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클리드의 <원론>
유클리드는 열 가지 이상의 저작을 남겼는데 그 중 다섯 가지는 거의 완전한 원본으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무래도 그의 <원론 Elements>일 것 이다. 이 경탄할 만한 저작은 그 이전의 모든 원론들을 망라하고 있다. 사실 유클리드 이전에 또 다른 역작이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그것은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유클리드의 단순한 인용과 명제의 번호들이 그대로 하나의 특별한 정리나 작도로 이용될 정도였다. 성경을 빼놓고 어떤 책도 이 <원론>보다 널리 연구된 것은 없으며 아마 어떤 책도 과학적 사고에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없을 것이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1482년에 초판이 인쇄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1천판이 넘을 정도로 인쇄되었으며 2천년 이상 기하학의 교과서로서 군림해 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클리드의 <원론>은 기하학뿐만 아니라 수론과 약간의 (기하학적)대수의 내용도 담고 있다. <원론>은 열세권의 책으로 되어 있고 모두 465개의 명제가 수록되어 있다. 일반 고등학교 기하학 교과서의 내용은 주로 <원론>의 제Ⅰ, Ⅲ, Ⅳ, Ⅵ, XI, XII 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초기 그리스 수학자들에 의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의 하나는 틀립 없이 공준적 사고의 창조일 것이다. 연역적 체계안에서 한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 명제가 보다 이전에 입증된 어떤 다른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유도되는 필연적 결과임을 보여야 하고 다시 여기에 사용된 명제도 그 이전에 이미 입증된 또 다른 명제로부터 유도되어야 하고, 계속해서 이 과정이 반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무한히 계속할 수는 없으므로 처음에 증명없이 인정해야 하는 어떤 유한 개의 명제를 약속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명제 B로부터 A를 추론하고, 다시 명제 A로부터 명제B를 추론하는 회귀현상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이 최초에 가정된 명제를 '공준' 또는 '공리'라고 부르는 데 그 밖의 모든 명제는 이것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명제들이 배열되었을 때 그 논리는 공준적 형태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유클리드의 <원론>의 형식체계가 그 다음 세대에 준 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그후로는 이 작품이 엄격한 수학적 논증의 한 모델이 되었다.
유클리드가 <원론>을 처음 썼을 때 공준과 공리로서 택한 명제가 무엇인지, 또 정확하게 몇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후세의 <원론> 번역자들이 그것을 다소 수정하거나 가감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클리드가 다음 열개의 명제 ─ 다섯개는 '공리(axiom) 혹은 통념, 다섯개는 기하학의 '공준'(postulate) ─ 와 통치인 명제를 가정했었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있다.
A1. 동일한 것과 같은 것들은 모두 서로 같다.
A2. 같은 것에 어떤 같은 것을 더하면 그 전체는 서로 같다.
A3. 같은 것에서 어떤 같은 것을 빼면 나머지는 서로 같다.
A4. 서로 일치하는 것은 서로 같다.
A5.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P1. 한 점에서 또 다른 한 점으로 직선을 그릴 수 있다.
P2. 유한직선을 무한히 연장시킬 수 있다.
P3.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하고 그 중심으로부터 그려진 임의의 유한 직선과 동일한 반경을 갖는 원을 그릴 수 있다.
P4.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P5. 한 직선이 두 직선과 만날때 어느 한 쪽에 있는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은 무한히 연장될 때 그 쪽에서 만난다.
◆유클리드 이후의 그리스 수학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또 가장 위대한 고대인 이었던 아르키메데스는 포물선(곡선)과 그 현(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인 포물선 구적에서 그리스 특유의 엄밀한 논법으로써, 오늘의 적분학의 기초에 관련되는 생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원기둥과 구의 문제도 훌륭한 업적이며, 역학에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와 더불어 기원전 3세기의 수학에 있어서 3대거인이었던 아폴로니우스는 그를 위대한 기하학자로 불리게한 <원추곡선론>에서 원뿔의 절단 자국으로서의 원추곡선을 논하고 있다. 이 방면은 <원론>에는 빠져 있는 분야로서 후세의 해석기하학에서 2차곡선론이라고 불리는 것의 대부분을 해석기하학의 방법을 방불케하는 생각을 써서 거의 대성하고 있다.
기원전 212년에 아르키메데스가 로마의 병사에 의해 살해 당하고, 그 이후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를 병합하고 지중해를 제패하였으나, 그리스 과학의 꽃인 수학은 그로부터 오히려 시들기 시작했다.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강탈하기는 했으나, 제대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수학 분야에서는 번거롭기만 한 5진법의 로마 숫자만 남겼을 뿐 독자적인 성과를 거둔 일이 거의 없었고, 단순히 피정복국인 그리스, 이집트, 카르타고 등의 문화를 흡수하고 모방하는 일에 그쳤다. 그리스에서 창출된 수학의 전통은 로마에서는 질식하고 말았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전쟁으로 학문에 대한 열기는 식었지만, 그래도 알렉산드리아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동서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항해술이 필요해지자 천문학과 삼각법의 연구가 왕성해졌다. 오늘날 각도를 나타내는 60진법도 삼각법에 도입되었다.
당시의 천문학자로는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B.C.280) ,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히파르쿠스(Hipparchus. B.C.150)등이 활약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있으면서 하지날 정오에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여 지구의 크기를 측정해냈다.
또, 고대에서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인 히파르쿠스는 천문학을 위해 삼각법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는 오늘날의 삼각함수표에 해당하는 것을 만들었고, 구면천문학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천문학에 관한 뛰어난 그리스 저작은 15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rolemy)에 의해 쓰여진 <수학대계>이다. 이책은 이후 아라비아인들에 의하여 번역되면서 <알마게스트, Almagest>로 알려졌으며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문학의 표준서로 간주되어 왔다.
당시는 그리스의 이론적인 수학과 동방의 실용적인 수학이 함께 어울린 '공존의 시대'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수학자로는 삼각형의 넓이에 관한 '헤론의 공식'으로 유명한 헤론(Heron, B.C.250∼150), 그리고 기호를 도입하여 수의 이론(=정수론)과 방정식(주로 1,2차 방정식)을 연구한 '대수학의 아버지' 디오판투스(Diophantus)를 꼽을 수 있다.
그 외에 시들해진 그리스의 기하학 전통에 다시 불 붙인 <수학집성, Mathematical Collection>의 저자 파푸스와 주석가인 테온의 딸 히파티아(Hypatia)가 있다.
641년에 이르러 알렉산드리아 학교가 아라비아인들에 의하여 불질러지므로 결국 길고 긴 영광의 그리스 수학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