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동에서 네려 은평의 문화를 살피러 가던중 큰길에서 옛지명 兩千里골 있던곳에 표지판을 보았다.
이 표지는 북으로는 의주 남으로는 부산동래로 각각 1000리로 양천리로 불리어 왔으며 조선조의 교통요충지로
의주로 가는 연천대로변에 있어 각종 문서를 전달하는 파발로 또는 사신들이 거쳐가는 사행로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 솔새님의 상세한 설명으로 무심히 보았던 돌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연서역 사진 인터넷
한양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 의주로 가는 의주로(義州路)의 첫 역이 연서역(延曙驛)이다.
역은 국가가 전국의 교통요지에 말을 관리하여 국가 업무에 이용하게 하는 제도이며 말(馬)을 갈아타는(睪)
곳이 역(驛)이라고 한다.
연서역 가까이 능양군이 아버지 정원군에게 물려받은 별서가 있었다.
이 별서에서 쿠데타의 모임이 있었단다. (솔새님 설명 )
지금은 연서역의 흔적은 없고 세워둔 표지석에 관심을 가지는 이도 적은 것 같으나
연서역 터에는 자동차 정비업소와 세차업체가 자리잡고 있어
옛날에는 말을 다루고 오늘날은 자동차를 정비하고 딱는 곳이라하니 (인터넷 설명)
아마도 이 터는 말이나 자동차나 움직이는 기동력으로 한 몫하는 장소인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해군 대위 헤밀턴 쇼
해밀턴 쇼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조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한 후 서울 수복작전의 선봉장으로 진입하다가
인민군의 총을 맞고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쇼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양화진에 묻혀있고
어머니는 선교활동을 하며 숭덕고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부인께서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나오시고 연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봉사하시고
장남은 서울대 법대교수로
둘째 아들도 한국에서 자란 한국을 너무나도 사랑한 가족들이다.
인터넷사진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한다며' 비를 제작함.
비문에는 자기의 한국 친구들을 위해 별세한 고 미국해군대위 서위렴2세 전사기념비라 새겨져 있다.
또한 역사적 참배현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은평구 녹번동에 은평평화공원을 조성하고
고인의 동상 제막식을 거행하며 공원의 이름도 은평평화공원으로 명명하였다.
이 비의 어록은 지금 우리가 읽어도 가슴이 찡하다.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 후 평화시에 선교사로 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나도 한국 사람입니다.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진 인터넷
인조별서유기비는 '인조반정비'라고도 불리는 기념비로 16대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이곳에 머무르면서
광해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
표제는 조선 19대 숙종의 어필로 '인조대왕용잠지시별서유기비'라고 쓰고 뒷면 음기(陰記)는 숙종의
어제를 동평군 이항이 쓰고 있어 가치를 더해준다
우린 그늘에 앉아 기욱님께서 사주신 언 커피 설레임을 맛있게 들면서
솔새님께서 인조반정에 대한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실을 자세하게 말씀해주시니
더운 줄도 모르고 한 낮을 아주 잘 보냈어요.
( 기욱님, 솔새님 많이 감사했습니다.)
수국사
1459년(세조 5) 세조는 어린 나이로 죽은 세자 덕종(德宗)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왕 명의로 창건하여
정인사(正因寺)라고 하였다.
총 119칸이며
이 절의 설계는 화엄종의 고승 설준(雪峻)이 맡았는데, 법당에서부터 방앗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단청의 아름다움 또한 빼어나 그 아름다움이 봉선사(奉先寺)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1472년 사월초파일에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크게 실시했는데, 이때 여러 대승경전을 간행하였는데
이날 오색구름이 일고 이상한 향기가 절 주위에 가득했으며, 서기가 하늘로 뻗쳤다고 한다.
이 절의 역사는 잘 알 수 없으나 그 뒤 불탔으며 남은 건물도 퇴락하여 폐사 상태에 이르자
1900년 초 월초거연(月初巨淵)이 고종의 도움을 받아 다시 중창하였으며
1995년 주지 한자용(韓慈容)이 법당 안팎을 금으로 개금한 황금보전을 신축하였다.
(솔새님의 해설과 네이버 인터넷 설명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멀리서 본 수국사의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모습 햇살이 비칠때는 황금빛이 더둑 찬란하게...
금빛찬란한 수국사 대웅전
이 안에는 밖에보다 더욱 금빛인 부처님들이 모셔져 있어 눈부시게 찬란한 부처님을 우러러 뵐 수 있었다.
우측에는 늠름하게 잘생긴 균형잡힌 수국사의 지장전
오! 아름다워라 .
금빛 문창살과 처마 밑 조각품등이 일품인 우리나라 건축물 .
미륵불 아주 큰데 제가 부처님 키를 콱 줄여 드렸습니다. 내 눈높니에 맞게...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에 ...뜨거운 대낮 넓은 마당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지긋이 눈을 감고 중생을 살피시는 부처님
돌 조각품이 생동감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이 나무 부처님을 보고 넘 보고 싶어 불광동을 달려 갔으나 보지 못해 서운하다
아마도 산에 있는 나무같다. 얼마나 귀여운 부처님이신가 이 부처님 맨 살을 만지고 싶었는데.
죽은 나무의 살아있는 생명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두손을 모으기보다는 안아드리고 싶다.
의젓하신 수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 13세기 - 14세기 조성 추측
( 난 법당에 들어가 이렇게 늙은 나이에도 금빛 찬란한 불상을 뵈옵는 이 영광된 날을 감사했다.)
불상에서 느껴지는 중량감 넘치는 건장한 남성적인 형태미는 고려후기 귀족풍의 단정하고 아담한 형태미를
추구했던 하나의 조류와는 또 다른 불교조각의 흐름과 미의식을 알려 주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고 한다.
중후한 얼굴과 건장한 형태미 그리고 이중으로 입은 착의법과 자연스러우면서 특징 있는 옷주름 등에서
13세기에서 14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이 유사하다고 한다
수국사가 갖고 있는 중요한 유형문화재인 불화들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종교 이상이다. 종교를 떠나 우리 고유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교의 내용을 그린 ‘불화’는 단지 종교화가 아닌 전통미술로 볼 수 있다
(위 사진 ) 극락구품도
구품도는 1907년 강재희가 황제 폐하이하 태자, 영친왕, 의친왕 부부를 위하여 조성한 불화구도법을
사용하였고 민화를 연상케 하는 배경과 채색 등이 왕실발원 불화로서의 품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위사진 ) 수국사현중도
이 불화는 화폭이 270cm에 달하는 대규모의 신중도로서, 섬세한 필치, 안정된 색조와 금니의 사용,
균형잡힌 인물표현 등에서 왕실 발원 불화로서의 품격이 잘 표현되어 있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위 사진) 수국사감로도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화면은 산수와 구름으로 잘 경계 지워져 있고,
풍속화적인 면이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위 사진) 16 나한도
석가모니삼존과 16나한을 묘사한 불화로서
19세기말 ~ 20세기초반 서울, 경기지역의 팔상도, 나한도, 구품탱
또한 이 그림은 왕실 발원의 불화답게 금박과 금니의 사용이 많이 보인다.
위 사진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이 책은 수륙무차평등재(수륙재), 곧 물과 땅에서 죽은 고혼들을 달래기 위해 평등하게 공양하며
재를 올릴 때의 의식절차를 요약한 의례서
(위 사진) 수국사 아미타불도
이 불화는 구 한말 왕실 발원 불화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 능숙하고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며 구한말 화승인 보암긍법과 두흠, 봉감
등그린 작품이다.
(위 사진) 수국사 현왕도
왕실의 안녕과 황제 등의 수명장수를 위해 조성, 봉안되었다.
현왕을 중앙에 두고 권속을 좌우로 배치하여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금니의 사용과 조화된 채색,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문양, 철선묘의 안정적인 필치 등이 뛰어난 작품.
즐거워라 역사탐방 세련되고 멋있는 여친들과 함께
젊음은 갔어도 더 알차고 보람있는 앞날을 위해 우린 이렇게 싱그러운 푸름속에서 역사 공부를 하고 건강도
챙긴답니다.
2015년 8월 15일 미사리강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