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조 金遠祚 (1884~1922)】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에서 활동"
1884년 6월 5일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현 이천시) 율면(栗面) 총곡리(叢谷里)에서 태어났다. 김원조(金元祚)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천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에서 활동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전신(前身)으로 알려져 있는 대한군정부는 1919년 10월 대종교(大倧敎)와 신민회(新民會)의 주도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과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가 통합되어 확대 개편된 조직이다. 그런데 같은 해 12월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변경하는 조건으로 정식 인준을 받았다. 임시정부에서는 남만주(南滿洲)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구분하여 대한군정서를 주로 북로군정서라고 칭하였다. 개편될 당시 총재(總裁)는 서일(徐一), 총사령관은 김좌진(金佐鎭), 참모장은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은 김규식(金奎植), 여단장은 최해(崔海), 연대장은 정훈(鄭勳), 연성대장(硏成隊長)은 이범석(李範奭) 등이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대한군정부 즉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의 연락기관을 서울에 설치하기 위하여 1920년경 다시 국내로 파견되었다. 본격적으로 연락기관을 설치하기에 앞서 먼저 서울을 중심으로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이하영(李河永)·최기녕(崔箕寧) 등과 함께 사전 논의를 진행하였다. 1920년 4월 이래 윤홍선(尹弘善)·허원(許垣)·이정호(李定鎬)·김정덕(金貞德)·김필한(金弼漢)·구영석(具榮奭)·이원혁(李原赫) 등과 함께 서울 시내의 부호(富戶)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9월 12일 오후 7시경, 이하영·최기녕 등과 협의하여 서울 낙원동(樂園洞)에 있는 신완식(辛完植) 집으로 가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신완식이 협력하지 않자, 미리 양초를 종이에 싸서 가짜로 권총처럼 보이게 만든 것을 내보이며 협력을 종용하였다. 그 결과 그 자리에서 현금 120원과 추후 2만 원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는 차용증서를 받아냈다.
1921년 2월 10일 오후 6시 30분경에는 허원·윤홍선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들과 함께 서울시내 황금정(黃金町, 현 을지로 일대)에 있는 조필윤(趙弼允)의 집으로 가서 경찰서에 다닌다고 알려져 있던 이종호(李鍾浩)에게 미리 맡겨둔 독립문서 2천 장과 현금 5만 원을 내어달라고 종용했다. 그 자리에서 현금 15,090원과 물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다음날 2월 11일 이종호는 허원을 찾아가 자신이 만주 지린(吉林)으로 가려고 하니 여비로 현금을 좀 내어달라고 하여 50원을 도로 받아갔다. 실제로 어떤 경위로 문서와 자금을 사전에 맡겨두었는지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종호가 직접 허원을 찾아간 것으로 보아 사전에 알고 지낸 것은 분명한 듯하다.
1920년 (음)12월 28일 경기도 이천의 자택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3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이른바 ‘강도사기·가택침입·장물수수 등의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윤홍선·허원·이종호 등과 함께 공판에 넘겨졌다. 같은 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장기간의 취조와 모진 고문으로 인해 1922년 4월 15일 41세의 나이로 형무소 내에서 사망하였다. 옥중에서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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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조의 군자금 모집 활동 보도(『매일신보』 1921. 3. 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