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기 여름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가을 냄새는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서부터 시작되었다. 남들 다 가는 여름 바다 한번 구경하지 못한 다혜와 나는 모처럼 여행계획을 세웠다. 다혜는 번역문제 때문에 올 여름을 꼼짝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괜히 햇살이 무서워서 바캉스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무공 스님과 함께 태운 살갗은 아직도 검둥이 같기만 했다. "꿍꿍이 없기." 다혜가 여행계획을 세우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꿍꿍이가 뭔데?" "엉큼하게 굴면 안 돼." "신혼여행 가는 거 아니니?" "그럼 안 가겠어." "그런 게 아니고 신혼여행 예행연습 아니냐 이 말야." "고적답사라는 거 있잖아." "가을 바다가 고적이니?" "복작거리는 바다에 가서 바가지 쓰고 못 볼 거 보는 거보단 낫잖아. 아무도 없는 바다...... 얼마나 멋져." "차라리 설악산이나 속리산 같은 델 가는 게 낫겠다." 나는 다혜가 자꾸 바다 쪽을 고집한는 게 못마땅했다. 가을 바다처럼 머쓱한 곳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며 오며 재미지, 안 그래?" 말은 알겠지." "은장도란 말을 아시나요?" "과일 깎는 칼이라고 압니다." "정 못마땅하면 휘 둘러서 곡리산쯤 돌아오면 되잖아." "좌우간 네 고집 꺾어 앉히려면 장가가서 삼 년간 내 피가 마르겠다." "난 시집가겠다고 한 적 없어. 시집가서 얽매이느니 차라리 남의 집 식모살이 하겠다." 나는 다혜의 고집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무슨 짓을 하든 한 번만 꺾어 버리면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훔쳐 버리면...... 그땐 달라지겠지. 아무도 없는 밤바다를 보고 싶어하는 다혜의 마음 속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게 몇 해 동안 바다에 가본 적이 없는 다혜였다. 작년 여름엔 동행하기로 하고 그 난리를 치르느라고 나 혼자 떠났었다. 명식이를 만난 지도 퍽 오래 되었다. 사법고시 이차시험을 치를 때 전화 한 마디만 하고 다시 산으로 기어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외갓집에 가서 번역일을 하며 다혜의 가슴속에 어떤 외로움이 쌓여 이번 여행을 먼저 제안했을 것만 같았다. 몇 장의 편지로 내가 무지무지하게 보고 싶다는 얘기를 전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애절한 낱말을 사용하지 않는 다혜였었다. 남들은 끌어안고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여 사랑하는 걸 확인시키려고 재잘거린다는데 다혜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땐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 거라는, 생기곤 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나는 다혜에게 받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면 때려 주고도 싶었다. "좋아. 오늘 저녁 지도 놓고 내가 코스를 정할게." 나는 끝내 우기지 못하고 다혜 말처럼 여행계획을 세우기로 작정했다. "당장 정하면 되잖아. 내일 아침 떠날 테니까." "알았어. 서점으로 가보자." 우리는 팔짜을 낀 채 복작거리는 거리를 지나갔다. 팔짱 끼고 걷는 다른 쌍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내 녀석이 괜찮다 싶으면 여자애가 쪽박이었고 여자애가 괜찮다 싶으면 사내애가 비리비리해 보였다. 하나님이 머리 하나는 좋은 것 같았다. 쌍꺼풀 수술한 여자애들이 의외로 많았다. 예뻐지는 일이라면 양잿물이라도 마실 것 같았다. 서점 앞엔 사람들이 많았다. 책 안 읽는 나라라는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책방마다 사람들이 밀어닥쳐서 술장사 하던 사람도 담배가게 하던 사람도 모두 책방으로 전업할 순 없을까? 지하다방도 책방으로 변하고 웬만한 큰 건물은 모두 책방주인 것이 될 수는 없을까? 지도 한 장을 펼쳐놓았다. 우리나라 모습이 축소된 지도 위에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미세한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였다. "살 꺼야?" 다혜가 비교적 상세한 지도를 들고 물었다. "돈 내." "지도값이야 천 번을 내라고 해도 내겠다." "마치 애국자 같애." 다혜가 지도를 둘둘 말아들고 앞장 섰다. "난 지도만 보면 혼자라도 일본을 쳐들어가고 싶어." "중공을 먹는 게 훨씬 크잖아?" "광개토대왕 때 땅만 찾으면 되겠지. 그러나 일본은 달라. 송두리째 갉아먹고 싶어." "그럼 찬이가 일본 총독 되는 건가?" "물론이지. 가장 악랄한 총독이 되겠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가장 독한 총독 노릇을 해 보고 싶어." "교과서 왜곡한 애들은 이제 죽었다." 다혜가 손가락으로 목 치는 시늉을 했다. 정중하게 대접하겠어. 동경 네거리에 대형 유리 진열장을 만들어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하고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게 해야지." "제발 그런 생각 좀 그만해. 쪽발이하고 꼭같이 비열해져. 우리가 얼마나 신사적인가를 보여 줘야지."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다혜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쪽발이들한텐 물리적인 방법으로 창피 주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애." "진정해. 우리가 돌아다닐 데는 일본이 아냐. 집에 가서 준비해야지." "나하고 간다는 걸 집에서 아니?" 나는 그게 궁금했다. "몰라." "부모님을 속이면 쓰니? 내가 전화할까?" "어떻게 될까?" "아름다운 사연을 만들어 갖겠지." 우리는 일찍 헤어졌다. 내일 새벽에 떠나려면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배낭과 등산장비를 가지고 가면 훨씬 재미있는 여행이 될 것 같았는데 다혜가 반대했다. 번거롭게 다니지 말자는 얘기였다. 새벽에 집을 나섰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길은 상쾌했다. 안개가 색깔을 품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색깔이 없더라도 좋았다. 향기가 섞여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혜는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간편한 차림새가 경쾌해 보였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작은 여행가방 하나뿐이었다. "누나가 빌려 줘?" 버스 여행을 제안했었다. "어차피 내가 차비를 대기로 했으니까 마찬가지 아냐?" "미안해서 그렇지." "미안한 걸 알면 갚을 기회는 충분해. 맘놓고 갚아." "술 빼놓고 먹는 건 다 책임지겠어." "그건 얌체짓이다." "뭐가 얌체야." "널 먹구 싶거든." "난 식인종하고 여행하지 않겠어." 다혜는 토라지는 시늉을 하며 길 옆으로 내려섰다. 말을 해 버렸으니 망정이지, 나는 밤새 그 생각뿐이었다. 정말 이번 여행이 신혼여행 예행연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바꾸어 놓고 싶었다. "취소할게." 나는 웃으며 소리쳤다. "일본식 취소 아냐?" "아냐. 나의 왜곡을 시임함과 동시에 우방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거야. 쪽발이 애들하군 달라." "그럼 와서 모시고 가." "빌어먹을......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게 이렇게 불행할 수가 있니." 나는 길가에 서 있는 다혜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장난기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장난이라고 판단했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몇 년이 흘러가도 몸에 쌓은 성을 결코 헐지 않았다.수 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한번도 육체를 입술뿐이었다. 그녀는 그래서 나에게 더 신비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하고 바꿀까?" 다혜의 표정은 장난스럽지만 진지해 보였다. "정말 바뀌어 봤으면 좋겠다. 그럼 너도 내 심정을 알 거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남자가 되고 싶어. 그래서 마음 놓고 내 맘 내키는 대로 살고 싶어. 여자에겐 너무 제약이 많단 말야." "여자가 훨씬 무슨 일이든 하기 쉬워. 뭐든 해 봐. 걸리는 게 훨씬 적지." "그럴까...... ."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니?" "무슨 꿍꿍이가?" "그런 것 같애." 내 운전솜씨를 믿으면서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운전을 배워 차를 몰고 다녔기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면 병이란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질주하는 차량들의 속도는 백킬로미터 아워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고속버스는 무섭게 돌진하는 흉기 같아 보였다. 짐을 가득 실은 트럭들도 전속력으로 달리기만 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의 일부 택시 운전사들보다는 그래도 나아보였다. 교통순경이 없다면 서울은 살생의 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달리지 않으면 밥을 먹고 살 수 없게 만들어진 사회도 문제겠지만 먹고 사는 것을 빙자하여 법의 무법지대를 만드는 택시 운전사들의 횡포는 세계 최고가 아닐 수 한번 부딪치면 깡통 밟은 것처럼 형편없이 부서지는 자동차를 만들어 돈 버는 자동차회사도 여전히 떵떵거리면 살고 있다. 그런 걸 감독하라고 대임을 맡긴 당국자들도 코를 골고 자는 것만 같다. 수원을 빠져나와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고속화 도로로 들어섰다. "경부고속도로처럼 잔인하게 누워 있는 도로가 아니어서 좋다." 나는 새로 만든 도로의 깨끗함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운전해 볼까?" 다혜의 제안이었다. "넓고 깨끗한 도로가 나서면 운전해 보고 싶지?" "그런가 봐." 나는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운전대를 다혜에게 맡겼다. 다혜는 선글라스를 고쳐 걸고 조심히 운전대를 잡았다. 품위 있는 차림새로 운전하는 여인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시내에서 가끔씩 마주치는 그런 여인들에게서 나는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결혼하고...... 네가 운전해서 회사에 데려다 주고...... ."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다혜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운전사 월급이 얼만 줄 알아?" "외상하면 되잖아. 그럴 땐 임금체불이라고 하든가?" "누가 결혼한댔어?" "이거 신혼여행 아냐?" "그럼 받아 버리겠어." 들었는데...... ." 우리는 침묵이란 게 싫은 젊은이였다. 들판길과 산길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옆의 경치는 우리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런 곳에 살았으면 좋겠다. 언제나 맑은공기 마시고 언제나 심호흡 좀 하게. 서울이란 덴 심호흡조차 하기 무서운데잖아." "그럼 뭐하러 여태 서울서 살았어?" "글쎄 말이다. 밥 먹으려면 서울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거든. 서울에 주저앉지 않으면 마치 굶어 죽거나 낙오하거나 병신 취급을 받을 것 같았어. 잘난 척하려면 서울에서 살아야 되는 줄 알았지. 촌놈이란 사실이 지독하게 서러웠었거든." 나는 회상에 젖어드는 기분으로 말했다. 삭막한 동토였었다. 서울이 척박한 땅이란것은 지금도 변치 않았다. 치기만만한 젊음 가지고 서울이란 도시를 뚫고 나갈 수는 없었다. 서울은 거대한 괴물 같기도 했고 지옥의 한 모서리 같기도 했었다. "노래에도 있잖아. 아름다운 서울에서 살렵니다." "어쩌면 서울을 아름다운 도시고 만들어 달라는 역설이 아니었을가?" "그럼 서울 구제 호소곡이었나." 자동차는 아산만 둑길을 타고 달렸다. 바닷물과 강물로 갈라놓은 둑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둑 위로 올라섰다. 바다를 막아 뭍으로 만든 인간의 숨결이 담뿍 안겨 있는 방조제였다. 바다는 말없이 출렁거리고 있었지만 인간에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방조제는 몸으로 바다의 아우성을 막고 서 있는 수문장이었다.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지게 만들었다. 다혜의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나는 그녀의 야성을 읽었다. 한번도 다혜의 몸에서 야성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곱고 순결한 여인으로만 내 눈에 익은 여자였었다. 이상스런 복장으로 응원단 일을 할 때도 그녀에게서 야성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옷을 벗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널 갖고 싶다." 나는 바닷바람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다혜가 바닷바람에게 뭐라고 말하려다 말고 씨익 웃었다. "난 동물이고 싶다. 그래서 본능대로 싶어." 메아리도 없는 내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우린 사람이다." 다혜가 내 동물적 본능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동물이다." 바람이 또 그 소리를 안고 나뒹굴었다. 다혜는 내 엉뚱한 표정을 사진기에 담고 있었다. 나는 한없이 넓은 바닷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나 좀 찍어 줘." 다혜가 사진기를 내밀고 계집애처럼, 야성미를 감추고 본능적 여인의 자세로 돌아와 고즈넉하게 둑길에 앉았다. 멈추었다. 이상스럽게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치솟았다. 그녀를 정복할 수 있을까? 내겐 그런 의문점이 생겼다. 시간이 가면 흐트러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꼬장꼬장한 여인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자동 셔터라는 문명의 이기 때문에 우리는 필름 한 통을 다 찍어 버렸다. 그녀의 눈빛이 강렬하게 부딪쳐도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응시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다혜, 우리 뜨거운 거 안 할래?" "입술?" "그래." "대낮에?" "그래도...... ." 조금 더 떼를 쓰면 될 것 같았다. 웬일인지 오늘의 다혜는 눅눅해진 것 같았다. "우린 사랑하잖아." "사랑하고 키스하고 같아?" "표시잖아." "남자들은 여자마다 다 사랑하고 싶은가부다." "나름이지." "미나, 요즘 뭐해?" "차암...... 내가 보호자니? 뭐하는지 내가 어떻게 아니?" "정말 몰라?" "그래." "좋은 앤데." "이거 왜 이래?" 나는 웃었다. 미나와의 입맞춤 때문에 그녀의 가슴에 큰 상처가 남은 것 같았다. 입맞춤 한 번 하는 일에도 다혜는 소독하기를 바랐다. "좋아, 오늘은 그냥 하겠어." 다혜는 미나 얘기만 떠올리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 일에 너무 결벽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난 그녀의 순결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 우린 뜨겁게 부딪쳤다. 그녀의 입술은 뜨거웠다. 둑길 위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지나가던 자동차들이 클랙슨을 빵빵거리며 지나갔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혜의 입술이 이렇게 달콤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뜨거웠다. 다혜의 깊은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느껴보지 못한 대담한 입맞춤이었다. 다혜에게 어떤 변화가 오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의 모든 것을 품쳐가도록 내버려 둘 것만 같은 예감이었다. 그녀의 언제나 차가운 입술이었고 언제나 가벼운 포옹뿐이었었다. 어떤 때가는 인형 같은 여자라고 생각할 정도였었다. 바닷바람이 세찼다. 그러나 다혜는 뜨거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클랙슨을 두드렸지만 우리는 그렇게 둑길 위에서 입맞춤을 계속하고 있었다. "내려갈까?" 내가 먼저 다혜에게 한 말이었다. 내가 물러서지 않으면 다혜는 그대로 서 있을 것만 "그래." 힘없이 대답하고 멎쩍게 웃었다. 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다혜는 바다를 가리켰다. "바다가 육지라면...... ." 마치 노래처럼 그녀가 말했다. "그나마 바다라도 있으니까 다행이지. 지구는 전쟁으로 벌써 망했을 거다. 바닷속에 사는 녀석을도 생각해 봐야지. 사람만 동물이니?" 갑작스럽게 변모한 다혜에게서 나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운전할까?" "그래."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배낭지고 올 걸 그랬어. 내가 밥하고 반찬 만들어서 먹여 "흐흐흐...... ." "왜 웃어?" "짜릿해서 기절하겠다." "정말야. 그런 생각이 든다니까 그래." "대신 다른 걸로 해 봐." "그게 뭔데?" "몰라서 물어?" 나는 능글맞게 말했다. "우리 진짜 신혼여행가는 거야?" "예행연습이란 거 있잖아." "...... ." 다혜는 대꾸 없이 열쇠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내게도 희망이란 게 있겠니?" "자꾸 말 시키면 급브레이크를 우아하게 밟을 수가 있어. 충격에 의한 턱뼈의 찬이한테 있다는 걸 경고하겠어." "외교관 마누라 같다."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나 같은 사내도 외교관이 될 수 있겠니? 꼬부랑 글씨라곤 아이캔 낫 스피크 잉글리쉬밖에 모르는데." "그게 최상의 영어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자동차는 연포가는 길로 들어섰다. 펼쳐지는 시골풍경이 짙게 익어가고 있었다. 익은 벼이삭과 허수아비의 모습이 너무 대조적이었다. 참새떼가 허수아비 등을 탄 채 꽁지를 들까불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나 갈대 좀 꺾어 줘."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다혜가 갈대 우거진 숲길을 가리켰다. "갑자기 갈대가 되고 싶은 거 있지?" "흔들리니?" "흔들리고 싶어." 나는 말없이 숲길로 들어가 갈대를 한아름 꺾어왔다. 트렁크에 갈대를 싣고 한 개를 짧게 꺾어 앞유리 옆에 꽂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나는 다혜가 그렇게 갑작스러운 변화를 내게 보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보드랍다가도 갑자기 날카로워지는 수가 있었지만 이렇게 흐느적거리는 여자처럼 보인적은 없었다. "난 변하지 않았어." "누가 변했대? 무슨 일이 있냐는 거지." "살아 있어." "숨도 쉬고...... ." "옛날 애인 생각하며 신혼여행가는 여자 같다." "그랬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직감이긴 하지만 다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혼기가 찼으니 집안에서 좋은 자리를 주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육자 집안이란 믿을 만한 방패와 유명한 사학재단의 교장선생이란 직함 그리고 다혜의 인물과 졸업장 때문에 더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딴 데로 시집가래니?" "...... ." 다혜는 흘낏 쳐다보고 앞만 쳐다보았다. "말해 봐. 괜찮아." "어떻게 알아?" "짐작도 못해?" "다혠 내 꺼니까 한번도 다른 녀석이 넘보리라곤 상상조차 안 했지. 누가 감히 내껄 넘봐." 나는 괜히 소리를 높였다. "내가 왜 찬이 꺼야?"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너무 자신만만하군. 찬이는 너무 몰라. 내가 그동안 얼마나 시달린 줄 알아? 선도 세번이나 봤단 말야." "뭐라고? 선까지...... ." "날 원망하지 마. 다 찬일 위해서였어." "그게 어째서 날 위한 거니?" "아버지가 찬일 싫어해. 직업도 없고 주먹질만 하고...... 건달을 좋아할 아버지가 "그래서." "내가 왜 취직 않고 노는 줄 알아? 아느냐 말야?" "...... ."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찬이가 직장엘 나가도 우리 아버지 마음은 마찬가지야. 지난 번 그 일이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결혼시키는 문제는 다르다는 양반야." "...... ."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차를 세우게 하고 다혜를 끌어내렸다. "왜 이래?" "지금부터 나한테 말 시키지 마. 혼자 생각해 보겠어." 나는 운전대에 앉았고 다혜는 큰 눈을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힘 주어 밟았다. 속도계의 바늘이 가볍게 올라섰다. "유리 올려!" 다혜는 말없이 유리를 올렸다. 나는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시골길이지만 속도계는 백 이십킬로미터 아워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보처럼 이러지 마!" 다혜의 째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난 살아야 돼. 속력 줄여!" "말 시키지 마." 나는 전혀 엉뚱한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바보!" "그래, 난 바보다." 다혜가 차문짝을 벌컥 열었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혜는 멍청해진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말했다. "말 안 시킬게 천천히 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천천히 몰았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연포 들어가는 입구길은 포장되지 않았다.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돈 좀 있다는 사람이 개발한 해수욕장이라고 들었는데 좀 지나친 것 같았다. 포장할 돈으로 더 중요한 사업을 하느라고 그랬겠지만 포장해서 나라에 기증하는 일도 그렇게 못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하긴 그래야 돈 좀 벌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해수욕장은 을씨년스러웠다. 빽빽하게 느껴졌다. 썩 세련되게 지어진 건물도 왠지 그랬다. 철 지난 해수욕장 풍경은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너무 빼곡하게 지어진 건물들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도 없는 유령의 도시라고나 할까. 어쨌든 우리는 철지난 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민가에 방 하나를 얻어놓고 밖으로 나왔다. "반찬이라곤 해산물이나 좀 준비하쥬 뭐. 후딱 댕겨오쥬." 수더분한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들의 때늦은 여행이 볼썽 사나웠던지 해산물을 사러 바닷가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 풍경, 오후의 햇살이 그래도 따뜻한 바닷가, 해조음이 살풋해 보이는 바닷가, 모래밭의 열기가 그래도 "화났어?" 다혜가 팔짱을 힘 주어 꼈다. 나는 그녀의 체온과 그녀의 옅은 화장내음이 감미롭게 느껴졌다. 바닷가에 묶여 있는 고깃배가 혼자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야산 언덕에 서있는 별장의 색깔이 숲속의 정경을 침식한 것처럼 미워 보였다. 그것이 내 소유의 별장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화났느냐니까?" "안 났어." "아깐 왜 그랬어?" "누가 언제 뭘 그랬는데?" 나는 겸연쩍은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능글맞긴...... ." 그녀는 힘 주어 팔짱을 꼈다. 내 팔꿈치께에 닿는 그녀의 가슴은 갑자기 내 "다시 선 볼래?" 나는 다그치듯 물었다. "내가 도망가지 않으면 또 봐야 할 팔자야." "도망가면 되잖아." "어디로 도망가란 말야?" "우리집으로 와." "난 그러기 싫어. 제대로 결혼해서 살고싶어." "하면 되잖아. 뭐가 무서워? 지금이라도 당장 해 버리면 그만이잖아. 애새끼 하나 낳아가지고 들어가 봐. 별 수 없이 사위자식도 내 자식이다 그럴 테니까." "우리 아버진 그게 안 통해. 그리고 또 그런 자식 되긴 싫어." "넌...... 날 사랑하지 않는 거지?" "이상한 논리다.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아버지의 승락 없이는 못 한다는 거지? 사랑이 약하다고 실토하는 게 낫잖겠니?" "그래, 아무렇게나 생각해. 변명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 우리는 쓸데 없이 말꼬리를 잡고 티격거리고 있었다. 바닷가의 백사장 위쪽에 있는 솔밭은 여름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우리는 솔밭에 앉아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바람을 맞았다.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날 괴롭혔는지 모를거야. 그 얘길 다 하자면 전집 한 질은 될 거야. 어머니는 처음엔 내 편을 드는 것 같더니 시간이 갈수록 달라질 정도야. 상대가 워낙 괜찮다는 생각이 든 거야." 나는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묻지 않아도 상대 남자의 직업은 뻔한 것이었다. 돈을 잘 번다는 부류이거나 사회적 명성을 지닌 집안의 아들이거나 공부 잘해서 괜찮은 자격증 가진 부류일 게 뻔했다. "말해 봤자 뻔하잖아?" "빌어먹을. 네 아버지도 별 수 없는 속물이구나."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우리 아버진 속물야. 그러나 아거 하나만은 잊지 마. 딸을 사랑하는부모의 공통분모 때문이지 결코 사위덕을 보려는 속셈은 아니라는 걸 말이야. 바로 말해서 어느 누구라도 찬이 같은 사내를 사위로 맞고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어. 막말로 하면 건달이잖아. 직업도 없고 일류대학도 아니고 만한 집안도 아니고...... 나더러 심한 소리 한다고 그러지 마. 사회가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도 그런 기준으로 찬이를 보게 되는거야. 물론 나는 결코 그렇게 보진 않아. 찬이 같은 사람은 취직하거나 남 밑에서 일할 성질도 못 돼.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찬이가 내 앞에서만은 보통 사내이길 바래. 난 그걸로 족해. 그 이상을 요구한다면 내가 이런 말도 할 필요가 없어. 단 세속적으로 결혼을 계산에 의해 주판질하며 시집가고싶은 여자도 못 돼. 난 그런 계산이 싫어. 내가 그동안 숨겨온 것은 내가 찬이를 사랑했기 때문야." "알아. 네 맘을...... ." 나는 겨우 이 말을 했다. 다혜의 말은 그른게 아니었다. 사회란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이런 소릴 하는 건 아냐. 그러나 내가 얼마나 갈등 속에 살았는지는 알아 줬으면 좋겠어. 선을 볼 수밖에 없었어. 그건 나를 지킬 수 있는 방패였어. 찬이를 괴롭히지 않고 내가 이 고통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어." "우린 마치 연속극 주인공 같구나." "그럴지도 몰라." 다혜가 소나무 등을 기댄 채 피곤한 눈빛으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처음왔을 때보다 훨씬 멀리 밀려나 있었다. 모래밭이 드넓게 드러났다. 바다 가운데 떠있는 섬 위로 갈매기처럼 보이는 새떼가 날아갔다. "내 맘 알겠어?" 끄덕였다. "방법을 생각했다." 다혜가 또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려앉았다. "내겐 등을 보이지 마. 싫단 말야." 다혜의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나는 갑자기 서러움이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사회적으로 보면 나는 실업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돈벌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을 대접해 줄 리 없었다. 다혜 아버지의 고집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혜 아버질 만나겠어." 몸을 돌려 세운 내가 다부지게 말했다. 다혜의 눈빛이 내 말을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해결하겠어." "바위에 계란을 던지겠어? 아버지 마음은 굳어졌어. 찬이가 만난다고 해서 변할 일이따로 있지. 오히려 더 복잡해지기만 해. 점수를 더 잃는다니까 그래." "결판을 보겠어." "제발 그 성질 쓸 때를 좀 가려 봐. 내가 일년 동안이나 싸워도 바늘구멍 들어갈 자리도 없었어." "그럼 어쩌자는 거야? 헤어지자는 거니? 그래서 그 얘기하려고 여기 온 거니? 네 맘을 이미 결정해 놓고 통보하려는 거잖아. 까놓고 말해 봐. 할 얘기 있으면 다해 봐." 내 가슴 속에 쌓여 있던 응어리가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다혜는 그런 내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아. 그러나 분명한 것만은 알아야 돼." 다혜는 그동안 아버지와 식구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차근차근 얘기했다. 내가 시덥잖은 청년이란 건 내 스스로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통념으로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도 물론 알고 있었다. 결혼이 일정한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부모 입장에선 자식들의 행복을 위해 그 계산을 따라가는 게 정도인지도 모른다. 다혜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동안의 갈등이 얼마나 컸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몇 번인가 맞선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내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무작정 기다린다고 되는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밀고 들어갈 일도 "우리 도망갈래?" "그러긴 싫어."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나, 유학가기로 했어." "뭐라구?"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혜가 내 손을 잡고 따라 일어났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야. 물론 핑계김에 공부도 하고 싶어. 욕심이 지나친지 모르지만 공부를 더해서 무엇이든 해 내고 싶어. 이번에 번역일을 하면서 자신을 얻었어. 이대로 썩지 말고 공부를 하자는 생각과 우선 아버지와 가족들의 성화를 벗어나서 찬이와 내 일을 꼼꼼하게 따져가고 싶어. 일이년 지나면 아버지 생각도 바뀔거야. 그동안 찬이는 무엇이든 찬이의 길을 가지 않겠어? 다혜의 눈가에 물기가 흐르고 있었다. 가늘고 여린 물기였지만 내 가슴엔 커다란 폭포같이 느껴졌다. 가슴이 뭉클하게 떨었다. "정말 갈래?" 내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 ."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 내 가슴 끝에 매달린 흐느낌의 소리였는지 모른다. "우린 헤어지는 게 아냐. 만나기 위해서 잠시 떨어져 있는 거잖아." 결국 그 얘기를 하기 위해 다혜는 여행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다혜가 겪은 고통의 폭이 어떠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얻어내기는 이미 글렀다고 생각했다. 고시공부를 시작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의과대학에 입학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혜 아버지가 깜짝 놀랄 만큼 재벌회사에 취직하여 내 실력이 어떻다는 걸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지금이라도 김갑산 영감을 찾아가면 자리 하나는 맡아올 수 있었다. "정말 가야겠니?" 나는 머언 바다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야 돼. 우리를 위해서야." "내 생각엔 여기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애. 아버지를 만나겠어. 그래서 내가 어떤 놈이란 걸 보여 주겠어." "그건 어리석은 짓야. 얘길 했는데도 자꾸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무슨 짓인들 못하겠니. 부딪쳐 보는 거야." "글쎄, 찬이 맘은 알아. 그러나 찬이가 우리 아버지 기준으로 보면 철딱서니 없는 애숭이일 뿐야. 아니, 내가 보는 찬이는 훌룡한 청년일 수 있지만 내 친구가 보는 찬이는 아직도 어린애일 수 있어.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찬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청년야. 내 눈엔 찬이만한 남자가 없지만 말야. 그걸 왜 모르는 거야. 답답해 죽겠어. 그러나 사회는 그렇지 않아. 사회적 기준이 뭔지 모르지만 찬이는 그냥 실업자야. 더구나 우리 식구들 눈엔 더 형편없는 사내야. 능력도 없고 미래도 불확실하고...... 그걸 알겠어?" 다혜가 지껄이는 말이 이렇게 험한 적은 "네 말은 맞아. 난 아무것도 없어. 가진것도 없고 실력도 없고 취직할 배짱도 없고. 그건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리고 다혜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가. 그런데 네가 유학가는 길만이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은 납득할 수 없어." 햇살이 기울었지만 바다는 뭍보다 밝아보였다. 가을 옷을 입었지만 찬바람은 몸을 스산하게 만들 정도였다. 갑자기 내려간 기온 탓도 있지만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닷바람이 을씨년스러워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바싹 마른 풀밭이었지만 습기가 기어 올라왔다. "여기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나도 장담할 수 없단 말야. 애원하는 부보, 딸자식 언제 꺾일지 모른단 말야. 일년이고 이년이고 공부하면서 우리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잖아. 찬이도 공부하러 올 수 있잖아.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 다혜는 외국 유학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죄다 털어놓았다.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난 유한 같은 걸 갈 주제도 못 되고 갈 형편도 못 돼. 공부를 좀 못해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의 외아들로 이 땅에 남아 있고 싶어." 단 한 번도 외국 유학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계속할 수 잇으리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냐. 그냥 생각해 보란 얘기지." 우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매듭이 풀리지 있었다. 다혜에겐 다혜만이 느끼는 감정의 곡선이 있었고 나는 나대로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어떤 사회든 잠재력이나 개인의 노출되지않은 능력은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결혼문제일 땐 개인의 역량이나 배경을 심각하게 따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어두워지는 바닷가를 걸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유기하에게 정통으로 당할 때 느꼈던 참담한 패배와 또 다른 아픔이었다. 유기하란 중국무술의 고수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할 땐 그래도 다시 대결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의지라도 있었다. 다혜 아버지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의식을 내 힘으로 바꾼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짐작했다. 있는 사내일까? 무공 스님 앞에 서면 내 의식 속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 의식 속엔 내 존재가 엄연한 개체로 살아 있었다. 다혜네 식구들이 의식해주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내는 아니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차려온 밥상은 꽤 정갈스러워 보였다. "밥맛 뚝 했지?" 다혜가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싱싱한 생선을 내 앞으로 돌려놓았다. "밥맛뿐 아니라 살 맛도 없다." 나는 투정부리듯 말했다. "우선 우린 밥을 맛있게 먹은 뒤에 얘길 해 봐." 다혜가 괜히 너스레를 떨고 있는 눈치였다. "정말 갈래?" 나는 첫술을 뜨면서 이렇게 물었다. 다혜가 어슬프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모성애 같은 애잔함을 보았다. 너무 이지적이어서 어떤 땐 여자 내음도 나지 않는 구석을 보이는 여자였었다. "밥부터 먹고 따져. 내가 가는 것과 밥 먹는 건 아무 관계가 없는 거니까." "난, 관계가 있어." "나, 피곤해. 집에서도 피곤하고 나와서도 피곤하고...... ." 우리는 또 말없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오붓하게 밥을 같이 먹는 것도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외국 유학을 떠나서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었다. 가까이 있어도 사랑을 떠나가 버리면...... . 하나님, 어쩌란 말입니까? 다혜를 내 곁에서 떠나 보내시렵니까? 내겐 다혜와 결혼할 자격이 정말 없는 겁니까? 밤의 해변은 칙칙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우리들 마음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파도소리는 낮보다 더 요란스러웠다. 바닷가에 묶여 있는 고기잡이 배는 더 출렁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삭막한 폐가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 같았다.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 같기도 했다. "들어가자." 싫었다. 따뜻해지고 싶었다. 다혜의 가슴을 끌어안고 포근한 숨소리를 듣고 싶었다. "날, 떠나게 내버려 둬." 흩뿌려지는 목소리였다. 다혜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괴로운 마음을 느낄 수는 있었다. 바깥채는 안채와 떨어져 있어서 조용했다. 아마 여름 한철 민박하는 손님을 받기 위해 지어놓은 건물 같았다. 안채는 초가삼간을 지붕만 개량한 것 같았고 바깥채는 시멘트 벽돌로 지은 집이었다. 아랫목에 누운 다혜가 말없이 내 입술을 받았다. "정말 떠날래?" "이미 수속을 다한걸." "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지?" "왜?" "차마 얘기할 수가 없었어. 우리 아버지가 찬이를 그렇게 반대할 줄도 몰랐고 반대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라는 게 창피하기도 했어." "그런 얘기 때문에 상처 받을 줄 알았니?" "응." "난 그 정도로 상처 받지 않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러나 다혜와 결혼하기 위한 방편으로 취직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아냐, 찬인 괴로워했어. 아까 내가 얘길 시작할 때 또 알았어. 그렇게 상처 받을 줄 알았으면 떠날 때까지 말하지 않는 게 좋았을지 몰라." "난 아무렇지 않아." 나는 상처 받지 않았다고 자꾸 우기기만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여자 때문에 찬이가 상처 받는 걸 원치 않아." 다혜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언제나 떳떳한 여자였었다. 밤은 깊어가기만 했다. 수속을 거의 끝낸 다혜가 그냥 떠나 버려도 내겐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혜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코 그냥 떠날 수 없었다는 거였다. "정말 사랑하는 거지?" 내가 물었다. 무엇이든 확인해 두고 싶었다. "맹세할 수 있어." "그럼 네 손으로 옷을 벗어." 나는 다혜를 안아 일으켰다. "그렇게 확인이 필요해?" "난 필요해. 그렇지 않고선 보낼 수가 없어." 어쩌면 내 진심이었는지 모른다. "정말?" "그래." "...... ." 다혜는 말이 없었다. 그녀를 훔칠 수 있다면 그녀의 사랑을 의심치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오늘밤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녀를 훔치고 싶었다. 훔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옷 입고 잘 거야?" "...... ." "난 약속은 지켜. 네가 스스로 옷을 벗지 않으면 결코 널 훔치진 않겠다. 무슨 얘긴지 알겠지." "그렇게 내가 갖고 싶어?" 침울한 목소리였다. "그래. 난 네가 필요해." "그게 사랑의 확인야?" "널...... 뭘로 믿으라는 거지?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육체가 그렇게 중요한 거니? 사랑한다면 말야." "모르겠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나는 흐트러지고 싶어. 내 가슴 속에도 욕망은 꿈틀거린단 말야. 나도 찬이 꺼고 싶어." "그럼 됐잖아. 더 이상 뭐가 필요하단말야?" "모르겠어." 나는 다혜의 웃옷 단추에 손을 댔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었다. "약속했잖아. 차라리 내가 벗겠어." "그래. 네가 벗어." 그녀는 잠깐 내 얼굴을 쳐다보고 피식 웃었다. "정말 벗어야 돼?" "넌 내 꺼니까. 제발...... 나 좀 살려두고 가라. 너마저 없으면...... 난 어쩌라는 거니? 어떻게 살아 있으라는 거니? 생각해 봐. 내가 어찌 견디라는 건지, 제발...... ." 다혜 앞에서만은 어린애가 되고 싶었다. 내가 지닌 자존심이고 내가 지닌 힘이고 그녀 앞에선 아무 위력도 지닐 게 없었다. 차라리 그런 게 귀찮은 것이었다. "모르겠어." 다혜는 청바지를 벗었다. 나는 그런 다혜를 힘주어 안았다. "넌 내 꺼야. 정말 내 꺼야." 그녀는 누웠다. 나는 급하게 옷을 벗고 다혜는 반항하지 않았다. 입술과 숨소리가 꼭같이 뜨거웠다. 내 몸도 모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사랑한다. 정말...... ." 다혜는 뻣뻣한 채 내 입술을 당기고 있었다. 팽팽한 가슴을 감싸고 있는 브래지어를 벗겨 머리맡에 던졌다. 다혜의 가슴은 몹시 뛰고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벗겨 줄까?" 내가 물었다. "싫어." "그럼 네가 벗어." "모르겠어. 정말 이래야 하는 건지." "왜 이래. 날 살게 해 달란 말야." 내 숨소리는 다혜의 뜨거워오르는 몸처럼 다혜는 몸을 수그려 옷을 벗었다. 나도 따라서 마지막 옷을 벗었다. 그녀는 이미 뜨거워져 있었다. 그녀를 더 뜨겁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상처가 우리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만들어 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녀는 차츰 꿈틀거렸다. 차갑던 살갗들도 모두 뜨거워졌다. "안 돼. 제발...... 안 되겠어." 그녀는 몸을 사렸다. 나는 턱숨을 높이며 그녀의 움츠림 몸을 펴려고 했다. 완강해진 다혜의 육체가 금세 굳어 버렸다. "다혜야, 넌 내 꺼야. 이러지 마." "비켜. 안 돼. 이러면 안 돼." "왜 안 돼?" 나는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늦출 수가 "이러면 소리지르겠어." 다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맘대로 해. 누가 뭐래도 넌 내 꺼야." "제발 이러지 마." "난 안 돼." "이런다고 찬이 게 되는 건 아니잖아." "확인해 두지 않으면 안 돼." 아까 옷을 벗을 때의 체념이 아니었다. 그녀는 달팽이처럼 몸을 꼰 채 내 몸짓을 거부했다. "다혜야, 제발...... ." "안 돼." "죽이겠다!" "차라리 죽여." "미치게 하지 마."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다혜의 따귀를 갈겨 버렸다. 다혜가 나뒹굴었다. "차라리 실컷 때려. 이렇게 하면 난 찬이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될 거야. 우린 끝장나는거야. 차라리 때리란 말야, 때리란 말야." 다혜는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둥그런 그녀의 등짝이 드러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다혜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흐느끼는 그녀의 등을 쳐다보며 도대체 이 여자의 성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넌 욕망도 호기심도 없니? 네가 여자니? 네가 사람이냐구?" 나는 흐느끼는 그녀에게 이렇게 퍼부었다. "나도 여자야. 다 주고 싶어. 그러나 지금은 안 돼. 결혼할 때까지만 참아 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를 억지로 훔칠 수도 있었다. 혈을 짚어 눕히면 그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찬인 힘으로 꺾을 수도 있어.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난 시체가 되어 있을 거야." 다부진 말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녀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래, 졌다. 옷 입어라." 나는 그녀의 물기 가득한 빰에 입을 맞추고 나왔다. 어둠이 깔린 바닷가로 뛰어나갔다. 아직도 팽팽해 있는 내 아랫도리의 욕망을 끌 수가 없었다. 마구 내달렸다. 물 빠진 모래밭으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해수욕장 끝까지 달렸다. 텐트촌으로 넘어가는 물길까지 달려가서야 욕망은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견딜 수 없게 밀어닥치던 욕망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찬바람 결에 마른 모래밭은 냉기로 가득했다. 나는 길게 누워 거친 숨을 토해 내기만 했다. 한참만에 나는 다혜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힘없이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은 몹시 지쳐 보였다. "미안해. 그러나 난 찬일 사랑해. 우리 사랑을 지키려고 그러는 거야." "알아. 나도 지킬게." "그럼 됐어. 들어가." "내일 서울로 올라가자. 난 밤이 무섭다. 오늘은 맹세를 해도 내일 밤은 나도 또 모른단 말야. 이놈의 욕망이란 놈은 맹세 가지고 안 돼."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밤이 다혜는 무릎을 꿇고 내 입술을 더듬었다. 차가운 입술이었다. "정말 우린 영원히 같이 있게 될까?" 내 목소리가 떨렸다. "영원히 같이 있기 위해 우린 지금 상처를 받는 거야. 오히려 이게 우리를 묶어 주는 힘이 될 거야." 우리는 낮에 하던 것처럼 길고 뜨거운 입맞춤을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였다. 차가운 밤바람과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뿐이었다. 우리는 밤을 이렇게 지새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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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09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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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안당
08.05.09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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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찬이땜에 마음이 아프네요~감사합니다
미혜
08.05.10 08:37
사랑을 한다면 모든것 다주어도 아깝지 않은데 ! 지켜주는것도 사랑이껬지요!!
새처럼
12.09.03 17:03
좋은글 김사헤요 ^^^
그리운남촌
14.08.27 13:04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18.06.20 17:31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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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총찬이땜에 마음이 아프네요~감사합니다
사랑을 한다면 모든것 다주어도 아깝지 않은데 ! 지켜주는것도 사랑이껬지요!!
좋은글 김사헤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