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재일동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보금자리로 발전해 나간 오사카교회는 1935년 제8회 공동의회에서 최초로 장로를 장립했고 신축 중이던교회 건물을 완공해6월20일 입당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조선교회는 대수난기를 맞게 된다. 1941년 일본기독교단 가입을 전제로 하여 교회 명칭을 동부교회로부터 히가시나리교회로 강제 변경되었고 교회 내의 각 기관명도 변경되었으며 2월부터는 일체의 기록을 일본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토지와 건물도 일본기독교단에 강제 기부하게 조치되었고 2월2일 전인선 목사 위임식이 거행되고 5월13일 교회 창립자인 김의생 집사도 귀국하고 영 선교사도 캐나다로 강제 추방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조선교회가 일본 땅에서 겪어야 했던 고초는 이루 다 말할수없는 것이다.
이윽고 1945년8월15일 해방이되자 조선교회는 11월15일에 공동의회를 열어 교토교회에서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해 강제로 가입되었던 일본기독교단 탈퇴를 가결했다. 이후 오사카교히는 재일대한기독교회로 개칭된교회 조직에 속하여 간사이 지역을 대표하는 동포교회로서 구심점 역활을 담당해왔다. 1969년 성전신축실행위원회를 조직한 뒤 1970년에는 재일한국기독교회관과 협력하여 교회건축 토지를 구입했고 이듬해 입당에배와 재일한국기독교회관 개관식을 거행했다. 유신독재 시대가 열리던 1973년2월에는 3일간 지명관 교수를 초청해 특별 전도집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1979년에는 보육원까지 준공하여 오사카교회를 중심으로 사회선교와 교육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오사카 지역 동포들의 영혼의 안식처로 더욱 굳건한 자리를 다졌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