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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앙아카데미에서 발행하는 맘울림 에서 퍼온글임을 밝혀 둡니다.
이 글은 멕시코시티의 거리에서 ‘순’이라고 불리는 한 수도자의 삶의 기록입니다.
멕시코시티 뒷골목의 어두운 현실과 가난한 사람들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글에서 우리는 수도생활이란 무엇인지,
수행이 어디로 연결되는 것인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수도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때 발생하는 세상을 솔직하게 보여주신 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편집자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의 나눔 속에서 배우는 것들
예수의 엘리사벳 순화 작은자매 개인적인 경험을 공개한다는 것에 저항을 느끼고 망설여집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내 소유로 간직한다는 것이 이기심이라 느껴졌고,
이 이기심에서 나오고 싶었기에 큰 맘 먹고 대충 적어 보고자 합니다.
산골짝 인디언 마을에서 대도시 중심가로
먼저 제 소개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저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 소속 수녀로 11년 전 종신 서원을 한 직후 이곳 멕시코에 와서
6년 조금 넘게 인디언들과 살았고, 최근 3년을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세계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6년 동안 인디언과 함께 한 생활은 한마디로 가난하게 살았다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언어, 문화, 사회 생활, 모든 부분에서 어린이와 같았습니다.
염소 떼를 데리고 반 사막인 산으로 다니며 풀을 찾고, 나무하러 다니고, 불을 지피며 또르띠아라는 옥수수 음식을 만들고,
일주일에 한번 도시까지 걸어 내려와 파출부 일을 하고, 우기에는 농사도 지어보고 그러면서 육체와 마음을 길들이는 시기였습니다. 제가 모르는 문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내 가치관을 모두 버리는 연습의 장소였고 제게 어떤 바탕을 마련하는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나자렛에서 사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6년 동안의 저의 삶을 돌아보면 주님께 한없이 하소연하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제 마음을 이해해줄 대상을 찾으면서 40대 위기라는 제 삶의 한 단계를 보낸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나누고자 하는 것은,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을 동반하기 위한 모델을 만드는 프로그램에서 일하면서 배우는 것들이기에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멕시코 공동체 차원에서 오늘 가장 가난한 사람은 누구이며 우리들이 받은 카리스마 (은사)를 어떻게 이들과 나눌 수 있는지 식별 작업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결론이 나왔고, 자매들의 전원 찬성으로 새로운 자매원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매들 숫자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비현실적인 결정이었지만, 이 결정 과정을 통해서 이냐시오 식별방법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자매원은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제가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범위는 노숙자 외에도 거리에서 하루 종일 보내는 사람들, 그러니까 노점상과 그들의 아이들, 매매춘 사람들과 그들의 아이들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는 깐델라리아에 젊은 멕시코 자매 둘이 다섯 가구가 사는 이층집 한쪽을 얻었습니다. 한 자매는 껌, 초콜렛, 손톱깍기 등 그날 그날 물건을 사다 지하철에서 불법으로 판매하면서 노점상들과 접촉을 하던 중이었고, 다른 자매는 파출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거리의 아이들을 모아 가정처럼 돌보는 여자 기숙사에 이모로 들어가 거리의 세계와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무렵 저는 제가 살고있는 마을의 변화에서 어떤 새로운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자매원을 남쪽의 더 가난한 인디언이 사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으로 알아듣고 공동 식별을 하자고 졸라서 식별을 하다가 개인 식별로 넘어가 거의 1년을 식별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자매원을 옮기려 할 무렵 지하철에서 장사하던 자매가 신학 공부하러 아르헨티나로 가게 되어 제가 거리의 세계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식별하는 동안 저는 하느님 뜻만 명확히 알게 되기를 바랐고, 우리의 카리스마를 깊이있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중립적인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과 함께 사는 동안 나의 삶은 인디언들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했었는데, 막상 인디언 마을을 두고 나오려니 너무나 힘들고 복잡한 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나오니 우선 두려움이 앞서고, 다시 모르는 세계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생활비를 벌고 노숙자들을 만나기 위해 별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돈을 많이 주겠다는 한국인 집에 파출부 일자리를 구하고 본당에 인사 갔었는데 본당 신부님이 거리의 아이들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면서 적은 액수지만 월급도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본당 신부님 쪽에서도, 제 쪽에서도 섭리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어떤 세계에 들어서고 있는지 짐작도 못했고, 철모르는 아이처럼 용감하게 시작했습니다. 지금 보면 우습지만 일하는 조건으로 제가 내세웠던 것은 우리 카리스마를 사는 것으로 절대 본당 사목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길에서 사는 아이들만을 동반하되 첫 1년은 그냥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과 함께 지내기로 한 것입니다. 지금 보면 그들의 세계를 전혀 모르고 그들 사이에 끼어든 것 자체가 오만이었고 실패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그 실패가 결국 지금 하는 일의 원동력이 되었기에 그 실패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당에서 지낸 1년 - 실패의 경험
제가 본당에 일하러 가서 보니 11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모두들 튀어나는 사건을 수습하느라 소방대원처럼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습니다. 본당 주변의 공원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 젊은이들은 한패를 이루어 마약, 강도, 매매춘, 도둑에 끼어 들었고, 나이든 사람들은 주로 마약 판매와 알콜 중독 상태에 있었는데 거의 모두가 모든 종류의 마약을 사용 해본 경험과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당에서는 이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주면 문제가 풀릴 것이라 착각해서 그들 자신이 보는 문제점은 싹 무시한 채 본당 쪽 관점에서 문제점을 해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은인들이 나타났고 젊은이들이 머물 기숙사와 모두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식당을 열었습니다.
저까지 12명으로 이루어진 일하는 팀원 모두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열심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노숙자들은 본능적으로 갈라놓고 서로 불신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실패의 경험과 문제를 우리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우리는 순진하게 그 문제들을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 들이고 짊어졌습니다.
매일 매일 무능과 나약함을 뼈저리게 맛보며 1년을 보냈는데, 저의 생애에 그렇게까지 예수님께 매달려 본 적이 전에는 없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들 걱정으로 꽉차서 저녁에 자리에 들때까지 근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독서도 걱정과 아이들 생각으로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마약을 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 내 안으로 침입해왔고, 아이들이 폭력으로 나를 대하면 내 안에 숨어 있는 폭력이 반응 하고자 꿈틀거렸습니다. 아이들과 제가 별로 다를 게 없었고, 다른 점은 제가 접수한 폭력이 적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제가 쓰고 있던 ‘가면’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숙사는 마약과 매춘 소굴이 되었고 조그만 규칙이라도 세우려는 내게 아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기 시작 했습니다. 저는 단순히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고, 우리 카리스마대로 그냥 함께 있고 싶었으나 거리의 세계, 마약의 세계, 폭력의 세계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제 머리 꼭대기에서 저를 조종하려 했고, 나 자신을 좀더 잘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은 아이들과 타협하는 데로 이끌었습니다.
아이들은 쓰레기 취급을 받기에 쓰레기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스물 세 살의 J라는 두 아이의 엄마는 한 아이는 어디 있는지 모르고 네 살된 L이라는 아들을 데리고 공원에서 지내는데 마약이 너무 심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겨우 설득시켜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고나니 죽어가던 사람이 어디서 힘이 나왔는지 병원으로 데려가는 우리를 뿌리치고 도망 가버렸고, 결국 쓰레기 통에서 죽어 시신 위로 쥐가 들락거리는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몰아세웠는지 모릅니다. 제 방법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해에만 이십대 초반 여자 세 명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원인은 마약이었으나 사회적인 멸시로 병원에서까지 인간 취급을 안해주는 데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A는 첫영성체 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강간 당하고, 여덟 살 때 남동생과 놀고 있었는데 스레트 벽이 무너져 동생이 깔려 죽었습니다. 동생을 죽인년이라는 내몰림을 당해 거리로 나왔다가 열두 살 때 집으로 돌아 왔는데 엄마가 화가 나서 이모에게 맛 좀 보여주라고 했고 이모는 마약을 주고 100 페소(만원 정도)에 A를 매매춘하는 곳으로 팔았습니다. 열다섯 살 때 첫 애가 죽었고 두번째 애는 오빠 집에서 자라고 세째는 공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말로는 아버지가 죽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A가 첫영성체 하려는 이유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싶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기 위해 첫 영성체를 하려는 것을 이해 할 수 없었으나, 새 살이 돋는 것을 상징한다는 심리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A는 제게 대모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대모가 되어 드레스를 사줄 형편은 못되지만 은인을 찾는 한이 있더라도 대모가 되어 주기로 했습니다. 마침 동성애 남자 두명이 첫 영성체를 하기 원해서 A와 남자 2명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생들이 돕겠다고 왔으나 교리를 한번 맡겨 보니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만 했습니다. 말로 가르치는 일은 피하고, 삶으로 복음을 외치는 카리스마를 따라 살고자 하는 제가 교리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교리 시간을 정해 주면 마약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인데도 교리 시간에 맞추어 왔습니다. 시간 관념이 없는 노숙자에게 이러한 것은 엄청난 노력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교리교재는 20년전 처음으로 거리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지내신 스페인 신부님이 만든 교재를 사용했습니다. 신부님의 이론은 거리의 아이들에게서 눈가리고 침 뱉음 당한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거리의 아이들을 쓰레기에 가려진 다이아몬드라고 불렀고, 언젠가 쓰레기가 치워지면 다이아몬드가 빛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교리반에서 별로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 마약은 아이들의 뇌를 손상시켰고 집중력과 기억력을 흐려놓았기에 주로 감정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소름이 끼쳤습니다. 모두 죽음을 가깝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자살소동, 성폭력, 조직끼리 패싸움 등 많은 사건들이 잇달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무작정 뛰어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의·식·주 걱정없이 마약을 더 했고 요구도 갈수록 늘어나 하나를 주면 열을 달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인 도움이 끊겨 팀 12명 중 저와 다른 사람 1명만 남았고 기숙사 문도 닫고 교리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모로 보나 실패와 무능과 죽음이 뒤덮여 있었고 이것들에게 짓눌려 우울해졌습니다. 이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예수회 신부님을 동반하여 식별 피정을 했으나 캄캄할 뿐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파출부 일자리 제의가 들어왔고 몇 달 만이라도 이 현실에서 떠나고 싶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힘이 되어주던 지부 책임자와 심리학을 전공한 친구는 이런 제 모습을 도피라고 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원인 모를 병에 시달려 제 몸도 겨누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주교님께 본당 변경 신청을 하였습니다. 주교님은 이 문제 많은 본당에 보낼 사제가 없어 고심한 끝에 로마까지 가서 수도원 문을 두드렸으나 오겠다는 수도회도 없었습니다. 결국 교구 까리따스에 사회분야 일을 맡기고 본당 사목만 하실 신부님을 보내 주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의 불안이 고조되었고 어떤 방법으로든 안심시켜야 했기에 제가 다른 데로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새로운 조직- 여러 기관에서 모인 현장팀
우여곡절을 겪고 멕시코시티 교구 까리따스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팀을 만들었고 이때 잠시 일을 바꾸려 쉬고 있던 같이 사는 자매에게 함께 일하자고 초대했습니다. 현장팀 네 명과 20년 동안 마약 중독자와 동반한 경험을 가진 기관이 지도부가 돠어 좀더 전문적으로 사업계획을 짜고, 조직 및 팀 양성이 시작 되었습니다. 팀 양성은 까리따스에서 마약 중독자 동반자들을 위한 양성 쎈터에서 2년 과정의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 계획은 본당 차원의 노숙자 동반 모델을 만들어 멕시코시티 전 본당에 보급시킬 예정이었습니다. 시내 곳곳에 노숙자 문제가 크기도 하지만 제가 일하던 본당에서 성공하면 다른 곳에서는 쉽게 일이 진행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가 일부 소외 계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 멕시코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멕시코는 자원과 문화가 굉장히 풍요로운 나라입니다.
우리가 사업 계획을 다 짜고 추진할 무렵 우리 프로젝트에 후원 하겠다던 은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유럽 공동체에서 여러기관이 함께 모여 노숙자를 동반하는 모델을 구상하기 위한 일에 후원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남미에서는 브라질, 하이티, 콜롬비아, 멕시코에서 동시에 같은 이론으로 일을 시작하여 3년 동안 각 지역에 알맞는 모델을 만들려 하는 프로젝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6개월 동안 까리따스 프로젝트였던 것이 여러 기관이 모여 일하는 프로젝트로 바뀌었는데 우리들 4명은 여전히 까리따스 소속이고 3개의 기관에서 1명씩 보내어 현장 팀이 7명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7명 모두 까리따스 양성 쎈터에서 양성을 받고 있기에 함께 일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기관 사람들이 모여 한 팀으로 일하는 것이 모두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면서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모두들 지금까지 일해온 방법에 한계가 있었음을 명확하게 인정하면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거리에서 오랫동안 지내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거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진료소로 보내어 약물 중독을 치료받게 하고 큰 노력을 기울여 알콜이나 마약을 끊었다고 해도, 사는 곳으로 되돌아오면 다시 반복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했습니다. 거리에서 살고 마약을 하더라도 좀더 인간답게 살고 자신의 몸을 보살필 줄 알게 동반하는 것으로 우리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한 마디로 삶의 질 높이기인데 우리는 이를 훼손된 부분 줄이기라고 불렀습니다. 좀더 인간적으로 살 수 있기를!
유럽 일부에서는 어떤 정해진 곳에서 콘돔이나 주사기를 주면서 안심하고 마약을 할 수 있게 보장해주며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약을 사서 가져가다가 경찰에 걸려도 이 정해진 곳으로 가는 것이 확인되면 무죄가 되는데 대신 마약을 공공장소나 어린이가 보는 곳에서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주사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아 시민도 보호되고 중독자도 마약 도수가 지나치게 되었을 때 의사의 도움을 즉시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마약을 예방하거나 그만 두게 하는데 실패했음을 인정 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방이나, 중독, 해독 하는 곳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이런 곳들이 새롭게 개발되어야 하지만, 도저히 이런 곳에 갈 수 없는 그야말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숫자가 자꾸 불어나고 있다는 현실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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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모든 것을 철부지같은 1년 동안의 경험 덕에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양성센터에서 배우는 과목들도 사회학, 사회심리학, 논리학, 심리분석학, 인류학, 대중보건학 방법론 등 거창한 과목들이었습니다. 작은 자매로 단순하게 살고자 하는 제가 이런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고민을 해 보았지만, 1년 동안 뼈저리게 느낀 무력감을 통해 이런 것을 하나의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현장조사, 사업작전기획, 빈번한 인터뷰 등으로 많은 시간을 책상에서 보내면서도, 단순히 아이들 가운데 있기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과 참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팀 안에 저와 다른 자매가 있어서 사업 작전을 짤 때 우리의 영성을 많이 반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커다란 변화였습니다. 본당 안에서 일한 것, 교리를 가르친 것, 어떤 기관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 두 자매가 함께 일하는 것, 전문가가 되는 것 등 모두가 이곳 예수의 작은 자매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매들 내부에서 돕는다는 명목으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문가가 되어도, 아무리 분석에 분석을 해보아도 인간관계에서 생긴 문제는 인간 관계로만 풀리고, 깊이 이해하고 존경하며 인간 관계를 맺기 위해선 적어도 그들의 세상을 알아야 하기에 노숙자들 사이에 현존하려는 제 목표까지 바뀌지는 않았다고 생각 됩니다.
팀이 얼마나 잘 구성되는가에 따라서 일이 잘 진행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팀을 분리시키는 선수입니다. 팀이 나약하면 아이들이 팀을 분열시킬 수 있기에 팀의 일치는 일하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우리팀 안에는 무신론자, 마약 중독 경험자, 전문가, 그리고 저희 작은 자매 2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각 기관에서 일하는 방법이 있고 또 저희들 4명이 시작한 방법이 서로에게 많은 문제를 주게 되었는데 차츰 팀 상담을 도와주는 전문가 덕에 팀 일치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하려면 팀 상담과 개인 상담은 의무적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제가 얼마나 내 문제와 아이들 문제를 혼동하고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아이들을 ‘순’ (아이들이 부르는 제 이름입니다)의 아이들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호칭에 대한 분석이 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아이들과 저 사이에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교환을 발견했습니다. 저의 의식 세계는 깨끗하고, 정돈 잘하고, 노력하고, 정이 있는 것과 같은 긍정적인 면으로 채우고 싶어하는 반면, 폭력이나 육체적 욕구 등 어두운 면은 무의식에 가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반대로 폭력과 더러움 등을 의식 세계에 두었고 긍정적인 면들은 무의식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만남으로써 우리들의 무의식이 의식의 차원으로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엄마의 모습이 바로 그들 자신의 모습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 제가 할 일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엄마라 부를 때마다 ‘네게 엄마는 어떤 사람이지?’ 하고 질문을 던지고 아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 보호하는 사람’ 등이라 대답하면 그들이 대답하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정말로 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약물 중독자와 사회 심리
우리 사회에 속죄양이 필요한 이유는 부정적인 요소를 치우고 균형을 느끼기 위해서인데 결국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속죄양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는 다 괜찮은데 유독 한사람이 말썽이라는 말을 우리는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집안뿐 아니라 사회도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균형이 깨어져 곳곳에서 부정적인 것이 고개를 들게 됩니다.
약물 중독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은 대게 이런 속죄양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가 어지럽고 힘들수록 많은 속죄양이 필요 합니다. 역사에서 대표적인 예가 종교 재판입니다. 한국인 봉사자에게 이부분을 이해시키기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한국에 어떤 유형의 사회 심리가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알콜 중독자들을 많이 만났는데 모두 심성이 곱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말도 못꺼내는 사람일 경우가 흔했습니다. 보통 중독자 가정, 인간 관계, 주변 환경을 보면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는 무엇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문에 온갖 결심을 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중독에서 벗어났다가도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조건들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중독자뿐 아니라 중독자의 환경을 접하는 사람들과 중독자가 접촉하는 사람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모두 만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모두에게 중립적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 일을 공동체적 치료라고 합니다. 중독자가 있는 그 장소에서 모두가 함께 치료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아이들은 감옥을 밥먹듯 들락거리는데 공원에는 항상 새로운 사람들이 도착해 똑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이 정도 인원의 중독자가 필요한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원에는 때에 따라 노숙자들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그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은 10 여년 전 지진이 있고난 후 주민이 거의 바뀌었는데도 똑같은 사회현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텐트 커피점
모든 사업 작전이 대충 이루어질 무렵, 행동하는 가운데 조사할 것을 요구하던 우리는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2년 12월, 아이들이 일상 생활을 보내는 바로 그 공원 한 가운데에 텐트 커피점을 열었습니다. 커피 값은 2페소로 아이들이 가장 쉽게 접근하는 희석제를 화장지에 적셔주는 값과 동일하게 상징적으로 책정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공짜로 받아온 아이들은 거세게 반항해왔습니다.
거져 준다는 것은 받는쪽보다 우위 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걸하는 사람이 손을 내미는 행위는 나는 쓸모 없는 사람, 당신은 나 보다 나은 사람, 그래서 당신은 내게 주어야 하는 사람 이라는 무의식이 있습니다. 걸인에게 동전을 주는 행위는 나는 좋은 사람,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무의식이 있습니다. 걸인은 돈을 받는 순간 ‘그것봐 모두들 내가 쓸모 없는 사람 임을 인정하잖아’ 라는 자기 비하를 다져갑니다. 이런 현상과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우리도 넘어 갔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밥을 공짜로 주거나 치료를 공짜로 해주면 은인을 만나기 쉽고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쉽고 아이들을 어느정도 내게 맞추어 행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소신 없이는, 자금도 들어오지 않고 결과도 보이지 않는 일을 끊임없이 대항하며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커피점은 최소한의 규칙을 정했습니다. 1. 마약, 무기, 가방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 접수부에 모든 것은 보관하고 나갈 때는 돌려 준다. 2. 텐트 안에서는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사용할 수 없다. 3. 텐트에 들어가려면 접수부에 접수 해야 한다. 이 최소한의 규칙을 지키게 하기 위해 처음에는 많은 실갱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규칙을 어기는 것을 고소하게 느끼기에 규칙을 위반하려고 온갖 시도를 했습니다.
팀은 텐트 밖을 그들의 공간으로 인정하기로 했지만, 그들이 자기들 나름의 규칙대로 하는 것을 보기만 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 앞에서 반쯤 죽이고 물건을 훔치거나, 서로 죽일듯이 싸우고, 새로운 사람에게 신고식 시키느라 별별 폭력을 다 사용하는 것 외에도 많은 규칙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텐트의 규칙을 스스로 지키기 시작했는데 아마 자신들을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준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돈을 받고 커피를 파는 것도 존경의 방법임을 느끼기에 우리의 규칙도 존중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굉장히 직감적인데 우리는 아이들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위협해야 돈을 줄 사람, 인사 해야 돈을 줄 사람, 10년 굶은 얼굴을 해야 돈을 줄 사람, 훔쳐야 할 사람을 금방 분석해 냅니다.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내가 그들을 신뢰하고 있는지, 무시하고 있는지, 두려워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접수부에서는 이름, 나이, 직업이라든가 무슨 마약을 사용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동거하는지 등을 물어 보는데 아이들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질문입니다. 봉사자들 중에도 이런 질문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접수부에 있으면 아이들은 감쪽 같이 알아내어 접수를 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러나 접수부는 많은 정보를 얻을 뿐아니라 대화의 창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가 접수부에 있을때 경험한 것을 보면 한번은 매매춘 여성이 왔는데 결혼했는지 이혼했는지 묻는 제게 버림받은 여성이라고 대답하고는 느닷없이 제게 너도 버림받은 여성이냐고 물었습니다. 얼떨결에 그 비슷하다고 대답했더니 우연히 다음날 길에서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갑게 인사해오는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아이들과 제가 다를 게 별로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이들처럼 어느정도 신뢰 관계가 이루어질 때까지 꾸며대고 있는데 얼마나 진실한 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에 우리들의 목표 달성 여부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번은 동성 매매춘 하는 사람이 왔는데 보통 남성이 여장할 때는 가슴과 엉덩이를 크게 부풀리는데 이청년은 가슴이 조그만게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느냐고 물어 보자, 동료가 “보면 몰라?” 하면서 묻는 것에 대해 웃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받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을 끈질기게 계속 물어보았는데,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그가 제게 한 말을 다 믿지는 않지만 대충 꾸며대는 그 속에는 소중한 무엇이 있음을 알기에 사실이 아닌줄 알면서도 다 적어 둡니다.
우리가 텐트를 친 주변에는 한 구역 안에 공식적인 매매춘 종사자가 800여 명이 있고 큰 길 건너편에는 공식 인원만 1500명이 종사한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아가씨들은 길 모퉁이나 상점 유리문 앞에 서 있고 온갖 종류의 상인들과 노점상들, 학교와 성당이 그 중간에 있습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또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매매춘 여성들은, 조직에 소속된 사람과 개인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우리 공원의 아이들처럼 싼 값에 비공식적으로 일하는 세 구룹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매춘 하는 이들은 쉽게 텐트에 접근하고 아이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보는 중입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엄마라는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한 수녀원이 매매춘 여성의 아이를 돌보는 탁아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 여성들은 그 탁아소에 아이를 데려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매매춘 할 때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는 아이들까지 강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개를 무척 좋아합니다. 심리적으로 개를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에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것을 대신 채워 주는 상징적 부모가 되기도 합니다. 아기를 가지는 것도 좋아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공허감을 매워주고 아기를 데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더 불쌍히 여겨주고 관심을 가져주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하면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죄의식이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를 죽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지만, 그로 인해 친구가 없어지게 되는 결과나, 죽인 사실이 발각되어 감옥에 가야 한다는것만 두려워 합니다.
텐트 카페는 3개월 마다 일단 닫은 상태에서 평가와 새로운 작전을 짜고 팀이 조금 쉰 다음 다시 열고 있습니다. 첫 3개월의 목표는 정보 수집 및 분석, 아이들 반응 체크, 아이들과 가까워지기였습니다. 두번째 3개월에는 그중 22명을 선정해서 팀 각자가 3-4명씩 개인 동반을 시작 했습니다. 주변의 아파트에 사는 어린이들이 오기 시작한 것은 예상치 못했는데 그들의 환경을 들어보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그들은 또 한무리가 되어 길에서 사는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더럽다고 놀려댑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모가 유명한 폭력배들이라 아이들은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공원에 있는 친구들은 제가 수도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여관으로 가자고 초대하거나 슬슬 몸을 만지려는 사람들이 줄어들었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은 계속 합니다. 한번은 B가 멀리서 순! 하고 외쳐서 저도 얘기하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는 “내가 한국 여자를 만났는데 너 보다 더 예뻐서 사랑에 빠졌어” 하고 외쳤습니다. 어쩌면 “이제 네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후기현대라는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모든 면에서 위기를 맞이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언어의 위기는 심각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마음을 표현할 언어가 없어 통교 단절로 인한 고독을 느끼고, 섹스나 촉감으로 통교를 느끼고자 하기에 사방에서 짝짝이를 보게 됩니다.
봉사자들
한국인 가톨릭 공동체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예전에 장사가 잘 될 때에는 멋있는 차에 지방으로 음식물을 싸들고 줄줄이 실어서 봉사 다녔는데 지금은 장사가 안되어 가까운 곳에서 봉사할 곳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일하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한국인 옷가게가 많이 있기에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도 바꾸고자 봉사를 하려 했습니다.
제가 봉사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봉사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 뿐이지만, 봉사하는 동안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는 데는 고통이 따를 것임을 이야기 합니다. 봉사자들은 처음에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봉사자에게 아무 것도 못먹었는데 커피 살 돈이 없다고 하소연 합니다. 우리는 커피에 영양분이 있는 과자를 끼워주고 있고, 또 초콜렛을 청하면 우유를 듬뿍 넣어 줍니다. 우유와 과자로 손상된 몸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봉사자 양성 때 그렇게 열심히 설명을 했어도 막상 아이들을 대하면 봉사자들은 마음이 약해져 고민에 빠지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에게 커피 한 잔을 사주게 됩니다. 한국인 봉사자들은 무슨 행사만 있으면 먹을 것을 준비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먹을 것을 나눈 경우는 2002년 12월 31일 딱 한번 밖에 없었고, 그때 한국인들은 젓가락을 준비해서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얼마 전 유럽공동체에서 후원 중인 4개국 현장팀끼리 워크샵이 있었습니다. 남미의 다른 나라와 유럽에서도 참여하여 우리 텐트에서 현장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고, 봉사자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한국인의 봉사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도 많이 알려졌습니다.
우리는, 봉사자가 많이 필요한 이유가 아이들에게 인간 관계의 폭을 넓혀 주기 위해서라고 봉사자 교육 중 강조합니다. 아이들이 자기들 그룹 밖에 있는 사람과 자주 접촉하고 만남으로써 폭력이 최고라는 가치관 외에 다른 가치관도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봉사하면서 아이들에 대해 예전에 가졌던 이미지가 바뀝니다. 봉사는 주로 텐트를 치기 위해 짐을 나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커피 판매, 텐트를 걷은 후 그날 느낀 감정을 교환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흐뭇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예 없다는 것을 봉사 전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국인 외에도 대학생 사회봉사팀, 새 삶을 시도하는 중독자 봉사팀과 그 가족 봉사팀이 있는데 정작 마을 내에서 봉사 나오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본당 사목위원과 단체장을 여러 번 만나고 충분히 설명을 했지만 그들은 외부 사람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봉사를 하겠다고 하면서도 참여하지 않는 것을 접하면서,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너희는 여기에서 실패만 볼 것이다” 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들 안에서도 보게 됩니다.
성령의 움직임
2년 과정의 양성도 끝났고 많은 경험으로 인해 이제는 길거리와 마약의 세상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며 웃는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면 섭리를 느낍니다. 그렇게 두렵던 세계를 접하면서 제 안에 중독자들에게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음을 발견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고 제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의식 위로 떠올라 제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 보다 제 자신이 많은 도움을 받았고 성장했음을 느끼기에 아이들도 더불어 성장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남미 해방 신학자들이 아버지로 받드는 민중 교육의 창시자 파울로 프레리의 말을 실감합니다. “그 누구도 누구를 교육 시킬 수 없고, 그 누구도 혼자서는 교육될 수 없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교육 시킨다.”
작은 자매에게 교육자라는 말은 두려운 말입니다. 유럽에서는 거리의 교육자라는 직업이 최근의 신종 전문직으로 많은 양성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거리의 교육자라는 호칭이 맞지 않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교육자가 다른 점은 부모는 하느님으로부터 아이를 키우라는 소명을 받았고 교육자는 아이가 가진 것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도울 뿐 부모와 같은 의무나 권한이 없습니다. 이것을 제가 거론하는 이유는 현장에서 혼동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당에서 일할 때 아이들은 마음에 들면 선심을 쓰듯 엄마라고 불렀는데, 팀 안에는 엄마라고 불러주면 자신이 진짜 엄마처럼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를 엄마라고 부른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라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을 재경험 할 때 느끼는 버림받은 감정에 대해 책임없이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거리의 교육자는 아무도 부탁하지 않은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인데 아이들은 교육을 원하지 않습니다. 부모 말고 누가 감히 원치도 않는 교육을 시킬수 있겠습니까? 강요는 이미 교육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 부모 역할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정체성이 확실해야만 하며 부모가 되면 부모의 의무를 끝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순히 작은 자매의 카리스마대로 그들 가운데로 가고 싶었으나 거리는 제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가장 소외된 이들에게로 가려는 이 시점에서 재창설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아이들이 온갖 폭력과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줘도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뿌리신 씨앗이 감추어져 있음을 믿어 아이들이 폭력 사용을 사랑을 구하는 외침으로 듣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폭력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이런 대응법을 가르쳐 주길 바랐으나 이제는 예수님 밖에 스승은 없으며 제가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가야할 길임을 알아들었습니다. 언젠가 그분께 온전히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게 되는 꿈을 꾸어 봅니다.
저는 그저 새로운 것은 회피하는 겁쟁이였는데 그야말로 모델까지 만들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계속 새로운 것만을 만나면서 보냈습니다. 주님은 저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아셨고 인디언 마을에서 불러 내신 것은 착오가 아니었음을 봅니다. 인디언들과 살았던 경험은 지금도 제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멕시코인이면 인디언이든 아니든 그들 안에 문화적으로 전수 받은 인디언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제가 나름대로 받은 교육과 환경, 경험한 것과 저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기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즘들어 거리의 아이들과 정들었음을 느낍니다. 그냥 보고 싶을 때가 있고 제가 좋아할 말을 잽싸게 꾸며대며 마음에도 없는 새롭게 살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흐뭇해질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마약에서 구하거나 어떤 기관으로 보내기 위해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친구처럼 참말 거짓말을 들으면서 한번 더 웃음을 주고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끔씩 1년 안에 정말 그들을 동반하는 모델을 만들수 있을지 자문해볼 때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만난 아이들 중 가장 많은 성장을 한 R을 소개하며 이글을 마칠까 합니다. R은 인디언이기에 쉽게 일을 하려 했고 처지를 개선할 생각을 했습니다. 거리의 아이들에게는 가장 힘든 것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곱 살 때부터 식모살이를 시작했는데 돈을 많이 준다는 말을 듣고 공원 근처로 왔습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를 만났고 서로 잘 지내고 있으며 (거리의 아이들에게는 쉽게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네 살 된 딸이 있습니다. 임신 때 마약을 끊고 지금까지 다시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R은 몇 달 전 거금을 빌려 기름 종이 스레트를 샀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사용료를 조금 내는 공터에 방 한칸과 화장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기철이 되자 비가 새어 거금을 들인 기름종이 스레트가 쓸모 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실망 않고 지금은 노점상이 되려고 이것 저것 되는대로 사다가 팔기 시작 했습니다. 언제나 진짜 집을 가지게 될 지 가끔씩 절망적인 하소연을 하지만 아이들 중에는 가장 밝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에 뜻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과 의논중에 계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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