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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4:1-28
▣ 돌에 맞은 바울-사도행전 14장-
본 장은 제 1차 전도 여행을 완료한 내용을 기록한다. 잘 된 지도를 가지고 이 여행을 추적해 가면 좋겠다.
1. 선교사들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함(14:1-20)
복음이 전파되어 믿는 사람이 생긴 곳에서는 어디나 분열과 방해가 있음을 알게 된다(요 7:43/요 9:16/요 10:19/눅 12:49-53 참조). 그러나, 반대가 있다고 해도 바울과 바나바를 멈추게 하지는 못하였다. 이들은 그 성에 머물며 계속해서 전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허락하심으로써, 이들의 믿음을 영화롭게 하셨다 이러한 기적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명했으며(고후 12:12), 유대인들(고전 1:22)과 이방인들에게(롬 15:18-19)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을 돌로 치려는 음모가 드러났으므로, 이들은 루스드라와 더베로 떠나 그곳에서 말씀을 전파하였다(마 10:23 참조).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널리 알려진 절름발이를 고치는 큰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을 비교해 보자.
-두 사람 다 절름발이를 고쳤다-사도행전 3장 1-8절 / 14장 8-12절
-두 사람 다 사단을 사칭하는 사람을 처리하였다-사도행전 8장 18-24절/ 13장 4-12절
-두 사람 다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벗어났다-사도행전 12장 5-10절 / 16장 25-29절
-두 사람 다 죽은 사람을 살렸다-사도행전 9장 40절/ 20장 12절
-두 사람 다 특이한 기적들을 행하였다-사도행전 5장 15-16절/ 28장 8절
이방 거민들은 이 기적을 통해 바울과 바나바를 지상에 임한 그들의 신(神)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Zeus, 쥬피터-신들의 우두머리)라 하고, 바울은 “허메“(Hemes, 머큐리-신들의 사자)라고 하였다. 그 지역의 “쓰스“의 사제는 이들에게 제사를 드릴 준비를 다 갖추었으나,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이들을 중단시켰다. 바울은 군중이 모인 이점(利點)을 살려 말씀을 전파했다. 바울이 회당에서 했던 것처럼 구약 성경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근거하여 이방인들과 더불어 이성적으로 추리해가고 있음에 유의하자. 이 짧은 설교를 바울이 아덴에서 행한 멧세지와 비교하고(17:16-34) 슥 로마서 1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그의 진술을 살펴보자. 자연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방인들을 “핑계하지 못하게“ 한다.
그의 멧세지는 거절당했고 백성들은 바울에게 돌을 던졌으며, 죽은 줄 알고 버렸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들을 주도하여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게 했던 일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후에 바울은 “한 번 돌로 맞고“라고 썼으며(고후 11:25),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그는 자기의 몸에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고난의 “흔적“ 또는 표시를 가졌다고 언급했다. 어떤 이들은 이 때 바울이 실제로 죽었으며 기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이라고 믿어, 바울의 “삼층천“ 경험이 이 때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제안한다(고후 12:1-4). 몇 년이 지난 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고난을 상기시켰다(딤후 3:11). 디모데가 이 때에 그리스도께로 개심했을 가능성도 있다(행 14:6/행 16:1)."
행 14:21-24
2. 선교사들이 교회들을 확립시킴(14:21-24)
복음 전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격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인도하신 곳이면 어디나 바울이 지교회를 세운 이유가 이것이다. 지교회는 신자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영적인 음식을 얻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발견하며, 봉사의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좋은 복음 전도적인 기관들과 프로그램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대부분의 지교회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으면 내일에 가서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용감하게도, 선교사들은 그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던 도시들로 되돌아 왔다. 이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는 생명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명성을 얻은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행 5:26).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영적인 도움과 인도를 필요로 하는 귀한 새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했다.
이들이 있던 도시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에서 160마일(약 257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고향을 다시 방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제쳐 두었다. 또한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를 통과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참된 헌신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였다. 헬라어에서 “임명하다“는“인기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다“와 “지명하다“는 뜻의 이중의 의미가 있다. 분명히 사도들은 최선의 후보자들을 선출하였고(딤전 3:1-/딛 1:5- 에 자격이 나옴), 그리고 전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투표를 하였다. 이 방법은 마땅한 방법이다.
성경에는 주교나 대주교 또는 추기경 등 “영적인 성직자“에 대한 말은 없다. 디도서 1장 5절과 7절, 그리고 사도행전 20장 17절과 28절을 비교한다면 “감독“과 “장로“라는 용어가 같은 직분으로서, 목사의 직분을 가리키는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이 여행에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지도자들에게 인수하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이것은 그들에게 시험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라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계시킨다(딤전 5:22). 영적인 지도자는 초신자, 즉 새로 입교한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딤전 3:6)."
행 14:25-28
3. 선교사들이 본교회에 보고함(14:25-28)
선교부나 교파별로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법적인 면 또는 기술적인 면을 지원할 수는 있으나, 최종적인 책임은 지교회에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신자들에게 보고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일을 하도록“ 파송한 사람들이었다(13:2/14:26/15:38 참조). 이 첫선교사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하는 모임은 얼마나 축복된 것이었을까!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하늘로 돌아가신 후에 “계속해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행 1:1). 그러므로 이 일은 사실상 주님이 하신 일이다.
제 1차 선교 여행을 고찰해 보면 바울이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준수했던 근본적인 원리들을 볼 수 있다. 성령께서 바울의 사역을 인도하셨으며, 이 원리는 오늘날 우리도 따라야 할 중요한 원리이다.
주요 도시에서 일함-대개의 경우 바울이 일한 곳은 여러 지방에 있는 주요 도시였다. 바울은 고립된 구석에 '자신을 묻어 둔 것“이 아니라, 인구가 많은 중심지들을 공격하였다.
지교회들을 설립함-그의 사역은 중앙 사령부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시키면 되는 “1인 체제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영혼들을 지도자가 있는 지교회의 구성원으로 조직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는 뜻이며, 또한 믿음으로 육성한다는 뜻이다. 이 일은 다음과 같은 일을 이끌어 낸다.
신자들에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침-바울은 선교사의 직책이 스스로를 무용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훈련하여 그들이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결국 어느 지교회에 속한 100명은 한 명의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의 100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를 알고 있다!
10년 후에 로마서를 쓸 때에(15:19/15:23) 바울은 전 지역이 복음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었을까? 그는 개심자들을 얻어 지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데살로니가전서 1-2장에서는 또다른 예를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선교 기관“의 슬픈 결과를 추수하고 있는데, 이 기관에서는 “백인“(白人)이 모든 일을 다 했으나 피선교인으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전도하도록 하는 데는 실패했다.
우리의 목적은 복음화하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하면, 복음을 들을 최소한 한 번의 기회를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에게 준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는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 번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대해서 들을 수 있게 기회를 주어야 할 빚을 지고 있다.
바울은 인쇄, 신문, 라디오 방송국이나 TV, 비행기, 또는 우리가 대단히 필수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적인 장치들을 하나도 가지지 않고도 로마 세계를 복음화하였다. 과학의 기적을 이룬 오늘날에는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가!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다.“"
행 15:1-41
▣ 예루살렘 회의-사도행전 15장-
1. 안디옥에서의 의견 충돌(15:1-2)
하나님의 사역이 진전을 보이고 있을 때는 언제나 사단이 반대를 시작하며, 대개는 거짓말을 이용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영향력이 없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 마귀의 “종교적인 거짓말“을 믿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어떤 바리새인들이(5, 24절) 안디옥에 와서,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모르면 그들의 구원이 무효하다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다. 물론 바울이 그렇게 전한 것은 아니었다(13:38-40).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과 논쟁을 했으며 결국 이 문제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가져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것은 순전히 자발적인 결정으로서, 지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교단적인 성직 계급“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상,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나님께 분명한 명령을 받았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에 보면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고 했는데,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여“ 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인도하심을 받아“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의 프로그램에서 이방인의 지위를 단번에 모두 확정짓기를 원하셨다.
이방인 신자들이 혼돈을 일으키기에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가를 명심하자. 이들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구약적 가르침에 빠져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이방인들의 구원의 역사는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이를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로 받아들였다(행 11:18). 이 시대에는 소식이 신속하게 전해지지 못했으므로,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알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진지했으나,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6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는 했으나 불완전한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었지만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알 수 있을 만큼 진전을 보지는 못했다. 이들이 “거짓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불완전한 복음“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행 15:3-21
2. 예루살렘에서의 심의(15:3-21)
이 전략적인 협의회에는 최소한 네 차례의 모임이 있었던 듯하다. 즉 바울과 그 일행을 환영하는 교회의 공식 모임(행 15:4)과, 바울과 핵심 지도자들 간의 개인적인 심의회(갈 2:2), 강력한 유대 분파가 자신들의 주장을 제시하였던 두번째의 공식모임(행 15:5/갈 2:3-5)과 최종적인 적절한 결정을 내린 회의(행 15:6)들이다. 갈라디아서 1-2장을 주의깊게 읽자. 이 부분은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베드로가 일어나 연설을 하기까지는 논의가 진전을 보지 못한 채 계속되었다.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의 출현이 바울과 그의 이방인에 대한 사역을 지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베드로후서 3장 15-16절에도 바울을 지지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베드로의 마지막 말이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연관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회상하며(행 10-11장), 오순절날 유대인들에게 임한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친히 이방인들을 용납하셨음이 분명하다고 강조하였는데, 이 이방인들은 믿음(15:9)과 은혜(15:11)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11절에서 그가 한 말에 유의하자. “우리가(유대인)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노라.“ “그들이 우리의 방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베드로는 율법이 이방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모세와 할례“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라는 멧세지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바울과 그의 일행이 증거하였는데 하나님이 이방인들 중에서 역사하신 일들을 보고하자, 반대하던 의견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다음으로 야고보가 발언권을 얻어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베드로를 대신하여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15장 14-21절에 나오는 야고보의 말은 이 시대의 하나님의 계획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은 무엇인가? 주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들 중에서 한 백성을 뽑아내시는 중이었다. “뽑아낸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이고, 신약 용어로는 “교회“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은 같은 바탕에 서 있다. 그리고 “첫째는 유대인에게“란 프로그램은 이제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왕국에 대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야고보는 아모스 9장 11-12절을 인용하여 이에 답한다(15-17절). 그는 이방인들이 불러냄을 받는다는 것이 아모스의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약에서 예언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말은 이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모스의 말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이방인들의 수가 충만히 찬 후에 그리스도는 돌아오셔서 다윗의 집(장막은 “집“ 또는 “가족“을 뜻함/ 삼하 7:25-29)을 다시 세우실 것이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왕국을 창설하실 것이다.
로마서 9장 29-33절과 11장 1-36절을 읽고 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하여 바울이 설명한 바를 알아보자. “이방인의 충분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눈멀게)된 것이라“는 로마서 11장 25절이 관건이 된다. 그런 다음에 교회는 휴거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땅을 회복하게 되고, 7년 동안의 환란이 임한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정결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는 다윗의 보좌를 회복하기 위하여 돌아오시게 될 것이다."
행 15:22-35
3.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대표단(15:22-35)
이 심의회는 이와 같은 결정에 동의했으며, 이방인 교회에 회의 보고를 편지를 써서 바울과 그의 일행 편으로 보냈다. 이 권고는 보다 우월한 기관에서 내려보내는 “공식 교리“가 아니라, 영적인 사람들이 성령으로 인도를 받아 결론을 내린 지혜로운 제안이었다. 25절과 28절을 비교해 보자. 이 금지령은 또하나의 다른 “율법“이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유대인들과의 관계에 도움을 주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창 9:1-5 과 비교).
바울과 그의 조력자들이 이 보고서를 본 교회에 가져간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는 데에 이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던가? 이들은 복음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던가? 그들은 돌아오자 전 교인들을 만나 보고하였고 그들은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기뻐하였다.
오늘날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 사항을 좀처럼 순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비극이다. 사도행전의 앞 부분에 나오는 베드로를 따르며 “왕국의 도래“를 추구하는 교회들이 훨씬 많다. 다른 교회들은 “베드로와 바울을 섞으며“ 율법과 은혜를, 이스라엘과 교회를 이상하게 합성한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빼앗아 베드로에게 주는 일“을 멈추어야 할 시점에 와 있으며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은 사도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지자인 사도 바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포된 저주가 있다(갈 1:6-9). “현대주의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게 분변되지 못하고 왕국의 진리가 교회의 진리와 섞여 있는 교회들에게 이 저주가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행 15:36-41
4.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논쟁(15:36-41)
형제들이 교리적으로는 일치하면서도(12절) 인사문제에서 뜻이 같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바나바는 마가와 친척 관계이기 때문에 일종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바울은 이 젊은이를 낙제생으로 보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둘 다 지나치게 가혹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나중에 마가를 용납했으며(딤후 4:11), 하나님은 두번째 복음을 쓰는 데 마가를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사역하고 있는 동안 베드로가 올라와서 이방인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다시 토론을 했다. 갈라디아서 2장 11-21절을 읽고 바나바조차도 “그 부류에 휩쓸려 들었음“을 주목하자. 바울이 그의 두번째 여행을 출발할 때 실라를 선택했던 이유도 이런 데에 있었다. 실라는 충성된 종이었다(15:22/15:32). 하나님의 종들 사이의 차이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이 위축되게 할 필요는 없다. 고린도전서 12장 5절에는 “행정(역사)의 차이는 있으나 주님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 16:1-40
▣ 빌립보에서의 바울과 실라-사도행전 16장-
1. 새로운 조력자(16:1-5)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의 선교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끊고 각기 새로운 조력자들을 구하였다(15:36-41 참조). 바울이 아는 한에 있어서 마가 요한은 낙제생이었다. 그러나, 바나바는 마가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이 젊은이에게 기회를 또 한 번 주고 싶었다. 사람들이 교리적인 면에서는 일치하면서도 실천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15:12).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유감스럽게 여기지만,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들의 실수조차도 관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라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으며(15:22) 선지자였다(15:32). 그는 안디옥에서 바울과 함께 사역에 참여하였으므로, 서로 낯선 사이가 아니었다. 마가 요한을 대신하여 들어온 디모데는 바울이 그의 1차 선교 여행중에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구원받은 젊은이였다(14:6-22). 디모데는 아마도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당한 고난을 목격했을 것이며(딤후 3:10-11),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적합함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디모데는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 바울은 그를 가리켜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나이가 많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젊은 신자들을 “양자“로 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본향으로 부르실 때에 그 자리를 메울 사람들은 누구일 것인가?(딤후 2:1-2 참조)
디모데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와 외조모에게서 양육을 받았다(딤후 1:5/딤후 3:15). 교회의 선지자들은 환상으로써 이 젊은이가 위대한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딤전 1:18/딤전 4:14). 빌립보서 2장 19-23절은 디모데가 빌립보에서 바울과 함께 얼마나 충성스럽게 봉사했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디모데의 할례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갈 2:1-4). 또한 회의의 결정 사항에 불순종하는 행위도 아니었으며(행 15:1-),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거침이 되는 돌을 옮겨 놓는 것이었다(고전 9:20). 디모데는 이방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그는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다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유대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행 16:6-12
2. 새로운 기회들(16:6-12)
지도를 보고 6-8절에 언급된 장소들을 찾아보자. 바울과 그의 일행은 그들이 있던 곳에서 말씀 사역을 하였으나, 성령께서는 그들이 동쪽의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6절의 “아시아“란 흔히 알고 있는 거대한 아시아 대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소아시아라고 알고 있는 지역이다. 그런데, 만일 바울이 동쪽의 비두니아로 가서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유럽보다 동양이 먼저 복음을 받았을 것이며, 오늘날 그들이 선교사들을 파송했을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였다. 사도행전은 참으로 “성령의 행전“이며, 성령은 사도들의 생애를 통하여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한 환상을 보이셔서 에게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가도록 지시하셨다.
어떤 이들은 환상 중에 나타난 사람이 누가(사도행전의 저자)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10절에서 “그들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의사 누가는 드로아에서 그들과 합세하였다(20:6-7 참조)."
행 16:13-40
3. 새로운 그리스도인들(16:13-40)
빌립보는 주전 4세기에 그 지역을 정복한 마세돈 출신 빌립의 이름을 따서 붙인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의 식민지들은 사실상 이태리에서 떨어져 있는 “작은 로마“였다 ! 사람들은 로마의 법과 관습을 따랐으며, 회당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곳 빌립보에서 바울이 세 종류의 다른 죄인들을 만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을 본다.
마음이 열려진 신앙심 있는 여인(13-15절)-바울은 여인들의 기도모임에 참석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사역을 시작한다 ! 루디아는 부유층의 상인으로서 이방 우상 숭배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으로 변화한 여자였던 것 같다. 하나님은 바울이 유럽에 가도록 문을 열어 놓으셨을 뿐아니라 루디아의 마음 문을 열어 놓으셨으며, 그녀는 구원을 받았다.
그녀는 자기의 가족과도 멧세지를 나누었으며 그들 역시 구원을 받았다. 바울이 세례(침례)를 받은 새로운 이방인들을 얻었다는 사실은 그가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사명을 성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젖먹이가 세례(침례)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 “가족“이란 단어는 말씀을 이해하고 믿어 구원을 받고 나서 세례(침례)를 받은 가정(그리고 노예들)의 구성원들을 말한다.
귀신들린 여종(16-18절)-바울과 그의 일행은 루디아의 집에서 살면서 그녀와 함께 기도 모임에 갔다. 사단은 언제나 주님의 일에 반대하려고 다가오며, 이번 경우에는 노예 소녀를 사용하였다. 그녀의 말이 마치 주님의 일을 증진시키려 하듯이 사도들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하게 나타난 것에 유의하자. 사단은 빛의 천사들처럼 다가와서 아첨을 하지만 그리스도는 복음을 진흥시키는 데 사단의 도움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이 증언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바울은 그것을 중지시켰다. 그 다음 부분을 보면 뱀같은 사단은 사자처럼 되어 사도들을 감옥에 집어 넣는다.
마음이 굳은 사람(19-40절)-로마 간수가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무정한 관리였음을 상상하기는 그리 힘들지 않다. 바울과 실라가 굴욕을 당하고 얻어 맞기조차 했으나, 이 간수는 이들을 깊숙한 감옥에다 던져 넣고 발을 착고에 채워 둠으로써 고통을 더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일을 보러 갔으며 드디어는 밤이 되어 잠을 잤다.
그러나, “하나님은 밤에 찬송을 주신다“(시 42:8/시 77:6). 바울과 실라는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 이 모임은 참으로 놀라운 간증이 아닐수 없다 ! 한밤중에 하나님께서 역사하러 임하셔서 감옥을 흔드셨으므로 모든 죄수들이 결박에서 풀려났다. 만일 간수가 죄인을 놓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된다는 뜻이 되므로, 깜짝 놀란 간수가 자살을 기도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자 같은 살인자인 사단이 다시 일을 벌인 것이다. 만일 바울이 그를 불러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간수는 죽어 지옥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의 마음에 와 닿았으며, 그 간수는 회심하였다.
이 구절은 이른바 “가정의 구원“이 문제로 대두되는 구절이다. 부모가 구원을 받았다고 자녀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유아나 믿지 않는 자녀들은 세례를 받아서는 안된다. 구원의 약속은 그의 가정 모두에게 해당된다(31절). 말씀이 온 집안에 전해졌으며(32절), 모든 집안의 식구들이 세례(침례)를 받았다(33절). 그런데 이것은 모든 집안이 믿었기 때문이다!(34절) 유아들이 “믿을 것이다“는 상상만으로는 안된다.
간수는 사도들의 상처를 닦아 주고 자기 집에서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진실로 개심하였음을 입증하였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마음을 열 때에 그의 가정도 마찬가지로 열려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35-40절에 나오는 바울의 행위에 의혹을 일으킨다. 바울이 그 일을 공개적으로 처결하여 로마 관리들을 난처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다만 자기의 로마 시민권과 법적인 권리들을 사용하여 복음과 그가 세운 새 교회를 온당히 존중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조용히 그 마을을 벗어났다면 모두들 그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교회의 사역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대의명분을 증진시키는 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법적인 관리들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러한 법적인 권리들을 박탈당했었으므로, 이 공식적인 사과와 공개적인 해결은 복음과 교회에 위엄(威嚴)을 가져다 주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언제나 친절하였다.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읽어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교회의 핵심은 한 부자여인과 노예소녀와 로마의 간수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택하사 능력 있는 자들을 당황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