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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계친구들 원문보기 글쓴이: 김윤상
오늘은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한 고려말~조선초 왕실사찰이었던 '양주 회암사지 유적'을 찾았다.
양주 회암사지 유적은 지금은 폐사되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이지만, 고려말~조선초 최대의 왕실사찰이자 대표적인 선종사원 유적이다. 1997년부터 2019년까지 13차 발굴조사를 통해 약 70여 개의 건물지가 확인된 중심사역과 회암사를 중흥으로 이끌었던 고승들의 기념물로 구성되어 있다. 회암사지 문화재구역의 면적은 약 1만여 평이며, 고승들의 기념물을 포함한 문화재보호구역의 총 면적은 98,000평에 달한다.
회암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과 중국 사신의 방문기록을 통해 12세기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고려말(1374~1376) 공민왕의 왕사 나옹(1320~1376)이 인도 승려 지공(?~1363)의 말씀(회암사의 산수 형세가 천축국(현재의 인도)의 나란타사와 같으니,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다)에 따라 262칸으로 중창하여 현재와 같은 규모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왕사 무학(1327~1405)이 머물며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자주 행차하였으며,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 궁실을 짓고 머무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효령대군(1396~1486), 정희왕후(1418~1483), 문정왕후(1501~1565) 등 왕실 인물들의 대대적인 후원으로 크게 융성하였으나, 16세기 말 화재로 소실되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주 회암사지는 1964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지공, 나옹, 무학의 부도 및 석등, 비석 등을 포함한 4개의 보물 및 4개의 경기도 유형문화재가 있다. 이러한 유적들을 보기 위한 오늘의 투어 코스는 회암사지박물관 - 회암사지(문화재구역) - 회암사(기존 사찰)를 차례로 둘러 보았다.
▶ 사적 : 양주 회암사지(1964.6.10 지정)
▶ 보물 : ①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2021.6.24), ②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1963.9.2),
③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1963.9.2), ④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1963.9.2)
▶ 경기도 유형문화재 : ①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1974.9.26), ②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1974.9.26),
③ 무학대사비(1974.9.26), ④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비(2004.11.29)
양주 시립 회암사지박물관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2012.10월 건립)
회암사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 '202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는 역할을 하였다.
*** '세계유산'과 '세계유산 잠정목록'이란? ***
'세계유산'이란 유네스코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탁월하고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유산을 말하는데, 이러한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위해 유네스코에 제출하는 예비목록으로 세계유산 등재 신청 최소 1년 전에 유네스코에 제출하여야 하며, 잠정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유산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없다.
토수는 건물 지붕의 네 모서리에 씌웠던 장식기와를 말한다. 지붕끼리 만나는 부분에 위치한 목재가 비바람에 부식되지 않도록 내부가 비어 있는 사각뿔 형태로 만들어서 끼웠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하늘을 향해 한껏 고개를 젖힌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용두는 용의 머리 부분을 표현한 장식기와이다. 지붕 끝을 향해 내려오는 마루(내림마루) 위에 놓아서 기와가 아래로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다.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잡상은 건물의 내림마루나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장식기와로,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잡상은 사다리꼴 모양의 고정판 위에 서있으며, 고정판 중간에 구멍을 뚫어 마루 위에 올린 다음 못으로 고정했다. 건물의 품격에 따라 설치하는 개수가 다르지만 한 면에 설치하는 개수는 반드시 홀수로 정해져 있다.
봉황무늬 기와
봉황은 상상 속의 신비한 새로서 봉은 수컷, 황은 암컷을 가리킨다. 봉황은 새 중의 으뜸으로 여겨졌으며, 한 번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왕가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봉황무늬는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봉황의 고상하고 품위있는 모습이 왕비에 비유되었다.
회암사에서는 용무늬 기와와 함께 봉황무늬 기와가 왕실의 상징물로서 일부 건물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회암사의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용무늬 기와
용은 실제로 존재하는 여러 동물의 특징을 결합해서 만든 상상의 동물이다. 「본초강목」에서는 용의 모습에 대해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발바닥은 호랑이를 닮았다.'고 표현했다.
용은 수호의 능력과 귀신을 물리치는 역할을 갖추고 있어 위엄과 권위를 상징한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왕실을 제외한 곳에서 용무늬의 사용을 금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암사지에서 여러 종류의 용무늬 기와가 출토된 점으로 볼 때 당시 회암사의 위상이 높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린 장식품
상상 속 기린을 만든 작품으로 눈, 코, 입과 뿔이 도드라진 두상이 인상적이다. 흔히 외모나 성품, 능력이 남달리 뛰어나고 총명해 촉망받는 젊은이를 가리키는 말로 '기린아'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계의 기란아'와 같이 쓰여 어떤 분야의 '촉망받는 아이(젊은이)'를 뜻한다.
기린 장식품
상상 속 기린을 만든 작품으로 눈, 코, 입과 뿔이 도드라진 두상이 인상적이다. 흔히 외모나 성품, 능력이 남달리 뛰어나고 총명해 촉망받는 젊은이를 가리키는 말로 '기린아'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계의 기란아'와 같이 쓰여 어떤 분야의 '촉망받는 아이(젊은이)'를 뜻한다.
양주 회암사지(터)
1964년 사적 제 128호로 지정된 회암사지는 1997년부터 2019년까지 13차에 걸쳐 사찰의 중심 권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왕실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도자기류와 기와류 등 귀중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 최대의 사찰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연못지
규모는 동서길이 15.7m, 남북길이 12.7m의 동서로 약각 긴 방형이며, 깊이는 1m 내외로 작은 크기의 잡석을 이용해 불규칙하게 쌓았다. 남쪽 부분이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전체적인 구조 및 형태는 확인이 가능하다. 천보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회암사지 내부의 지상 및 지하로 배수되어 사역 외곽 남서쪽의 연못으로 흐르도록 설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계단식으로 된 회암사지엣 인증샷
당간지주
화암사지 당간지주는 현 위치에서 좌측으로 15m 거리에 있는 담장 지대석밑에 쓰러져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81년에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다. 원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아마도 회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당간지주는 2개가 세트를 이루어 하나로 구성되기 때문에 본래 2쌍으로 모두 4주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1주는 전하기 않는다. 그래서 현재 세워진 당간지주는 3개밖에 보이질 않는다.
우물지
규모는 지표에서 내부 바닥면까지의 깊이가 8m정도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부분의 깊이는 약 5.3m정도이다. 최상부 석축부분의 직경은 2.8m이며, 우물의 하부는 자연암반을 약 2.4m 정도 파내고 암반 위에 6각으로 목재를 결구하여 약 0.9m 정도의 높이로 3단을 쌓았다.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 보물 제2130호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원하여 건립한 진신사리탑으로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양호하며, 사리탑의 형식과 불교 미술의 도상, 장식 문양 등 왕실 불교 미술의 여러 요소를 알 수 있는 귀중한 탑이다. 1974.9.26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6.24 고유의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2130호로 승격되었다.
회암사지 후미의 높은 곳에서 촬영한 회암사지(터)
양주 천보산 회암사
회암사는 회암사지 왼쪽 끝부분에 입구문이 있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700m(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다.
회암사 입구
대웅전
선종 계통의 절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신 본당을 '대웅전'이라 하며,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절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금당'이라고도 한다. 일부 절은 특별히 모시는 부처나 보살이 따로 있고, 그에 따라 적광전이나 극락전이 금당이 되기도 한다. 화엄종 계열은 '적광전', 법상종 계열은 '미륵전', 정토종 계열은 '극락전'이 금당이 되어 사찰의 성격을 나타낸다.
삼성각
우리는 예로부터 산악 숭배 관념이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일찍부터 신성한 곳으로 믿어지는 산에 제사를 드리고, 산에는 산신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전통신앙의 산악 숭배가 사원 내부에 자리잡은 것이 삼성각, 즉 산신각이다. 눈여겨 보면 절의 가장 뒷쪽, 산쪽에 가깝게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와 모조비
고려 말 고승 선각왕사 나옹(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말 유학자 이색이 짓고 권중화가 써서 왕사가 입적한 이듬해(1377년, 우왕 3) 건립한 비로 1963년 보물 제387호로 지정되었다. 특이한 것은 비신과 머릿돌인 이수가 별개의 돌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1997년 천보산에서 발생한 불로 보호각이 불에 타면서 비신이 심하게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복원한 후 경기도박물관을 거쳐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비신을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 있으며, 1999년 원래의 위치 앞쪽에 원형을 본 따서 만든 모조비를 세웠다. 위치는 회암사 대웅전의 왼쪽 약 100m 지점의 언덕에 세워져 있다.
무학도사비와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조선 초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 자초(1327~1405)의 행적을 담은 비로, 그의 생애와 업적, 중건비를 세우게 된 경위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조선 개국은 물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데 큰 역할을 한 무학대사를 왕사로 책봉하고, '묘엄존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비문은 조선 태종 10년(1410)에 왕명에 따라 변계량이 글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세워졌으나 1821년(순조 21)에 비가 인위적으로 파괴됨에 따라 1828년(순조 28)에 다시 세워졌다. 비의 총 높이는 340cm이며, 비석은 높이 223cm, 폭 89.5cm, 두께 28.5cm이다. 현재의 비 우측에 최초의 비석에 사용되었던 석재를 사각 받침석 위에 연꽃잎 형태의 지붕을 올려 보존하고 있는데 비신은 사라지고 없다. 위치는 회암사 대웅전의 오른쪽 약 100m 지점의 언덕에 세워져 있다.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은 1326년(고려 충숙왕 13)부터 약 2년간 고려에 머물면서 당시 불교사상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의 승탑과 석등이다. 부도는 불교에서 스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승탑이라고도 불린다. 석등은 어둠을 밝혀 준다는 조명의 역할 이외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불가의 중요한 상징돌이다.
*** 선사(禪師) ***
선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에서 법사(法師) 다음으로 많이 쓰는 호칭 중 하나이다. 선사는 수선사(受禪師)의 준말로 높은 깨달음에 이른 고승을 부르는 말이다. 법사(法師)는 불법에 정통하고 청정한 행실로 세간의 모범이 되어 중생을 교화하는 스님을 높여 부르는 호칭으로 전법사(傳法師)의 준말이다.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고려 후기의 승려인 나옹의 승탑과 석등으로 나옹선사는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로 인도 고승 지공선사를 따라 국법의 정맥을 이어왔으며, 1376년 우왕의 명을 받아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승이다. 위치는 무학도사비 약 50m 뒤(위)쪽에 있다.
무학대사탑(보물 제388호) 과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무학대사탑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의 승탑이며, 무학대사비에 적힌 기록을 통해 대사의 업적을 기리려고 1407년(태종 7)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무학대사탑은 조선 전기 부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지공선사와 나옹선사 부도와 같은 구형 부도형식의 예에 속하지만, 8각의 석단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부도를 봉안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중심에 세우고 그 주변에 석단을 마련하는 것은 이전 시기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형식이다.
무학대사탑 앞의 쌍사자 석등은 무학대사탑과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으로 무학대사탑 앞에 세워져 있다. 위치는 무학도사비 약 50m 앞(아래)쪽에 있다.
무학도사비 일대의 유물 답사를 마치고 사진의 우측 하단 데크길을 따라 회암사로 되돌아 나왔다.
청동금탁
금탁은 건물 추녀 끝에 매달았던 작은 종 모양의 금속 장식으로 풍탁, 풍령이라고도 한다. 몸체 아래에 걸린 구름 모양의 풍판이 바람에 흔들리면 몸체 안쪽의 부속구를 움직여 맑은 소리를 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풍경의 상단부분이다. 금탁을 만들 때 제작을 후원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겉면에 새겼는데, 명문을 통해서 1394년(태조 3)에 무학대사, 태조 이성계, 신덕왕후 강씨, 의안대군 이방석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회암사의 어느 건물 처마 밑에 달려있는 풍경(금탁과 풍판) 소리를 들으며 오늘의 투어를 마친다. 마치 회암사의 옛 번창했던 영광을 함께 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