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1:11~24)
‘내가 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한 행위에 관해
여러분이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핍박했고 파괴하려고 했습니다.’(13절)
교회를 핍박, 박해하던 바울.
어떻게 그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정반대의 사람으로 만드셨을까?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의 주인공으로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을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
물론 가장 확실하고
이해하기 쉬운 정답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저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답변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궁금한 것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다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바울이 선택받을 만한 이유를
바울로 제한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힘을 기울이셨지만
바울에게도 보통의 사람과 다른
어떤 ‘자질’이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편에 있는 사람,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
거기서 시작해서 쭉 올라가면
공통점이 ‘진지성’,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순수한 열정’인 것 같다.
방향성이 문제이지만
방향을 바로 잡아주면
그 누구보다도 정해진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바울은 자신이 확신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에 다가가다 보면
역설적인 생각이 스친다.
예전의 바울처럼 하나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이에게조차
하나님께서는 가능성을 발견하신다면,
핍박과 박해자보다 더 가능성이 없는 존재는 누구일까?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소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최소한 바울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내부에 로마의 가치와 이념이 박혀 있어서
그대로 행동했다.
그의 내부가 하나님의 진리가 박히자 또 그대로 행동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더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으로 회개하도록 노력하시지만
최소한 바울을 선택한 것과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겉은 어떤 가치를 따르는 척하나,
속은 세속의 권력과 돈,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
겉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척하나,
개인의 권세를 교묘히 추구하며
교회와 성도를 이용하는 사람.
세상 권력자로서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척하나
그 권력으로 마찬가지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바울처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겉으로는 다소 거칠게 보이더라도
자신의 내적동기에 의해서 철저히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최소한 내부와 외부를 일치시켜야 하는 작업은 불필요하다.
그리고 내부와 외부를 일치시키는 작업이야말로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돌이키게 하기 힘든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많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럴 가능성이 없는 다양한 죄인들에게는
오히려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수용성을 베푸신 반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세상 권력자, 기득권자, 무엇보다 교회와 진리를 앞세우면서도
개인의 가치, 세속적 영광을 추구하던
제사장, 율법학자, 종교인들을 경계하신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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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몸과 마음이 조금 부담? 또는 무거운 느낌이 있다.
오랜만에 일종의 행정업무,
단국대 산학협력단의 연구과제 마무리에 참여한
약간의 부담감이 있고
나의 거친(?) 신앙적 가치관이
여러 군데에서 부딪힌다는 느낌이 마음에 남아
생각을 거듭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 상습적 죄성까지 더해져서 다소 흐린 오늘의 날씨처럼
기분도 그렇다.
그래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항상 느껴져서
위로함과 비뚤어지지 않게 작용하시는 사랑이 있어서
참 감사하기도 하다. 그런 두 가지 다른 싸움이 늘 있다.
나는 좋은 선택을 하기 힘든 자질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쪽으로, 염치불구하고
견뎌 나가는 생활이다.
어제 수연이가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선정되었다는
좋은 소식이 집안을 좋은 에너지로 휘감았다.
수연이가 자신과 집의 일로 –우리가 모르는, 묻지 않은-
우리 집에 연속으로 약 3주 정도 머물렀다.
표면적으로는 여러 가지 우리와도 마찰 요소가 있을 수 있었지만
그저 품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확신해서,
최대한 따뜻하게 대해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수연이의 마음이 열리고
신앙적 얘기를 꽤 깊은 수준까지 나누었다.
수연이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고
-어른 앞이라 그렇게 얘기했을 수도 있으나,
그의 표정과 여러 가지 오감으로 판단해도 그런 것 같다.-
바로 어제 카톡 이모티콘 작가가 되는
물리적 축복이 이어졌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다.
어쩌면 그렇게 타이밍도 딱 맞춰서
그런 선물을 주시는지.
특히 믿음이 강하다 할 수 없는 수연이에게
적절한 ‘절묘함’을 극대화시켜서 그렇게 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에게
가시적 기적을 더 많이 부여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도 축복이 있었다.
수연이의 일 자체도 축복이지만
수연이 영혼에 대한 사랑이 배가되었기 때문이다.
새삼스럽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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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그저 하나님 따라 가면 다 좋은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신 것처럼
저도 타자에게만큼은 더 섬세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감동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먼저 제 주변과, 제가 참여하는 모임부터
그런 실천을 기울이게 해주소서.
아무 관련이 없는 이에게는 쉽게 그런 마음이 작동하지만
오히려 어것 저것 상호작용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장애물이 되는 모순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 용서하시고 저를 바로 잡아 주시옵소서.
소망이와 지현이, 현영이와 수연이를 특별히 지켜 주소서.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가장 귀한 사랑을 알고 행하게 해 주소서.
정환이 항상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지극한 평안과
하나님과의 내밀한 사귐 안에 있을 줄 믿습니다.
바라옵기는, 완전한 치유를 통해
저희와도 세상의 많은 이들과 함께 할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길 원합니다. 도와주소서.
맡겨진 세상 일에도 충실하게 임하게 해 주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