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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김부식 2, 김돈중, 김군수)
2021. 11. 22. 7:46
https://blog.naver.com/jaseodang/222575101387
明年二月, 賊以我起土山逼之, 欲於城內築重城. 富軾聞之曰, “賊雖築城何益?” 尹彦頣·池鍚崇曰, “大軍之出, 今已二年, 曠日持久, 事變難料. 不如潛師突擊, 破重城, 可以成功.” 富軾不聽. 彦頣固請, 於是, 分銳兵爲三道, 陳景甫·王洙及刑部員外郞朴正明, 閤門祗候金禮雄等, 將三千人, 爲中道. 鍚崇·全鎔, 殿中內給事李侯等, 將二千人, 爲左道, 李愈及閤門祗候李永章·金臣璉等, 將二千人, 爲右道.
이듬해 2월 아군이 흙산을 쌓아올려 공격하는 것에 대항해 적은 성안에 겹성을 새로 쌓으려고 했다. 김부식이 보고를 받고는 “적이 비록 성을 쌓은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윤언이(尹彦頤)와 지석숭(池錫崇)이, “대군이 출병한 지 벌써 2년이 지났는데 쓸데없이 시간만 질질 끌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몰래 기습작전을 펴서 적의 겹성을 파괴해 버리면 손쉽게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건의했지만 김부식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언이가 굳이 청하자 비로소 정예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진경보(陳景甫)·왕수(王洙) 및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박정명(朴正明), 합문지후(閤門祗候) 김예웅(金禮雄) 등은 3천명을 거느리고 중도(中道)를, 지석숭·전용(全鎔)과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이후(李侯) 등은 2천명을 거느리고 좌도(左道)를, 이유(李愈)와 합문지후 이영장(李永章)·김신련(金臣璉) 등은 2천명을 거느리고 우도(右道)를 각각 맡게 했다.
將軍公直, 以所領兵, 入石浦道, 將軍良孟, 入唐浦道, 又使諸軍分道攻城, 無令賊專備西南隅. 部分訖, 厚賜軍士, 富軾還抵中軍. 至夜四鼓, 輕騎馳入前軍, 勒諸將大擧.
장군 공직(公直)은 부대를 지휘해 석포(石浦) 길로 들어가고, 장군 양맹(良孟)은 당포(唐浦) 길로 들어가게 했으며, 또 모든 부대로 하여금 공격로를 분담해 공격하게 함으로써, 적이 서남쪽 귀퉁이에 몰려 수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부대 편성이 끝나자 군사들에게 후하게 물품을 내려 준 뒤 김부식은 중군으로 되돌아왔다. 밤 사경(四更 : 새벽 2시경)이 되자, 경무장 차림으로 말을 달려 전군에 가서 장수들에게 총공격을 명령했다.
丁巳昧爽, 景甫軍入楊命門, 拔賊柵, 進攻延正門, 鍚崇軍踰城入, 攻含元門, 李愈軍亦踰城, 攻興禮門. 富軾以衙兵, 攻廣德門. 賊徒以我土山未就, 不設備, 及諸軍突至, 惶遽無所措. 富軾與正純督戰, 將士爭奮, 諸軍亦鼓譟, 縱火燒城屋, 賊兵大潰. 官軍乘勝, 恣其斬馘, 富軾令曰, “擒賊者賞, 殺降及剽掠者死.” 士皆斂刃而進.
정사일 새벽에 진경보가 인솔한 부대가 양명문(楊明門)으로 들어가 적의 목책을 뽑아버리고 진격하여 연정문(延正門)을, 지석숭의 군은 성을 넘어 들어가 함원문(含元門)을, 이유의 군도 성을 넘어 흥례문(興禮門)을, 김부식은 직속 부대로 광덕문(廣德門)을 각각 공격하였다. 적들은 아군의 흙산이 미처 축조되지 못했다고 하여 방비하지 않고 있다가, 아군이 총공격을 개시하자 당황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김부식이 김정순(金正純)과 함께 전투를 독려하자 장병들이 다투어 진격했으며, 모든 부대들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불을 놓아 성과 집을 태우자 적병은 크게 무너졌다. 관군이 승세를 타고 함부로 사람들의 목을 베자 김부식은 명을 내려, 적을 사로잡는 자는 상주고 항복한 자를 죽이거나 노략질하는 자는 죽일 것이라고 하자, 군사들이 모두 칼날을 거두고 진격하였다.
會日暮雨作, 麾兵而却, 生擒及降者, 送順化縣, 飮食之. 是夜, 城中潰亂, 匡不知所爲, 闔家自焚死. 郞中維偉侯·彭淑·金賢瑾, 皆縊死, 鄭璇·維漢侯·鄭克升·崔公泌·趙瑄·金澤升, 並自刎.
때마침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자 군사를 지휘하여 퇴각하게 하고 사로잡은 자들과 항복한 자들은 순화현(順化縣 : 지금의 평양 순안구역 및 평안남도 평원군)으로 보내어 음식을 제공했다. 이날 밤 성이 함락되어 소동이 일자 조광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온 가족과 함께 불을 질러 자결했다. 낭중(郞中) 유위후(維衛侯)·팽숙(彭淑)·김현근(金賢瑾)도 모두 목매어 자결하고, 정선(鄭璇)·유한후(維漢侯)·정극승(鄭克升)·최공비(崔公泌)·조선(趙瑄)·김택승(金澤升)도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戊午, 西人執賊魁崔永等出降, 富軾受之下吏, 慰諭軍民老幼婦女, 令入城保家室. 使御史雜端李仁實, 侍御史李軾, 御史崔子英, 封府庫, 分兵守諸門, 使正純·彦頣·金鼎黃, 率兵三千人, 入頓觀風殿, 號令城中禁虜掠.
무오일에 서경 사람이 적의 수괴 최영(崔永) 등을 체포해 성을 나와 항복하니, 김부식은 그들을 인수해 관리에게 넘겨주고 군사와 백성, 늙은이와 어린이, 부녀자들을 잘 위무한 다음 성으로 들어가 집안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어사잡단(御史雜端) 이인실(李仁實), 시어사(侍御史) 이식(李軾), 어사(御史) 최자영(崔子英)을 시켜 관부의 창고를 봉쇄하고 군사를 나누어 모든 문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정순(金正純)·윤언이(尹彦頤)·김정황(金鼎黃)에게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관풍전(觀風殿)에 들어가 관아를 정돈하게 했으며, 성 내에 엄명을 내려 약탈을 금지했다.
己未, 以郞中申至冲, 爲收拾兵仗使, 李侯爲百姓和諭安居使, 朴正明爲監檢倉庫使, 閤門祗候李若訥爲客館修營使, 錄事崔襃稱·白思淸, 爲城內左右巡檢使. 辛酉, 富軾備軍儀, 入景昌門, 坐觀風殿西序, 受五軍兵馬將佐賀. 使人祠諸城隍神廟, 撫慰城中使按堵.
기미일에 낭중(郞中) 신지충(申至冲)을 수습 병장사(收拾兵杖使)로, 이후(李侯)는 백성 화유안거사(百姓和諭安居使)로, 박정명(朴正明)은 감검창고사(監檢倉庫使)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이약눌(李若訥)은 객관수영사(客舘修營使)로, 녹사(錄事) 최포칭(崔襃稱)·백사청(白思淸)을 성내 좌·우순검사(城內左右巡檢使)로 각각 임명했다. 신유일에 김부식은 군대의 의장을 갖추고 경창문(景昌門)으로 들어가 관풍전 서쪽의 서(序)에 앉아 오군 병마장좌(五軍兵馬將佐)의 하례를 받았다. 또 모든 성황신묘(城隍神廟)에 제사를 지내게 한 후 성 내의 모든 백성들을 위무하여 안심시켰다.
遣兵馬判官魯洙, 奉表獻捷曰, “王者之師, 有征無戰, 天威所被, 已日乃孚. 臣聞光武之征隗囂, 三年乃定, 德宗之討希烈, 四載而平. 蠢爾姦兇, 據我城邑, 罪已浮於梟獍, 惡亦積於丘山. 惟睿算之無遺, 至期年而斯剋.
또 병마판관(兵馬判官) 노수(魯洙)를 개경으로 보내어 승전을 알리는 표를 올리게 했다. “왕도를 행하는 군주의 군대는 정벌은 하되 전투는 하지 않았으므로 주상의 하늘같은 위엄이 끼친 곳은 하루 만에 우리를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듣건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는 외효(隗囂)를 정벌한지 3년 만에 평정하였고, 당나라 덕종(德宗)은 희열(希烈)을 토벌한지 4년만에 평정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리석은 간흉들이 우리의 성읍(城邑)에서 버티면서 효경(梟獍 : 효(梟)는 어미새를 잡아먹는 올빼미, 경(獍)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 배은망덕하고 흉악한 인물의 비유)같은 짐승을 능가하는 죄를 저질렀고, 언덕과 산보다 더 많은 악행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 빠뜨림 없는 주상의 현명하신 계책으로 불과 1년만에 진압했습니다.
銜枚踰堞, 列兵攻門, 士纔交鋒, 賊已褫氣. 步騎奮而霆擊, 呼譟進而濤崩. 雲旝雷車, 直斬鯨鯢之鬣, 風聲鶴唳, 渾爲金革之音. 鼎魚環走以求生, 林鳥驚翔而迸散. 其罪重而自知不免者, 斮産息以燒亡, 其志劫而不能引決者, 甘鼎鑊以見俘, 積日之憂, 一朝頓釋.
군마를 정숙히 하고서 성벽을 넘었으며 군사를 정렬시켜 성문을 공격하니 무기가 맞부딪히자마자 적은 이미 기세가 꺾여버렸습니다. 보병과 기병이 분격해 우레같이 맹렬히 공격했으며, 북소리와 함성을 울리며 진군하니 적군은 파도처럼 붕괴되었습니다. 운괴(雲旝 ; 구름처럼 많은 기)와 뇌차(雷車 ; 뇌성과 번개)가 그대로 악당들의 목을 베어버렸으며,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 소리도 칼과 갑옷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 버렸습니다. 적도들은 솥 안의 갇힌 고기처럼 뱅뱅 돌면서 살길을 찾았고, 숲속의 새가 놀라 날아오르는 것처럼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저지른 죄가 무거워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아는 자들은 갓난아이마저 다 베어버리고 불에 타 자결했으며, 비겁해서 자결할 수도 없는 자들은 솥[鼎鑊)]에 삶겨 죽이는 형벌을 감수하고 포로가 되었으니, 오래된 근심이 하루아침에 모두 풀렸습니다.
於是, 入淮西而宣布上意, 如解倒懸, 復長安而撫綏遺黎, 盖云歸處. 豈特市廛之不改, 巍乎城闕之俱存. 毒螫旣除, 腥膻已滌, 遂掃離宮之氛祲, 聿瞻原廟之衣冠黼坐僾然, 仍几如舊. 父老士女, 漁樵芻蕘, 踴躍爭前, 驩呼相詡謂, “不圖於今日, 乃復得爲王人.”
이때 성안으로 들어가 주상의 뜻을 선포하니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던 사람을 풀어준 것 같았고, 서경을 수복한 후 남아 있는 백성들을 위무하니 다들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저자의 가게들이 온전히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성과 궁궐도 우뚝히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적도들이 끼친 해독이 이미 제거되었고 흉악한 비린내도 벌써 씻겨져서, 이궁(離宮)을 덮었던 요망한 기운을 쓸어내고 우러러보니, 원묘(原廟 ; 종묘(宗廟) 외에 따로 세운 별묘(別廟))의 의관과 옥좌가 은은하여 그대로 예전과 같았습니다. 노인과 남녀, 어부와 나무꾼과 꼴베는 백성들과 천민이 다투어 뛰어나와 용약환희(껑충껑충 뛰며 기뻐함)하면서 ‘오늘 드디어 다시 우리 임금의 백성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소리치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此乃陛下體天地之常生, 用神武而不殺. 三靈薦祉, 四海輸誠, 電掣風驅, 肆捷一戎之定, 川渟嶽峙, 允懷萬世之安. 臣等親承睿謀, 出管師律, 賴聖神之造, 惟以斷成, 非將帥之才, 愧無拙速.
이것은 바로 폐하께서 하늘과 땅이 상생하는 원리를 본받으시어 뛰어난 무용을 쓰면서도 살생하지 않으신 덕분입니다. 삼령(三靈 ; 천신(天神)•지기(地祇)•인귀(人鬼))이 복을 올리고 사해(四海)가 정성을 보내니 적도들을 번개가 제압하고 바람이 몰아내어, 순식간에 크나큰 전쟁이 평정되었으며, 냇물은 머물고 산악은 우뚝 솟아 진실로 만세의 평화를 품고 있습니다. 신 등이 친히 폐하의 뛰어난 계책[睿謀)]을 받자옵고 출병하여 군[師律)]을 맡아 지휘했지만, 성스럽고 빼어난 계책에 힘입어 오늘의 승리를 이루었을 뿐, 장수로서의 재능이 없어 신속히 승리하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나이다.”
壬戍, 承朝旨, 斬崔氷及大將軍黃麟, 將軍德宣, 判官尹周衡, 注簿金智·趙義夫, 長史羅孫彦, 梟首市街三日. 以分司戶部尙書宋先宥, 自兵興, 稱疾闔門, 掌書記吳先覺, 佯愚不附賊, 大倉丞鄭聰, 以孝行聞, 皆旌表門閭.
임술일에 조정의 지시에 따라 최영(崔永)과 대장군 황린(黃麟), 장군 덕선(德宣), 판관 윤주형(尹周衡), 주부(注簿) 김지(金智)·조의부(趙義夫), 장사(長史) 나손언(羅孫彦)을 참수해 사흘 동안 거리에 전시했다. 분사호부상서(分司戶部尙書) 송선유(宋先宥)는 반란이 일어난 후로는 병을 핑계로 집의 문을 닫아걸었고, 장서기(掌書記) 오선각(吳先覺)은 바보인 척하며 적에게 가담하지 않았으며, 대창승(大倉丞) 정총(鄭聰)은 효행으로 알려졌으므로 집과 마을 입구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初西人斬妙淸等, 傳首闕下, 卽請中軍差留守官如平時, 富軾遣盧令琚, 將入城. 賊欲伺殺之, 醫學博士金公鼎, 密告其謀, 使令琚不入. 少監韋瑾英, 以有老母, 不能背賊, 與韓儒琯·安德偁·金永年, 僞爲轜車若送喪, 將出門.
애초에 서경 사람들이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내고 나서 곧장 중군에 요청해 평상시처럼 유수관(留守官)을 보내달라고 하자 김부식은 노령거(盧令琚)로 하여금 성으로 들어가게 했다. 적이 기회를 엿보아 그를 죽이려고 하자 의학박사(醫學博士) 김공정(金公鼎)이 몰래 그 음모를 알려와 노령거에게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소감(少監) 위근영(韋瑾英)은 노모가 있어 적을 배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유관(韓儒琯)·안덕칭(安德偁)·김영년(金永年)과 함께 거짓으로 상여를 만들어 초상을 치르는 것처럼 위장하고 성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事洩, 瑾英·儒琯被執, 榜掠炮烙至死, 終不援引, 故德偁·永年得免. 公鼎·瑾英·儒琯·德偁·永年及尹瞻親屬與老幼廢疾者, 皆原之, 其餘並執送京師下獄. 其勇悍抗拒者, 黥西京逆賊四字, 流海島. 其次, 黥西京二字, 分配鄕部曲, 其餘分置諸州府郡縣, 妻子聽任便, 許爲良人. 匡·永等七人, 知常·壽翰·妙淸·旵·浩·鄭璇·金信·信弟致·李子奇·趙簡·鄭德桓等妻子, 並沒爲東北諸城奴婢.
그러나 일이 누설되어 위근영·한유관이 잡혔는데, 혹독한 고문을 당해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끝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았으므로 안덕칭과 김영년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김공정·위근영·한유관·김영년 및 윤첨(尹瞻)의 일가친척 및 노인과 어린아이와 불구자들은 모두 용서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개경으로 압송해 하옥시켰다. 그 가운데 거세고 사납게 항거한 자들은 얼굴에 먹물로 ‘서경 역적(西京逆賊)’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 바닷섬으로 유배보냈다. 그 다음가는 죄인들은 먹물로 ‘서경(西京)’이라는 두 글자를 새기고 향(鄕)·부곡(部曲)으로 나누어 유배보냈고, 그 나머지는 여러 주·부·군·현으로 분산시켰으며, 처자식들은 편리한 거주지를 택하게 하고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조광(趙匡)·이영(李永) 등 일곱 명과 정지상(鄭知常)·백수한(白壽翰)·묘청(妙淸)·유참(柳旵)·유호(柳浩)·정선(鄭璇)·김신(金信), 김신의 동생 김치(金致), 이자기(李子寄)·조간(趙簡)·정덕환(鄭德桓) 등의 처자식은 모두 적몰해 동북쪽 여러 성의 노비로 삼았다.
三月, 王遣左承宣李之氐, 殿中少監林儀, 賜富軾衣服鞍馬金帶金酒器銀藥合, 詔曰, “逆雛趙匡, 以瑣瑣小醜, 據險陸梁, 逋誅旣久. 非不知乘將卒欲戰之心, 倂力剪除, 俾無遺種, 乃緣西都是始祖興業之地, 又念生齒衆多, 皆吾赤子, 不忍一切屠滅之. 故詔命開慰, 至于再三, 庶幾易心歸順, 以體朝廷矜恤之典, 此卿之所具知也.
3월 왕이 좌승선(左承宣) 이지저(李之氐)와 전중소감(殿中少監) 임의(林儀)를 보내어 김부식에게 의복, 안장 딸린 말, 금 허리띠, 금 술그릇, 은제 약상자를 내려주고 이런 조서를 내렸다. “역적 조무래기 조광이 하찮은 악당들을 데리고 험준한 성에 자리잡고서 제멋대로 날뛰며 극형을 피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장졸들의 적개심을 살려 힘을 합해 적도의 싹을 잘라버리고 아예 멸종시킬 수도 있었으나, 서도(西都 : 서경)는 시조께서 왕업을 일으킨 곳이며, 또 수많은 백성들이 모두 나의 적자(赤子)인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차마 그 모두를 죽여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짐은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설득했으니 이는 적도들이 마음을 돌려 귀순함으로써 조정이 긍휼한 마음으로 베푸는 은전을 받아들이도록 한 배려였음을 경도 자세히 알고 있다.
自從元惡妙淸等見殲於帳下之後, 岊嶺失策, 賊情一變, 戡定之功, 似不可一二日期也, 卿以文武之才都將相之任, 寬得士心, 沉機妙物, 凡所制禦之術, 已定於胸中. 始築城寨, 以休士卒, 終起土山, 以壓賊壘, 卒使逆類, 望風自潰, 束手出降. 不頓一戈, 下全城於反掌, 決不踰時, 收萬世之偉績, 非卿萬全之策, 不能至此.”
원흉인 묘청 등이 대장군의 장막에서 섬멸된 뒤, 아군이 절령(岊嶺)에서 저지른 실책으로 적의 마음이 일변한 결과, 반란의 신속한 평정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경은 문무의 재능으로써 장상(將相)의 임무를 총괄하며 관용으로 병사들의 신임을 얻었고,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심오한 작전과 신묘한 무기들을 이미 염두에 마련해 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과 목책을 쌓아 군사들을 쉬게 하고, 최후로 흙산을 쌓아올려 적의 성을 압도함으로써 마침내 역도들로 하여금 아군의 기세만 보고도 저절로 궤멸되어 성을 나와 항복하게 만들었다. 창 한 자루 부수지 않고도 손바닥 뒤집듯 성 전체를 항복케 하였으며 때를 넘기지 않고 결단을 내려 만세에 전할 위업을 거두었으니, 경의 완벽한 계책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拜輸忠定難靖國功臣 檢校太保 守太尉 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監脩國史上柱國兼太子太保. 又賜四軍兵馬使副判官以下, 銀·絹·綾羅各有差. 四月凱還, 賜富軾甲第一區.
김부식을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검교태보(檢校太保)·수태위(守太尉)·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 겸 태자태보(兼太子太保)로 임명하였다. 또 4군의 병마사(兵馬使)·부사(副使)·판관(判官) 이하에게는 은·비단·능라(綾羅)를 각각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4월 개선하자 김부식에게 성안의 큰 저택 한 채를 내려주었다.
十六年, 加檢校太師 集賢殿大學士 太子太師. 王嘗召富軾, 置酒命讀司馬光遺表及訓儉文, 歎美久之曰, “光之忠義如是, 時人謂之姦黨, 何也?” 富軾對曰, “以與王安石不相能耳, 其實無罪.” 王曰, “宋之亡, 未必不由此也.” 王遣國子祭酒林光, 就第勑賜金銀鞍馬·米布藥物, 賞平西之功也.
인종 16년(1138) 검교태사(檢校太師)·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태자태사(太子太師)로 올려 주었다. 왕이 언젠가 김부식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는 사마광(司馬光)의 「유표(遺表)」 및 「훈검문(訓儉文)」을 읽게 했다. 왕이 한참이나 그 문장을 두고 감탄하다가 “사마광의 충의가 이와 같은데, 그때 사람들이 간사한 무리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김부식이 “왕안석(王安石)과 서로 화합하지 못했을 뿐 실제로는 죄가 없습니다.”고 대답하자 왕은 “송나라가 망한 것은 이런 것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왕이 국자좨주(國子祭酒) 임광(林光)을 그의 집에 보내 금·은과 안장딸린 말 및 쌀·베·약재를 내려주니 이는 서경을 평정한 공에 대한 상이었다.
二十年, 三上表乞致仕, 許之, 加賜同德贊化功臣號, 詔曰, “卿年雖高, 有大議論, 當與聞.” 二十三年, 上所撰新羅高句麗百濟三國史, 王遣內侍崔山甫, 就第獎諭, 賜花酒. 毅宗卽位, 封樂浪郡開國侯, 食邑一千戶, 食實封四百戶, 命撰仁宗實錄.
20년(1142) 세 번이나 표문을 올려 벼슬을 물러나겠다고 요청하자, 허락을 내리고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하여 내려준 뒤 “경의 나이가 비록 많으나 의논할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응당 참여시켜 의견을 들을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23년(1145)에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사(三國史)』를 편찬해 올리자 왕은 내시(內侍) 최산보(崔山甫)를 집으로 보내 치하하고 화주(花酒)를 내려주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侯)로 봉하고 식읍(食邑) 1천호·식실봉(食實封) 4백호를 내려주면서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을 명했다.
五年卒, 年七十七, 謚文烈. 爲人豊貌碩體, 面黑目露. 以文章名世. 宋使路允迪來, 富軾爲館伴, 其介徐兢, 見富軾善屬文, 通古今, 樂其爲人. 著高麗圖經, 載富軾世家, 又圖形以歸奏于帝. 乃詔司局鏤板, 以廣其傳, 由是, 名聞天下. 後奉使如宋, 所至待以禮, 三掌禮闈, 以得士稱. 贈中書令, 配享仁宗廟庭, 有文集二十卷. 子敦中·敦時, 敦時, 官至尙書右丞, 死於鄭仲夫之亂.
의종 5년(1151)에 일흔일곱 살로 죽으니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넉넉한 외모에 큰 몸집을 지녔으며 안색은 검고 눈망울이 부리부리했다. 또 문장으로 널리 이름이 났다. 송나라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김부식이 관반(舘伴)이 되었는데, 사신의 수행원 서긍(徐兢)이 그가 글을 잘 짓고 역사적 사실에 밝은 것을 보고 그 사람됨을 좋아하게 되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저술하면서 김부식의 가계를 수록하고 또 그 생김새를 그려 가지고 돌아가서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가 사국(司局)에 명령을 내려 판에 새겨서 널리 전하게 하니, 이 때문에 김부식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으며, 뒤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가는 곳마다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또 세 번이나 과거를 주관해 인재를 선발하여 칭송을 받았다. 중서령(中書令)을 추증받고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집(文集) 20권이 있다. 아들은 김돈중(金敦中)·김돈시(金敦時)로, 김돈시는 벼슬이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으나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었다.
敦中, 仁宗朝擢魁科. 知貢擧韓惟忠等, 初擬第二, 王欲慰其父, 升爲第一, 屬內侍. 年少氣銳, 宮庭儺夕, 以燭燃鄭仲夫鬚, 仲夫由是銜之. 毅宗時, 累遷殿中侍御史, 王拜宦者鄭諴閤門祗候, 敦中不署告身, 左遷戶部員外郞, 轉侍郞.
김돈중(金敦中)은 인종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지공거 한유충(韓惟忠) 등이 애초에 차석으로 점수를 주었는데, 왕이 그의 부친을 위로하려고 수석으로 올려 내시(內侍)에 소속시켰다. 젊은데다 혈기가 왕성하여 궁궐 뜰에서 나례(儺禮 ; 음력 섣달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베푼 의식)하는 날 저녁에 촛불로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태우는 일을 저지르자 정중부가 이것 때문에 원한을 품었다. 의종 때 여러 차례 승진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는데, 왕이 환관 정함(鄭諴)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하자 김돈중이 그 고신장(告身狀 : 임관 사령서)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부원외랑(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가 시랑(侍郞)으로 옮겼다.
初吏部侍郞韓靖, 與李元膺構隙罷職. 王別創佛宇于仁濟院, 爲祝釐所, 適元膺死, 靖復職, 尤勤祝釐. 敦中與弟敦時, 重修富軾所創觀瀾寺, 亦以祝釐爲稱. 王謂敦中·敦時·靖曰, “聞卿等歸福寡人, 甚嘉之. 朕將往見.”
그 전에 이부시랑(吏部侍郞) 한정(韓靖)이 이원응(李元膺)과 틈이 생겨 파직되는 일이 있었다. 왕이 따로 인제원(仁濟院)에 사원을 지어 자신의 복을 비는 곳으로 삼았는데, 마침 이원응이 죽고 한정이 복직되어 더욱 부지런히 왕의 복을 빌었다. 김돈중은 동생 김돈시(金敦時)와 함께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관란사(觀瀾寺)를 중수하고서 이 사원도 왕의 복을 비는 곳이라고 선전했다. 왕이 김돈중·김돈시와 한정더러 “듣자하니 경들이 과인의 복을 빈다 하니 매우 가상하다. 짐이 가서 보겠노라.”고 하였다.
敦中等, 又以寺之北山童無草木, 聚旁近民, 植松栢杉檜奇花異草. 築壇爲御室, 飾以金碧, 臺砌皆用怪石. 一日, 王幸寺, 敦中等, 設宴于寺之西臺, 帷帳器皿甚華侈, 饌羞極珍奇. 王與宰輔近臣歡洽, 賜敦中·敦時白金各三錠, 靖二錠, 羅絹各十匹, 丹絲各七十斤.
관란사의 북쪽 산이 초목이 없는 민둥산이었기에 김돈중 등은 인근의 백성들을 모아 소나무·잣나무·삼나무·회나무와 기이한 꽃과 풀을 심었다. 또 단을 쌓아 왕이 머물 방을 만들어 금과 푸른 옥으로 치장하고, 대(臺)와 섬돌은 모두 괴석을 사용하였다. 어느 날 왕이 사원에 행차하자 김돈중 등은 사원의 서쪽에 있는 대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장막과 그릇들이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으며 음식도 지극히 진기했다. 왕은 재상 및 근신들과 함께 대단히 즐거워하며 김돈중과 김돈시에게 백금(白金 : 은) 각 3정, 한정에게 2정, 비단 각 10필, 붉은 실 각 70근을 내려주었다.
二十一年, 敦中拜左承宣. 燈夕, 王如奉恩寺, 夜還, 至觀風樓. 敦中馬素不調, 聞鉦鼓聲益驚, 突觸一騎士, 矢房矢躍出, 落輦傍. 敦中不遑自首, 王驚愕, 以爲流矢. 以儀衛繖扇擁輦, 疾馳還宮, 宮城戒嚴, 命有司榜街市購捕, 逮者甚衆. 王疑大寧侯暻家僮羅彦等所爲, 酷加鞫問, 誣服, 遂斬之. 又以禁衛不謹, 流牽龍巡檢指諭等十四人.
21년(1167) 김돈중은 좌승선(左丞宣)으로 임명되었다. 연등회(燃燈會) 날 저녁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한 후 밤에 돌아오다가 관풍루(觀風樓)에 당도했다. 김돈중의 말이 본래 길이 잘 들지않은지라 징과 북소리를 듣고 놀란 나머지 달리다가 한 기병과 부딪히는 바람에 화살통에서 화살이 튀어나와 임금의 수레 곁에 떨어졌다. 김돈중이 스스로 사정을 밝힐 겨를도 없이 왕은 경악하여 그것을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날아온 화살로 생각했다. 호위병의 일산과 큰 부채로 수레를 가린 채 궁궐로 급히 돌아와 궁성을 엄히 경계하는 한편, 해당 관청에 명하여 거리에 현상을 건 방을 붙이게 했더니 체포된 자가 대단히 많았다. 왕은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의 집 종 나언(羅彦) 등이 한 짓으로 의심하여 혹독히 국문하였으며 고통에 못 이겨 거짓으로 자백하자 그를 참수했다. 또한 금위가 성실히 근무하지 않았다하여 견룡지유(牽龍指諭)와 순검지유(巡檢指諭) 등 열네 명을 유배보냈다.
時王數幸延福亭, 與韓賴·李復基·許洪材等宴飮. 一日, 將移御念賢寺, 乘輿已駕, 又置酒舟中, 相與沈醉, 夜分忘歸. 衛士深怨韓·李, 敦中前白王曰, “自朝至夜, 扈從軍卒, 皆飢倦, 王何樂之甚? 夜且晦冥, 有何觀覽, 久留此耶?”
당시 왕은 연복정(延福亭)으로 자주 거둥하여 한뢰(韓賴)·이복기(李復基)·허홍재(許洪材) 등과 함께 술자리를 열었다. 어느 날 염현사(念賢寺)로 자리를 옮기려고 수레까지 준비해 두었는데 배 안에서 술자리를 열고 다들 대취하여 한밤중까지 머물러 버렸다. 호위 군사들이 한뢰과 이복기를 크게 원망하자, 김돈중이 왕을 찾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호종하는 군사들이 모두 굶주리고 피곤해 하는데 주상께서는 무엇이 그리 즐거우십니까? 밤 또한 어두운데 무슨 구경할 것이 있어 여기에 오래 머무르십니까?”
王不悅而出, 已向曉矣. 普賢之變, 敦中亦從王行, 在途聞變, 佯醉墮馬, 逃入紺獄山. 鄭仲夫挾宿怨, 購之甚急. 敦中密使從者入京城, 候家安否, 從者利重賞以告, 殺之于沙川邊. 敦中臨死嘆曰, “吾不黨韓·李, 實無罪. 但流矢之變, 禍延無辜, 今日之及宜矣.” 子君綏.
왕은 불쾌해 하며 밖으로 나왔는데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보현사(普賢寺)의 변란 때 김돈중도 왕의 행차에 호종했다가 도중에 변란의 소식을 듣고 취한 척하며 말에서 떨어져 감악산(紺嶽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정중부가 그에게 묵은 원한이 있었기에 현상을 걸고 체포를 독촉했다. 김돈중은 몰래 종자를 시켜 개경으로 들어가서 집의 안부를 묻게 했는데, 종자가 많은 상금에 욕심이 나서 고발하는 바람에 그는 붙잡혀 사천(沙川) 가에서 처형당했다. 김돈중은 죽을 때, “내가 한뢰·이복기와 한패가 아니었으니 실제로 죄가 없다. 다만 화살 때문에 일어난 소동 당시 재앙이 죄 없는 사람에게 미쳤으니 내가 오늘 이 지경이 된 것도 마땅한 일이다.”고 탄식하였다. 아들은 김군수(金君綏)이다.
君綏, 年未弱冠, 文學富贍, 儕輩推爲巨手. 明宗朝, 擢魁科, 直翰林院, 高宗初, 拜侍郞. 時朝臣出使, 或有貪冒侵漁者, 民多怨咨. 君綏與李宗揆·宋安國·金周鼎·崔正份等十一人, 被選爲諸道察訪使, 問民疾苦, 察吏淸汚. 適有契丹兵, 未遑廉按, 宗揆·安國·周鼎, 皆以黜陟不精, 見貶, 獨正份激揚得宜.
김군수(金君綏)는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에 벌써 글과 학문의 재능이 풍부하여 동년배들로부터 거장으로 추앙받았다. 명종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고, 고종 초에는 시랑(侍郞)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왕의 사자로 나갈 경우, 백성들의 재물에 탐욕을 내어 강탈하는 자가 간혹 있어 백성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김군수는 이종규(李宗揆)·송안국(宋安國)·김주정(金周鼎)·최정분(崔正份) 등 11명과 함께 제도찰방사(諸道察訪使)로 선발되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알아내고 관리들의 부정을 감시했다. 때마침 거란(契丹)이 침입하여 감찰을 할 겨를이 없었고, 이종규·송안국·김주정은 관리를 평가하여 신상필벌하는 것이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좌천되었지만, 최정분만은 신상필벌의 판단이 정확했다.
君綏後拜左諫議大夫, 代趙冲, 爲西北面兵馬使, 以淸白愛民稱. 契丹兵至肅州永淸之境, 君綏率諸城兵擊之, 斬四百三十餘級, 虜二十一人, 獲馬五十餘匹. 及韓恂·多智叛, 君綏仍知中軍兵馬事, 討之, 以計斬恂·智, 函首送于京. 兵馬使金就礪嗛其不先報己, 乃囚君綏. 管下錄事, 有盧仁綏者, 素與君綏有隙, 因數譖就礪, 又譖崔怡, 遂流君綏于漢南, 時人寃之.
김군수는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임명되고 조충(趙冲)을 대신하여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으며,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한다는 칭송을 받았다. 거란군이 숙주(肅州 : 지금의 평안남도 숙천군)·영청(永淸 : 지금의 남포시 용강군) 땅에 이르자, 김군수는 여러 성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을 감행해 430여 명의 목을 베고 21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50여 필을 노획했다. 한순(韓恂)·다지(多智)가 반역하자 김군수는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토벌에 나서 빼어난 작전으로 한순과 다지의 목을 베고는 상자에 넣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병마사(兵馬使) 김취려(金就礪)가 자기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은 것을 불쾌히 여기고 김군수를 가두었다. 또 김군수가 다스리는 관할 구역 안의 녹사(錄事) 노인수(盧仁綏)라는 자가 평소에 김군수와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김취려에게 헐뜯는 말을 했고 또 최이(崔怡)에게도 헐뜯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결국 김군수는 한남(漢南 :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에 유배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원통하게 여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 열전,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고려사 열전 (김부식 2, 김돈중, 김군수)|작성자 jaseo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