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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새로운 출발(2)
썩은 생선의 눈처럼 뻘겋게 충혈이 된 건배의 눈이, 동혁의 실쭉해진 눈과 딱 마주치자, 그는 전기를 맞은 것처럼 우뚝 섰다. 한참이나 억지로 몸을 꼬느고 섰다가 ‘죽여줍시사’하는 듯이 머리를 푹 수그리더니,
“여보게 동혁이!”
하고 와락 달려들어 손을 잡는다. 동혁의 표정도 점점 심각해진다.
“여보게 동혁이! 나 술 먹었네, 술 먹었서. 자네 덕분에 끊었던 술을, 삼 년째나 끊었던 술을 먹었네. 그저께 저녁버텀 죽기 작정허구 막 들이켰네. 참 정말 죽겠네 죽겠서. 이 사람 동혁이, 팔아먹은 양심이 아직두 조끔은 남었네그려!”
하고 앙가슴을 헤치고 주먹으로 꽝꽝 치더니, 동혁의 어깨에 가 몸을 턱 실리며,
“여보게, 내 이 낯짝에 침을 뱉어주게! 어서 똥물이래두 끼얹어주게! 난 동지를 배반헌 놈일세. 우리 손으루 진, 피땀을 흘려서 진 회관을, 아아 그 집을 그 단체를 이놈의 손으루 깨뜨린 셈일세!”
하고 진흙 바닥에 가 펄썩 주저앉더니, 흑흑 느끼면서,
“내가 형편이 자네만만 해도, 두 가지 맘은 안 먹었겠네. 내 딴엔 참기두 무척 참었지만, 원수의 목구녁이 포도청이니 어떡허나?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허구, 하나 둘두 아닌 어린 새끼들허구, 이 입살에두 풀칠을 해야 살지 않겠나?”
하고 사뭇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우리 내외는 남몰래 굶기를 밥 먹듯 했네. 못 먹구두 배부른 체허기란 참 정말 심드는 노릇이데. 허지만 어른은 참기나 허지, 조 어린것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 우리 같은 놈헌테 태어난 죄밖에, 이승에 무슨 큰 죄를 졌단 말인가? 그것들이 뻔히 굶네그려. 고 작은 창자를 채지 못해서 노랑방퉁이가 돼가지구, 울다울다 지쳐 늘어진 걸 보면, 눈에서, 이 아이봄의 눈에서 피 피눈물이 나네그려!”
하고 떨리는 입술로 짭짤한 눈물을 빨면서, 문지방에다가 머리를 들부비더니, 눈물 콧물로 뒤발을 한 얼굴을 번쩍 쳐들며,
“여보게 동혁이, 자넨 인생 최대의 비극이 무엇인줄 아나? 끼니를 굶구 늘어진 어린 새끼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걸세! 그것들을 죽여버리지두 못 허는, 어미 아비의 속을 자네가 알겠나?”
하고 부르짖으며,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는다.
동혁은 팔짱을 끼고 서서, 잠자코 건배의 독백을 들었다. 적 덩어리 같은 그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듯 한 것을 억지로 참고 섰으려니, 건배만치나 마음이 괴로웠다. 비록 술은 취했으나마, 그 기다란 몸을 진흙 바닥에다 굴리면서 통곡을 하다시피 하는 것을 볼 때, 달려들어 마주 얼싸안고 실컷 울고 싶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서 말대꾸도 못하였다. 아내가 듣다 못해서 마당으로 내려오며,
“이거 창피스레 왜 이러우! 어서 들어갑시다. 제발 방으루나 들어가요.”
하고 잡아끌어도, 건배는 막무가내로 뻗딩긴다. 동혁은 그제야 건배의 겨드랑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여보게 건배! 어서 일어나게. 가을이 돼두 벼 한 섬 못 들여놓구 지낸, 자네 사정을 어째 내가 모르겠나. 이런 경우에 자네를 힘껏 붙잡지를 못허근ㄴ 게 무한히 슬플 뿐일세. 이번에 가면 아주 가겠나. 또다시 모일 날이 있겠지. 더 단단히 악수를 헐 날이 있겠지. 난 이 마당에서 다른 말은 허기가 싫으이. 기왕 그렇게 된 일이니 자네의 맘이 다시는 변치 말구 있다가, 더 큰 일을 헐 때, 만날 것만 믿구 있겠네!”
건배는, 동혁이가 뜻밖에 조금도 저의 탓을 하거나 몰아대지를 않는 것이 고마워서, 동혁의 손을 힘껏 잡으며,
“이 손을 어떻게 놓나 응? 이 손을 어떻게 놔. 이 ‘한곡리’를 차마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정을 베는 칼은 없어! 없나? 인정을 베는 칼은 없어?”
하고 손을 벌리더니, 연기에 시꺼멓게 걸고, 말둥이 반이나 썩은 마룻기둥을 두 팔로 부둥켜안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 줌 흙도 움켜쥐고
놓치지 말어라.
이 목숨이 끊기도록
북돋우며 나가자!
하고 <애향가> 끝 구절을 목청껏 부르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며 헉헉 느끼기만 한다.
그의 머리와 등허리에는, 찬비가 어느덧 진눈깨비로 변해서, 질금질금 쏟아져 내린다.
건배가 떠나는 날 동혁은 오 리 밖까지 나가서 선송을 하였다. 몇 해 전 교원 노릇을 할 때에 입던 것인지, 무릎이 나가게 된 쓰메에리 양복[깃의 높이가 4센티미터쯤 되게 하여, 목을 둘러 바싹 여미게 지은 양복]을 입고 흐느적흐느적 풀이 죽어서 걸어가는 뒷모양을 동혁은 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밝기도 전에 도망꾼과 다름없이 떠나는 길이라, 작별의 인사나마 정다이 하러 나온 사람도, 두엇밖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린것들을 이끌고, 눈에 잠이 가득한 작은애를 들쳐업은 건배의 아내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걷지를 못하다가, 동리가 내려다보이는 마루터기 위까지 올라가서는 서리 찬 풀밭에 펄썩 주저앉았다. 한참이나 자기가 살던 동리의 산천과 오막살이들을 넋을 잃고 내려다보다가, 남편에게 끌려서 그 고개를 넘으면서도, 돌려다 보고 돌려다 보고 하는 것이 먼 광으로 보이더니, 그나마 아침 햇빛을 등지고 안계에서 사라져버렸다.
기천이가 건배의 빚을 갚아주고 신분까지 보증을 하여서, 하루 일 원씩 일급을 받는 임시 고원[관청에서 사무를 돕기 위하여 두는 임시 직원]이 되어간다는 것은, 그의 아내의 입을 통해서 알았다. 군청에 사람이 째어서[일손이나 물건이 모자라 일에 쫒기다] 몇 달 동안 서역[잔글씨 쓰는 수고로운 일]을 시키려고 임시로 채용한 것이니까, 그나마 언제 떨어질는지 모르는 뜨네기 벌이다. 그러나 조만간 끊어질 줄 알면서도, 건배는 그만한 밥줄이나마 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혁은 동리로 돌아오면서,
‘오는 자를 막기도 어렵고, 가는 자를 억지로 붙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고 긴 한숨을 짓고는, 그 길로 회원의 집을 따로다로 호별 방문을 하였다. 그것은 강기천이와 겯고틀려는 음모를 하려는 것도 아니요, 반대운동을 일으키려고 책동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자아, 우리 기왕에 그렇게 된 일을 가지구, 왁자지껄 떠들기만 허면 무슨 소용이 있나? 누가 잘허구 잘못헌 것두 따지지 말구, 어느 시기꺼정은 우리가 헐 일만 눈 딱 감구 허세.”
하고는 미리 불평을 막았다. 그는 기천에게 매수된 회원에게도 똑같은 태도로 임하였다. 석돌이와 칠룡이 같은 회원은 동혁을 보더니, 질겁을 해서 쥐구멍으로라도 들어가려고 드는 것을,
“허어 이 사람, 내 얼굴을 바루 쳐다보지 못헐 짓들을 누가 허랬나?”
하고 너그러이 웃어 보이면서, 전일과 조금도 다름없이 은근하게,
“난 이런 생각을 허는데, 자네들 의향은 어떨는지?”
하고 조끼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놓으며,
“자, 누구누구 헐 것 없이, 우리 어떻게 빚버텀 갚을 도리를 차려보세. 빚진 죄인이라구, 남의 앞에 머리를 들구 살려면, 위선 벚버텀 벗어넘겨야 허지 않겠나?”
“그야 이를 말씀이에요.”
어느 회원은 동혁이가 은행의 담이나 뚫어가지고 온 것처럼, 그 말에는 귀가 번쩍 트이는 눈치다.
“그렇게만 되면사, 우리두 다리를 뻗구 자겠지만.......”
하면서도, 무슨 방법으로 갚자는 지를 몰라서, 동혁의 턱을 쳐다본다.
“그런데 우리 회원들이 강 도사 집에 농채(農債)나 상채(喪債)루, 또는 혼채(婚債)루 진 빚을 쳐보니까, 본전만 거진 사백 원이나 되네그려. 그러니 또박또박 오푼 변을 물어가면서, 기한에 못 갖다 바치면, 그 변리꺼정 추켜매서 그 원리금에 대한 오 푼 변리를 또 물고 있지 않은가? 허구 보니 자네들이 빚이 벌써 얻어 쓴 돈의 세 배두 더 늘었네그려. 주먹구구루 따져 봐두 일천사백 원 턱이나 되니, 자네들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겨서, 그 엄청난 빚을 갚어보겠나!”
“어이구, 일천 사백 원!”
갑산이가 새삼스러이 놀라며 혀를 빼문다.
“그게 또 자꾸만 새낄르 칠 테니, 어떻게 되겠나? 몸서리가 쳐지두록 무섭지가 않은가?”
“그러니, 세상 별별 짓을 다 해두 갚을 도리가 있어야죠. 그저 텃도지[터를 빌린 값으로 내는 세]도 못 물구 있는 사람이 반이나 되는데요.”
“그러길래 말일세. 그 빚을 어떻게 갚든지 네게다만 죄다 맡겨주겠나? 그것버텀들 말허게.”
“그야 두말헐 께 있세요. 빚만 갚게 해주신다면 맡기구 여부가 없음죠.” 하는 것이 이구동성이다.
“그럼, 나 허는 대루 꼭 해야 허네. 나중에 두말 못허느니.”
하고 동혁은 두 번 세 번 뒤를 다졌다.
동혁은 회원이 빚을 얻어 쓴 날짜와 금액을 적은 장부를 꺼내더니,
“그러면, 우리 이럭허세. 우리가 삼 년 동안 공동답을 짓구, 닭 돼지를 쳐서 모은 것허구, 이용조합과 이발조합에서 저금헌 걸 따져 보니까, 회관을 지은 것은 말구두, 사백육십여 원이나 되네.”
하고 일 전 일 리도 틀림없이 꾸며놓은 회의 여러 가지 장부와 대조를 시켜보았다.
“야아, 그런 줄 몰랐더니 꽤 많구나!”
하고 회원들은 저희들이 저금한 액수가 뜻밖에 많은 데 놀란다.
“그러길래 티끌 모아 태산이라지. 허지만 그걸 열둘루 쪼개면, 한 사람 앞에 삼십팔 원 각수밖에 더 되나.”
동혁의 말을 듣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결코 많달 것이 없는 금액이다. 동혁은 회원들의 기색을 살펴보며,
“우리 그동안 비럭질(거저 일을 해주는 것)을 해준 셈만 치구, 그걸루 몽땅 빚을 갚어버리세. 나는 간신히 그 집에 빚을 안 졌지만, 내 몫허구 동화 몫이 남는데 건배 군은 취직을 헌 모양이니까, 세 사람 몫은 거저 내놓겠네. 그럼 그걸루 많이 얻어 쓴 사람허구 적게 얻어 쓴 사람허구, 액수를 평균허게 만들 수가 있지 않은가?”
회원들은 얼른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좋고 그르다는 것은, 그네들의 표정이 없는 얼굴을 보아서는 모른다. 몇몇 해를 두고 쪼들리던 부채를 갚아준다니, 귀가 번쩍 트이나, 죽을 애를 써서 모은 것을 송두리째 내놓은다는 데는, 여간 섭섭지가 않은 눈치다. 어린애는 배기도 전에 포대기 장만부터 한다고, 그 돈을 눈 딱 감고 놀려서 돈 백원이나 바라보면, 토담집이라도 짓고 나와서, 남의 도짓집을 면해보려고 벼르고 있는 회원이, 거진 반이었던 것이다.
“섭섭헌 줄을 아네. 허지만 눈앞에 뵈는 게 아니라구, 그 빚을 그대루 내버려두면, 나중에 무슨 수루 갚어보겠나? 철룡이 같은 사람은, 돌아간 아버지 술값까지 짊어졌으니까, 억울헌 줄은 모르는 게 아닐세만......억지루 허자는 게 아니니, 싫다면 더 우기진 않겠네.”
하고 동혁은 슬그머니 얼러도 보았다. 그런 잇속에는 셈수가 빠른 석돌이는,
“선생님이 첫해버텀 우리허구 똑같이 고생을 허신 것꺼정 내놓으신다는데, 두말 헐 사람이 누구예요? 너무나 고맙구 염치없는 일입죠.”
하고 동혁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럼, 변리는 어떡허구 본전만 갚나요?” 한다. 그 말에 정득이와 칠룡이도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그러게 말씀예요. 배버덤 배꼽이 더 커졌는데.....”
하고 거진 동시에 질문을 한다.
“궁금헐 줄두 알았네. 그러길래 그건 무슨 수단을 쓰든지, 내게다만 맡겨달라구 허지 않었나?”
“안 될걸요. 이마에 송곳을 꽂어두 진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인데, 애당지 생의[생심. 어떤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음]두 마시지요.”
“아, 노린전 한푼에 치를 떨구, 사촌 간에두 꼭꼭 변리를 받는 사람이, 더더군다나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놓지를 못해 허는, 우리들의 변리를 탕감해주겠세요? 어림없지 어림없어.”
하고 머리를 내젓는 것을 보고, 동혁은,
“이 사람, 경우에 따러선 병법을 가꾸루 쓰는 수두 있다네.”
하고 자신 있는 듯이 간단히 대답하고 나서,
“헌데, 한 가지 꼭 지켜야 헐 게 있네. 내가 그 집엘 댕겨오기 전엔, 누구헌테나 이 말을 입 밖에두 내선 안 되네. 그 사람이 미리 알면 다 틀릴 테니 명심들 허게. 그런데 온 전화통이 있어서....”
하고 슬쩍 석돌이를 흘겨본다. 정득이도 석돌이와 칠룡이를 노려보며,
“천엽에 가 붙구 간에 가 붙구 허는 놈은, 인젠 죽여버릴 테야 죽여버려!” 하고 이를 뿌드득 갈며 벼른다.
아무리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를 해도, 저녁 안으로 그 말이 새어서 기천의 귀에까지 들어갈 것을, 동혁이가 모를 리는 없다. 건배를 작별하고 오다가, 기천이가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로 달려가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고, 기만이가 형이 술에 취해서 자는 사이에, 빚을 놓아먹으려고 금융조합에서 찾아온 돈을, 오백 원이나 훔쳐가지고 도망을 가서 형이 서울로 쫓아 올라갔다는 소문이, 벌써 파다하게 났기 때문에, 적어도 사오일 내로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동안 여러 날을 두고 동혁은, 사방에 흩어진 돈을 모아들이느라고, 자전거를 얻어 타고 분주히 돌아다녔다. 조합에 예금했던 것은 손쉽게 찾았지만, 그 나머지는 받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요행으로 추수를 한 뒤라, 다른 때보다는 융통이 잘 되어서, 기천이가 내려오기 전날까지 그 액수가 거진 다 들어섰다.
기천이는, 조끼 안주머니에다가 똘똘 뭉쳐서 넣고 자던 돈을, 아우에게 감쪽같이 도적을 맞고, 눈이 발칵 뒤집혀서, 으레 서울로 갔으려니 하고 뒤를 밟아 쫓아 올라갔다. 그러나 서울은 공진회[각종 산물이나 제품들을 한 곳에 많이 모아놓고 품평하고 전시하는 모임] 때와 박람회 때에, 구경을 했을 뿐이라, 생소해서 무턱대고 찾아다닐 수도 없어, 경찰서에 수색원까지 제출했건만, 친형제 간에 돈을 훔친 것은 범죄가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찾게 되면 통지할 테니 내려가 있으라‘는 주의를 받고, 그 아까운 노자만 쓰고 내려왔다. 집에 와서는 콩 튀듯 팥 튀듯 하며, 문문한[어려움 없이 쉽게 다루거나 대할 만하다] 집안 식구에게만 화풀이를 한다는 소문이, 벌써 동혁의 귀에도 들어갔다. 동화에게 석돌이나 그 집에 가까이 다니는 사람을 감시하게 하는 한편으로, 머슴애를 꾀송꾀송해서 물어보면, 단박에 염탐을 할 수가 있다.
’화가 꼭두까지 오른 판인데, 잘 들어먹을까.‘ 하면서도 동혁은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저녁을 든든히 먹은 뒤에, 큰마을로 기천이를 찾아갔다. 가는 길에도,
’농촌운동을 허는 사람이라도, 너무 외곬으로 고지식하기만 허면, 교활한 놈의 꾀에 번번이 속아 떨어진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제 양심을 속이지 않는 정도로는 패를 써야 하겠다.‘하고 종래와는 수작하는 태도를 변해보리라 하였다.
사랑마당에서 으흠, 으흠 기침을 하니까,
“누구냐?”
하고 되바라진 소리를 지르며 내다보는 것은, 바로 기천이다.
“그동안 경행[서울에 감]을 허셨다라지요?”
하고 동혁은 뻣뻣한 허리를 될 수 있는 대로 굽혀 보였다.
“아, 동혁인가? 그러잖어두 좀 만나려구 했더니.....”
기천은 마루로 나오며 한 십 년만에나 만나는 친구처럼,
“어서 이리 들어오게.”
하면서 동혁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제가 한 깐이 있고, 반대파의 회원들이 저의 집을 습격이나 할 듯이 형세가 위룽위룽한데, 그 질색할 놈의 동화는, 저를 보기만 하면 죽이느니, 다리를 분질러놓느니 하고, 벼른다는 소문을 벌써 듣고 앉았다. 속으로는 겁이 잔뜩 나서, 동네 출입도 못 하고, 들어앉았는 판에, 몇 번씩 불러도 오지를 않던 동혁이가 떡 들어서는 것을 보니, 가슴이 달칵 내려앉았다. 그렇건만 그 순간에,
‘옳지, 마침 잘 왔다. 너만 구슬려노면야 다른 놈들쯤이야.’
하고 얖잡고는 친절을 다해서 동혁을 붙들어 올린 것이다. 동혁이가,
“계시[남의 남동생을 높여 이르는 말]두 서울 가셨다지요? 풍편에 놀라운 소식이 들리드군요. 그래 얼마나 상심이 되세요?: 하고 화평한 낯빛으로 동정해주니까,
”허어, 거 온 첫째 창피스러워서....속상허는 말이야 다 해 뭘 허겠나. 그야말루 아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지.“
하고 매우 아량이 있는 체를 한다. 동혁은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기를 누르려고,
”참 이번 저 없는 동안에, 귀찮은 일을 맡으시게 됐드군요?“
하고 아픈 구석을 꾹 찔러보았다. 기천은 의외로 동혁의 말씨가 부드러운 데 안심이 되는 듯,
”하 이 사람, 자네가 먼저 말을 끄내네그려. 난 백죄[‘백주’의 방언] 꿈두 안 꾼 일을, 건배랑 몇몇이 누차 찾어와서, 벼락감투를 씌우데그려. 자네네 일까지 덧붙이기루 해달라니, 젊은 사람들이 떠맡기는 걸 인제 와서 마다는 수두 없구.....그래서 자네허구 얘기를 좀 허려구 만나려던 찬덴, 참 마침 잘 왔네.“
하고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듯이, 뾰족한 발끝을 달달달 까분다.
”그야 인망[세상 사람이 우러르고 따르는 덕망]으루 되는 일이니까요. 진작 일을 봐줍시사구 여쭙질 못헌 게, 저희들의 불찰이지요.“
그 말에 기천은, 몸을 발딱 일으키며,
”가만있게. 우리 오늘 같은 날이야 한 잔 따뜻이 마시면서 얘기를 허세.“
하고 요릿집에서 하던 버릇인지, 안으로 대고 손뼉을 딱딱 친다.
전일과 똑같은 대중[대강 어림잡아 헤아림]의 술상이 나왔다. 그러나 오늘은 어란과 육포 조각까지 곁들여 내온 것을 보니, 특별대우를 하는 모양이다.
”여보게, 오늘은 한 잔 들게. 사람이 너무 고집이 세두 못쓰느니.“
하고 권하는 대로,
”그럼, 나 먹는 대루 잡수실 테지요?“ 하고 동혁은 커다란 주발 뚜껑으로, 밥풀이 동동뜬, 노오란 전국[굴이나 간장. 술 따위에 물을 타지 아니한 진한 국물]을 주르르 따랐다.
”자, 먼저 한 잔 드시지요.“
”어 이 사람, 공복인데 취허면 어떡허나. 요새 연일 과음을 해서....“
하면서도 기천은 동혁이가 먹는다는 바람에, 숨도 아니 쉬고 쪼옥 들이켰다. 이번은 동혁이가 불가불 마셔야 할 차례다. 동혁은,
”이거 정말 파계를 허는군요.“
하고 주발 뚜껑이 찰찰 넘치도록 받아 놓았다.
하고 주발 뚜껑이 찰찰 넘치도록 받아 놓았다. 동혁은 원체 주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고등농림의 축구부 주장으로 시합에 우승하던 때에는, 응원대장이 권하는 대로 정종을 두 되 가량이나 냉수 마시듯 하고도, 끄떡도 아니하던 사람이다.
”어서 들게.“
”네, 천천히 들지요.“
그러나 이만 일로, 여러 회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굳게 지켜오던 약속을 깨뜨릴 수도 없고, 그 잔을 내지 않을 수도 없어서, 어름어름하고 안주만 집는 체 하는데, 안에서 계집애가 나오더니,
”아씨가 잠깐 들어옵시래유.“
한다. 기천은,
”왜?“
하고 일어서며,
”아 이사람, 어서 들게.“
하고 마시는 것을 감시하려고 한다. 동혁은 술잔을 들었다. 돌아앉으며 단숨에 벌떡벌떡 들이켜는 것을 보고야, 기천은,
”허어, 어지간허군.“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저녁상을 내보낼까 물어보려고 불러들이는 눈치다. 동혁은 씽긋 웃으며 술잔을 입에서 떼는데, 술은 고대로 있다. 능청스럽게 소매로 입을 가리고, 들여바시는 시늉만 내어 보인 것이다. 그 술을 얼른 주전자에 도로 따르고, 이번에도 안주를 드는 체하고 있는데, 기천은 벌써 얼굴에 술기운이 돌아가지고 나온다. 동혁은,
”무슨 술이 이렇게 준헙니까?[술맛 따위가 매우 독하거나 진하다] 벌써 창자 속까지 찌르르헌데요.“
하고 진저리를 치는 흉내를 낸다.
”기고(忌故, 해마다 사람이 죽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일, 또는 그날)두 계시구 해서, 가양(家釀, 집에서 쓰려고 술을 빚음)으루 조금 빚어넌 모양인데, 품주는 못 돼두 그저 먹을만허이.“
”이번엔 주인어른께서 드셔야지요.“
”온, 이거 과한걸.“
”못 먹는 저두 먹었는데요. 참 제가 술 먹은 걸, 회원들이 알아선 안 됩니다.“
”그야 염려 말게. 내가 밀주해 먹는 소문이나 내지 말게. 겁날 건 없네만......“
하고 기천은,
”핫 하하하.“
하고 간드러지게 웃으며 자을 들더니, 엄지 손가락을 젖힌다.
”이왕이면 곱빼기루 한 잔 더 허시지요. 저두 따러 먹을 테니....“
동혁은 석 잔째 가득히 따라 올렸다.
”아아니, 자네 사람을 잡으려나? 이렇게 폭배를 허군 견디는 수가 있어야지.“
하면서도,
’어디 누가 못 배기나 보자!‘는 듯이 상을 찌푸리고, 꼴딱꼴딱 마셔 넘긴다. 동혁은 기천의 목줄떼기에 내민 뼈끝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바라 보다가,
’이번엔 어떡하나.‘
하면서도 그 술잔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서 들게 들어. 입에 안 댔으면 무르거니와, 사내대장부가 그만 술이야 사양해 쓰겠나.”
독촉이 성화 같다. 기천은 벌써 말이 어눌해지도록 취했다.
“온 이건 너무 벅차서.....”
하고 동혁은,
‘이런 때 누가 오지나 않나.’
하고 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마침 밖에서 잔기침 소리가 나더니,
“나리께 여쭙니다. 큰걱미 선인이 들어왔는뎁쇼. 내일 아침에 뱃짐을 내시느냐구 헙니다.”
하는 것은 머슴의 목소리다. 기천은,
“뭐? 뱃놈이 들어왔어?”
하더니,
“자 잠깐만 기다리게.”
하고 툇마루로 나간다. 그 틈에 주전자 뚜껑은 또 소리없이 열렸다. 기천이가 벼를 실릴 분별을 하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동혁은,
“어이구, 벌써 가슴이 다 두근두근허는 걸요.”
하고 가슴에다 손을 대며 금방 술을 마시고 난 것처럼, 알콜 기운을 내뿜는 듯이 후우 하면서 술잔을 주인의 앞에다 놓았다.
남포에 불을 켜는데, 밥상이 나왔다. 반주가 또 한주전자나 묵직하게 나오고, 어느 틈에 닭을 다 볶아서 주인과 겸상을 하였다. 기천이가 상놈하고 겸상을 해보기는 처음이리라.
‘아무리 요샛세상이기루 볼 건 봐여지. 우리네 허구야 원판 씨가 다르니까.....’
하고 남의 집 잔치 같은 데를 가서도 자리를 골라 앉는 사람으로는, 크게 용단을 내었고, 실로 융숭한 대접이다. 동혁은,
‘놈이 발이 제려서......’
하면서도,
“전 저녁을 먹구 왔지만, 세잔갱작[洗盞更酌,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른다]이라는데, 자 이번엔 반주루 한 잔 더 드시지요.”
하고 이번에는 공기에다 가득히 따라서 권하니까,
“이거 자네 협잡을 했네그려. 그저 끄떽 없는 게 수상쩍은걸.”
하면서도 기천은 인음증[引飲症,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자꾸 마시려고 하는 버릇]이 대단한 사람이라, 인제는 술이 술을 끌어들여서, 동혁이가 받아든 술은 제 눈앞에서 아니 남기고, 주전자에다가 짓는 것을 멀거니 보면서도,
“과헌걸 과해.”
해가며 연거푸 마신다. 그만하면 온 세상이 다 내것처럼 보일만치나 거나해졌다.
“참 이렇게 술에 고기에 주셔서 잘 먹습니다만, 특청 하나 헐 게 있어서 왔는데, 들어주시겠세요?”
그제야 동혁은 취한 체하면서 본론을 끄집어냈다.
기천은 몽롱한 눈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뜨고 상대자를 보더니, 다 붙은 고개를 내밀며 귓속말이나 들으려는 듯이,
“무슨 특청? 왜 아쉰 일이 있나?”
하고 귀를 갖다가 댄다. 특청이라면 으레 돈을 취해 달라는 줄 알고, 취중에도,
‘너두 그으예 나헌테 아쉰소리를 헐 때가 있구나.’
하는 듯이 연거푸,
“왜 돈이 소용이 되나?”
하고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은근히 묻는다.
“돈이 소용이 되는 게 아니라 빚을 갚으러 왔세요.”
“응? 빚을 갚으로 오다께? 자네가 언제 내 돈을 썼든가?”
“전 댁의 돈을 다 갚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위임을 맡어가지구 왔는데요.”
“다른 사람들이라니, 누구누구 말인가?”
“이번에 주인어른께서 새루 회장이 되신 우리 농우회의 회원들이 진 빚인데요. 저희들은 와 뵙구 말씀드리기 어렵다구, 제게다 맡겨서 심부름을 온 셈입니다.”
“허, 자네두 호사객[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일세그려. 더러들 썼지만 몇 푼 된다구. 하두 오래돼서 나두 잊어버렸는걸.”
하면서도 기천은,
‘너희들이 무슨 돈이 생겨서 한꺼번에 갚는다느냐.’는 듯이 고개를 까땍까땍하면서, 따개질[‘뜨게질’의 방언. 남의 마음속을 떠보는 일]을 하듯이 동혁의 눈치를 살핀다.
“수고스러우시지만, 뭐 적어두신 게 있을 테니 좀 끄내보셨으면 좋겠는데요.”
그 말을 듣자, 기천은 딴전을 부리듯,
“여보게, 우리 그런 얘긴 뒀다 허세. 술이 취해서 지금 옹송망송[뒤숭숭하게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고 흐리멍덩한 모양] 헌데.....”
하고, 고리대금업자는 살금살금 꽁무니를 뺀다. 동혁은 버쩍 다가앉으며,
“아니올시다. 일이 좀 급헌데요. 참 술김에 비밀히 여쭙는 말씀이지만, 주인어른께서 우리 회의 회장이 되신 데 대해서, 불평을 품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 줄은 짐작허시겠지요? 구중에 몇몇은 혈기가 대단해서, 제 손으루는 꺾을 수가 없는데, 이번에 좀 후허게 인심을 써주셔야, 과격헌 행동꺼정 허려구 벼르는 청년들을 어떻게 주물러볼 수가 있겠세요. 시세가 매우 급허길래 이렇게 찾아뵙구, 무사히 타첩[일 따위를 탈 없이 순조롭게 끝냄]을 허시두룩 허는 게니, 자중에 후회가 없두룩 허시는 게 상책일 것 같어요. 점잖으신 처지에, 혹시 길거리에서래두 젊은 사람들헌테 단단히 창피를 당허시면 거 모양이 됐습니까?”
하고 타이르듯 하니까, 기천은,
“아아니, 자네가 날 위협을 허는 셈인가?”
하며 빨끈하고 쇤다. 동혁은 정색을 하며,
“온 천만에 위협이라뇨. 그렇게 오해를 허신다면 무슨 일이 생기던 저버텀 발을 뺄 터니, 맘대루 해보세요!”
하고 정말 슬그머니 을러메었다. 기천은 상을 물리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숨이 가쁜 듯 벽에 가 기대어 쌔근쌔근하며, 한참이나 대 물뿌리만 잘강잘강 씹다가,
“그야 웃음읫 말일세만, 내 귀에두 이런 말 저런 말이 들리데. 저희들이 날 어쩌기야 허겠나만, 아닌 게 아니라 모두 마구 뚧은 창구녁 같어서 걱정일세. 나없는 새 회관 문짝을 걷어차서 떼어놨다니, 온 그런 무지막지헌 놈들이 있나. 허나, 자네 같은 체면두 알구 지각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좋두룩 무마를 시켜줄 줄 믿네.”
하고 금세 한풀이 꺾인다.
“그러니까 뒷일은 제게다만 맡겨주시구, 그 대신 제 말씀은 들어주셔야 합니다.”
하고 동혁은 바짝 들러붙었다.
제아무리 깐죽깐죽한 사람이라도, 술이 잔뜩 취한데다가 말을 아니 들음녀 당장에 저를 엎어누를 듯한 형세를 보이는 동혁의 위품에는, 한 손 접히지 않을 수 없었다. 신변의 위험을 모면하려는 것뿐 아니라, 저 딴에는 술기운에 마음이 커져서,
“어디서 돈들이 생겨서 한몫 갚는다는 건가?”
하고 머리맡의 문갑을 열고, 극비밀로 넣어둔 치부책을 꺼내는데, 열쇠가 제 구멍을 찾지 못할 만치나 수전증이 나서, 이 구멍 저 구멍 허투루 꽂다가 열었다.
동혁은, 그 돈이 삼사 년 동안이나 죽을 애를 써서, 모은 돈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서류를 꺼내서 채권자가 적어둔 것과 차용증서를 일일이 대조를 해서, 금액을 맞추어본 뒤에 수건에 꼭꼭 싸서 허리에차고 온 지전 뭉치를 꺼내더니,
“자아, 세보시지요.”
하고 밀어놓는다.
기천의 눈은 버언해졌다.[어두운 가운데 밝은 빛이 비치어 조금 훤하다] 담뱃진이 노랗게 앉은 손가락에 침 칠을 해가며, 지전을 세어보더니,
“이걸루야 빠듯이 본전밖에 안 되네그려?”
하고 변색을 한다. 동혁은,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하고 위엄 있게 기천을 똑바로 쏘아보며,
“아아니, 그럼 오 푼 변으루 놓은 걸 변리까지 다 받으실 줄 아셨든가요? 법정 이자두 두 푼 오 리밖에 아니 되는데, 그 사람들의 사폐[사정]를 봐줍시사구, 제가 일부러 온 게 아니겠세요? 그 사람들이 안내겠다구 버티면 어떡허실 텝니까? 그 여러 사람을 걸어 재판을 허려면, 소송비용이 얼마나 들지두 따져보면 아시겠지요?”
하고 무릎이 마주 닿도록 더 부쩍 다가앉는다. 기천은 바윗덩이만한 사람에게 짓눌릴 것 같아서,
‘저눔이 여차직허면 날 한구석에다 몰아넣구 목줄띠라두 조르지 않을까.’ 하고 속으로는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여보게, 내가 자선사업으루 돈놀이를 허는 줄 알었나? 인제 와서 천 원 돈에 가까운 이자를 한푼두 받지 말라는 거야. 될 뻔이나 헌 수작인가?”
하고 실토를 하면서 앙버틴다. 동혁은 그 말에 정말로 흥분이 되어서,
“아, 그래 회장 체면에, 앞으루두 고리대금을 해자실 텝니까? 그만큼 긁어모았으면 흡족허지, 죽지 못해 사는 회원들의 고혈까지 긁구두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을까요? 그 돈인즉슨 조합에 근저당을 해놓구 한푼두 못 되는 변리루 얻어다가, 오 푼씩, 심허면 장변까지 논 게 아닙니까?”
하고 목소리를 버럭 높이며, 목침을 들어 장판 바닥이 움쑥 들어가도록 탁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기천의 가슴도 쿵 하고 울렸다. 그래도 기천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노랑 수염만 베틀어 올리면서 꽁꽁하고 안간힘을 쓰더니, 최후로 용기를 내어 발악한듯,
“난 헐 수 없네!”
하고 똑 잡아뗀다. 기한을 몇 번만 넘기면 채무자를 불러다 세워놓고, ‘이놈아, 이 목을 베고 재칠 놈 같으니라구. 외손 씨아에 불알을 넣고는 배겨두, 내 돈을 먹군 못 배길라’하고 진땀이 나도록 기름을 짜던 솜씨라, 아무리 동혁의 앞이라도 돈에 들어서만은, 저의 본색을 나타내는 것이다.
“저엉 헐 수 없을까요?”
동혁의 얼굴이 뻘게졌다. 싸근거리는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두 번 말헐 게 있나. 헐 수 없으니깐 헐 수 없다는 게지.”
그 말을 듣자, 동혁은,
“그럼, 나 역시 헐 수 없쇠다. 우격으루 될 일이 아니니까요.”
하고 기천의 앞에 내놓았던 지전 뭉치를 도루 집어, 꼭꼭 싸서 허리춤에다 차며,
“허지만, 이 돈은 졸연히 받지 못헐 줄 아세요. 앞으루 무슨 일이 생기든 나는 책임을 질 수두 없구요.”
하고 목침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섰다.
동혁이가 장지를 탁 닫고 나갈 때까지, 기천은 달싹도 아니하고 앉았다. 신발 소리가 어둑침침한 마당으로 내려가는 것을 듣고야 발딱 일어나서,
“여게, 날 좀 보게.”
하고 쫓아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동혁의 말따나 까딱하면 본전도 건지기가 어렵고, 두고두고 녹여서 받는 대도, 여간 힘이 들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기만이에게 오백 원이나 급전을 도적맞아서, 그 벌충을 대야만 되게 된 형편인데, 또 한편으로는 동혁이가 감정이 잔뜩 난 회원들을 선동해가지고, 밤중에 습격이라도 할 것 같아서 미상불 겁이 났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동혁의 대답은 매우 퉁명스럽다.
“이리 잠깐만 들어오게.”
“들어감 뭘 허나요.”
“글쎄, 잠깐만 들어와. 이 사람 왜 그렇게 변통수가 없나?”
동혁은 못 이기는 체하고 따라 들어갔다.
“그거 이리 내게. 오입해 없센 셈만 치지.”
하고 기천은 손을 벌린다. 동혁은,
“그럼, 그 차용증서 모아둔 걸 이리 주시지요.”
하고 돈과 차용증서를 바꾸어 들었다. 그러고는 눈을 꿈벅꿈벅 하더니,
“매사는 불여튼튼[튼튼히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라는데, 돈을 한푼두 안 남기구 다 받었다는, 표를 하나 써주시지요.”
해서 빚 갚은 증서를 쓰이고 도장까지 찍게 하였다. 동혁은 그제야 수십 장이나 되는 인찰지[미농지에 괘선을 박은 종이. 흔히 공문서를 작성하는 데 쓴다.]를 구겨 쥐고,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재떨이 위의 성냥을 집어 확 그어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