입니다. 그 사람이 뭐가 있어서 자기 바쁜 일 많은데 나만 고누고 있겠어요. 내 입장에선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불공하면 진심으로 다가가면 열리는 게 있습니다. 물론 직접 대면으로 해서 안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역량 밖이죠. 그럴 때는 멈춰야 합니다. 계속 그럴 때 붙으면 싸움만 나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죠. 그럴 때는 직접 다가가기보다는 진리적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언제 해야 합니까? 심고 시간에 하면 됩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잠깐 하면 됩니다. 끊기지만 않게끔 하면 좋겠죠. 물론 계속 이어가야 된다는 전제하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럴 사람이 너무 많으면 그것도 괴롭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사람부터, 꼭 해야 할 사람부터 하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시면 좋겠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열어주신 진리 불공이 있으니까요. 대종사님이 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런 식으로 해놓으시진 않았습니다. 반드시 되는 불공으로 해놓으셨기 때문에 믿고 하시면 좋겠습니다.
요즘 우리가 손절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 어떤 부부가 서로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까 무심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좋아하는 마음도 두지 말라. 여러분들이 손절할 때 무심으로 하시나요? 손절할 때 마음은 최대한 미운 마음으로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다시 만나게 됩니다. 스스로 불러들이는 거에요. 그래서 정말 안 만나려면 무심으로 해야 하고,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지금 관계 좋든 싫든 그런 관계는 다시 만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에서 공부를 통해서 돌리지 않으면 계속 인연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손절이 답은 아니에요. 지금 당장 현실에서는 도피할 수 있지만, 진리적으로는 답이 아니다. 정말 힘들 때는 손절보다는 피경이라고 하세요. 잠깐 피해있고 보지 마세요. 회사에서 도저히 안 되면 부서를 옮겨보세요. 능력 되면 회사를 옮겨도 좋죠. 다만 그 사람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것을 바꾸고 이런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니겠죠. 손절이 진리적으론 답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 내 능력 밖일 때는 진리적으로 불공 하는 방법을 활용해보시라.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해도 됩니다. 그런 예시 못 들어봤나요? 뭔가를 계속 선물로 줬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돌린 일도 있죠. 어떻게 보면 무식해 보이죠. 하지만 그것이 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권한다기보다는 상황을 보고 내 역량으로 할 수 있나 없나를 보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원리편을 어느 정도 다 읽으셨다고 하니까 여러분이 읽으시면서 정산종사님께 감사한 마음이 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어렵다. 나는 수학 포기자처럼 진리 포기자가 되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신 분은 없나 모르겠어요. 저는 보면서 다시 한번 그랬습니다. 정전을 내주시고 대종사님이 그것을 교의편으로 풀어주시고 또 풀어주셔서 원리편으로 더 쉽게 풀어주시고 대산 종사님께서 또 풀어주셨거든요. 어떻게든 알게 하시려고 이렇게 해주셨구나 하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고, 보면 볼수록 명확해지는 것이 보입니다. 앞에서 들었던 내용을 구분해서 말씀해주시니까 진공, 묘유, 인과 표현해주신 것도 있고 일원상의 진리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한 번 더 새겨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되죠. 진리가 한번 듣고 알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못하죠.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모든 것을 다 확인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인데, 그 근본 원리니까 얼마나 어렵겠어요. 그런데 이것을 어렵다고 포기할 것인가. 어려우니까 안 하실 거에요? 여기 수포자 있으신가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셨나요? 꼭 해야 하는 것을 안 했을 때의 그 결과는 본인이 지는 것입니다. 진리는 어렵지만, 꼭 알아야 하고 이것을 알 때 누구보다 당당하게 재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생사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당장 모르더라도 이쪽으로 방향을 두고 계속 보세요. 이걸 모르면 다른 사람에 끌려서 사는 삶이 됩니다. 진리를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은 완전히 다릅니다. 저도 그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오늘 원리편 여러 가지 질문이 나왔으니까 설명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한번 읽고 그만두지 마시고 더 읽어보세요. 이해가 안 되면 익숙해지기라도 하세요. 수학 잘 못 하는 사람한테 익숙해지라고 하거든요. 익숙해지기라도 하면 어 이거 본 건데 들어본 건데 하면 더 친숙하고 다음에 했을 때 갑자기 알게 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어렵지만 익숙해지고 친해지고 그렇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많이 접해야 합니다. 많이 만나고 읽고 들어야 합니다. 원리편 공부는 어렵지만,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질문했었죠? 용어사전도 한 번씩 보세요. 그때는 알 것 같은 데 조금 지나면 또 잊어버립니다. 계속 보는 거에요 익숙해질 때까지 친해지도록 그렇게 하시길 바라고 진리와 친해지는 여러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은혜롭습니다~^^*
준성교우님~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우와아 감사합니다 준성교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