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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화쟁 철학과 탈현대 철학의 비교연구 / 이도흠
A Comparative Study on the Hwajaeng Buddhism and Post-modern Philosophy
[열린논단] 3회 - 2009년 3월 27일
이도흠 교수
[열린논단]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 과정철학연구소 주최 국제학술대회: “과정과 한”
<국문요약>
원효의 화쟁사상을 탈현대 철학과 비교해 보았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존재를 과정과 생성의 관계로 파악하고 이 세계를 서로 깊은 관련을 맺는 하나의 시스템, 곧 부분과 전체가 서로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부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부분인 관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생성, 혹은 과정 철학과 유사하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지구상의 온 생명체를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심층생태론과 통한다. 하지만, 화쟁의 불일불이의 전제는 공이다. 공이 생성과 과정의 전제조건이 되는 점이 이들 철학과 다르다.
변동어이의 차이는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과 통한다. 양자 모두 개념적 차이를 넘어서서 차이 그 자체,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생성하는 차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반면에 변동어이의 차이는 이분법을 완전히 넘어서서 일심을 지향하는 대신 차이가 실은 힘과 힘 사이의 관계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때문에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세력과 사회적 맥락, 특히 오이디푸스화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유용하지 못하다. 차이가 영원회귀의 반복을 하여 차이를 생성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와 일심은 이성중심주의와 언어를 해체하고 이를 통하여 진리에 이르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진리, 실체, 본질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그렇지 않음을 드러내면서도 정작은 자신은 비어있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이름으로는 이를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음도 통한다. 하지만 화쟁의 사유는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화쟁은 중도의 원리에 따라 언어와 세계, 이성과 이성 너머의 깨달음, 해체와 구성 또한 하나로 아우른다.
이제까지 논증한 것처럼,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분법과 분별을 해체하고 일심의 본원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면에서는 탈현대철학과 통한다. 그러나 원효는 당위적으로 이항대립의 사유를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一心과 二門의 회통을 통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깨달음에 이르면서도 일상을 영위하고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삶, 부처와 중생, 깨달음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는 방편을 제시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주장대로 이성중심주의가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한 원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을 무시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생명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비판할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버마스의 말대로 합리성이 없다면 유토피아를 실현할 방법 또한 없다. 최치원이 상림을 조성하기 전에 둑을 쌓은 것처럼, 탈현대, 혹은 화쟁의 패러다임을 모색하되, 오늘의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며 구체적 대안을 모색하는 방편은 현대, 혹은 서양에서 빌려야 한다. 화쟁은 둘-서양, 현대, 합리성-과 하나-동양, 탈현대, 해체-또한 아우른다.
1. 머리말
포스트모더니즘은 서양의 현대를 부정하거나 해체하고 이와 구별되는 ‘또 다른 현대’, 혹은 ‘현대성의 위기로부터 탈출’을 모색한다.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포스트모던 철학이 현대의 부정이기에 중세의 철학과 유사성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이런 면에서 또 다른 현대로서, 혹은 서양의 현대와 대립적인 패러다임으로서 중세 동양 철학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이 논문의 출발점이다.
필자는 이런 취지로 「탈현대사상으로서 동양 철학의 가능성과 한계」 등의 논문을 발표했었다. 이번에 원효의 화쟁철학에 초점을 맞추어 대화를 시도한다. 원효(617-686)는 한국의 고대 왕국이었던 신라의 스님이자 불교철학자이다. 그는 87종 180여 권의 저서를 지었으며 이들 저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불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7세기 이래 여러 고승들의 저서에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20세기에도 그에 관한 논문이 700여 편, 석․박사 학위 논문만 100여 편이 발표되었다. 그는 불교의 다양한 이론과 논쟁점을 하나로 아우른 독특한 화쟁 철학을 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누더기 옷을 입고 민중 속으로 내려가 그들을 구원한 실천가이기도 하다.
7세기의 화쟁 철학을 20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비교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타당성을 갖는가? 이 비교 작업이 합리성, 보편성, 현재성을 가질 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 철학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서양 철학과 다른 토양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이루어진 동양 철학을 통해 서양 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이들과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신비주의적이고 반과학적이며 모호한 추상성을 추구한 동양사상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이성을 넘어선 깨달음을 추구한 동양 철학이라 하더라도 그 논증은 철저히 합리성에 입각하여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양자를 비교하는 작업은 어느 한 쪽의 위대성을 주장하거나 ‘동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을 넘어서서 양자의 대화를 통해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럴 때 이 작업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양자가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아울러 동양 철학에서 지혜를 얻는 일이 동양의 전제정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중세의 농업사회로 퇴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더 낫다. 오늘날의 복잡해진 사회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현들의 현학적이고 신비적인 은유 놀이로 그칠 뿐이다.
이런 취지에서 필자는 탈현대성의 철학에 대해 핵심 개념을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해체, 동일성의 사유를 지양한 차이의 사유, 인간중심주의와 실체론에서 떠나 생태론과 생성의 사유로 전이하거나 지향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각각에 대해 화쟁 철학과 비교하여 논하고자 한다. 단, 먼저 현대성과 탈현대성의 개념에 대하여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고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생태론과 생성의 사유부터 먼저 기술하고자 한다.
2. 현대성과 탈현대성의 개념
<표 1: 중세․현대․탈현대 개괄>
중세현대탈현대상부구조 신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 실체론과 이항대립주의 생성의 사유, 생태론적 패러다임 神聖의 지배 이성과 합리성의 원칙 이성중심주의의 해체, 이(différance) 신이 진리 진리의 절대성과 보편성 진리의 상대성, 불가지성 미신과 주술 과학, cosmos chaos 善, 또는 神이 美 예술의 세속화와 자기목적성 추구 예술의 異種性, 混種性과 해체 신에게 복속된 자아 주체, 동일성 상호주체성, 차이, 異他性(alterity) 생의 공간 현실 시뮬라시옹, 재현의 위기 로마와 중국 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 세계화와 지역화 중심의 문자 국가의 문자 이미지토대 봉건체제 자본제 후기자본제 전산업사회 산업사회 탈산업사회
탈현대의 철학은 입장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보인다. 크게 보아 현대성(modernity)의 철저한 부정이 강한 흐름인 가운데 이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성을 완성하고자 하는 사조도 강하며 양자를 절충한 입장도 있다.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탈현대 철학의 범주는 현대성에 대한 성찰적 반성․비판과 함께 대안을 모색한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모더니티는 토대이고 모더니즘은 이에 대한 상부구조이다. 중세, 현대, 탈현대를 체계적으로 비교하기 위하여 이를 토대와 상부구조로 나누어 범주화한다. 토대와 상부구조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토대가 상부구조를 최종 심급에서 결정한다. 토대를 나누는 것은 생산력과 생산양식의 차이다.
상부구조에서 중세와 현대, 탈현대를 가르는 변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聖과 俗의 관계, 세계에 대한 이해와 해석 양식, 진리 내지 이데아의 개념과 이해 방식, 자아나 주체에 대한 관점, 이 모든 것을 표상하는 방식의 차이다. 이것이 중세와 현대, 탈현대에 따라 어떤 변모양상을 나타내는지 개괄적으로나마 살피고 가고자 한다.
간단히 말하여, 중세는 장원을 중심으로 농노가 생산을 담당하고 영주가 이를 착취한 봉건적 생산양식을 바탕으로 한 사회이다. 현대는 노동자가 생산을 담당하고 자본가가 이들의 잉여노동을 착취하여 자본 축적을 이루는 자본제 사회이다. 탈현대 사회는 우주항공공학, 로봇 공학, 생명공학 등 첨단 과학기술이 잉여가치를 생성하고 창출하는 고도 산업사회이자 다국적 자본이 금융 및 정보재를 중심으로 전 세계 차원의 시장과 유통망을 바탕으로 거의 전세계에 걸쳐 착취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후기자본제 사회다.
중세가 장원경제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전산업사회라면, 현대는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전기, 연소기관을 동력으로 하여 산업의 획기적 발전을 이룬 산업사회이다. 탈현대는 화석연료, 전기, 연소기관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을 이루는 데서 벗어나 전자와 컴퓨터와 인터넷과 첨단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정보와 지식을 생산하고 상호 교환하는 탈산업사회다.
중세는 신 중심의 사회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란 성경의 말씀처럼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신의 의지와 간계에 따라 우주 삼라만상을 지배하고 통제한다고 생각하였다. 현대는 신을 죽이고 인간이 자신의 비전과 목적에 따라 세계를 기획하고 자신의 의지를 따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회다. 탈현대는 이런 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의 의도와 이해관계에 따라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여 현대화, 산업화하는 바람에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라는 모순을 야기했다고 판단하고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고 공존할 수 있는 생태적 패러다임을 지향한다. 현대가 실체론의 사고로 대상과 자연을 인식하였다면, 탈현대는 생성과 관계의 사유로 대상과 자연을 바라본다.
중세는 신성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신이 곧 이데아였으며, 신성에 어긋나는 것은 이단이었다. 반면에 현대에 들어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이데아를 궁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현대 사회는 한 마디로 말하여 인간이 합리성의 원칙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고 기획하고 실천한 사회다. 탈현대에 들어 인간은 이성이 오히려 도구화하고 있으며 이성으로 이데아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고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중세시대에 신이 곧 진리였다면, 현대는 이성을 통해 보편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다양한 방면에서 이를 추구한 시대이다. 탈현대는 진리를 확정지을 수도, 진리에 이를 수도 없음을 깨닫고 이런 사고를 해체하거나 상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시대다.
중세가 마녀사냥과 연금술에서 보듯 미신과 야만이 지배하던 주술의 정원이었다면, 현대는 이에서 벗어나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회, 과학적 방법을 통해 진리를 규명한 사회다. 탈현대는 과학의 이데올로기화와 도구화에 대해 성찰하고 과학적 진리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진리의 상대성, 불확정성을 인정하고 코스모스보다 카오스의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 물질을 바라보려는 시대다.
중세란 예술이 자기 목적성을 가지지 못하고 신에게 복속된 시대다. 중세에서 예술은 신, 종교적․관념적 이상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그러기에 善이 곧 美였다. 반면에 현대는 예술이 신의 복속에서 벗어나 세속화하여 자율성과 자기 목적성을 가지고 예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대다. 탈현대는 이런 현대적 예술의 경향을 해체하고 異種性(heterogeneity)과 混種性(hybridity)을 추구한다.
중세 시대에 인간의 자아는 신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신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만 인간은 생의 활력을 찾고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인간은 신의 구속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주체를 형성하고 주체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구성한다. 주체는 프랑스 대혁명과 볼세비키 혁명을 통해 중세를 무너뜨리고 주체의 의지대로 현대를 건설하였으나, 대신 이 주체가 동일성을 형성하여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 전쟁과 학살의 세기를 열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탈현대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동일성의 사유, 주체 중심의 사유를 비판하고 상호주체성과 異他性(alterity), 차이의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본다.
중세 시대에 삶은 이승, 또는 천국과 대립되는 생의 공간이었다. 삶의 진정한 목적은 생의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가서 영원한 구원을 받는 것이었다. 반면에 현대는 지금 현재 생을 영위하고 있는 이 순간의 구체적 장을 현실이라 인식한다. 현대에선 현실을 세 가지, 곧 ‘지금 여기에서 사실로 나타나는 일과 사물’, ‘실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존재’, ‘원본에 해당하는 무엇’으로 본다. 그러나 탈현대에 와서 이는 전복된다. ‘지금’에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져 있으며 현재란 과거와 미래의 재현에 불과하며, 실제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존재라 생각한 것은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원본이라 여긴 것이 실은 模本이다.
유럽의 중세가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사회였다면, 동양의 중세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다. 반면에 현대는 유럽에서 이루어진 현대화와 산업화가 전 세계로 확대되는 시대이다. 탈현대는 유럽중심주의가 무너지고 미국 중심의 세계화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역화가 이루어지는 시대다.
중세에 유럽에선 라틴어, 동양에선 한자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민족어는 기층문화의 장에서만 소통되었다. 반면 현대는 민족과 국가란 개념을 설정하고 각 민족어들이 국가를 중심으로 공용어를 이루어 표현과 소통의 수단, 상상력의 기반이 되는 시기다. 이와 달리 탈현대는 문자의 우월성이 사라지고 이미지로 사유하고 소통하는 것이 점점 문자를 대체하는 시대다.
3. 생태론 및 생성의 철학과 不一不二
인간중심주의의 저변에 실체론과 이항대립주의(binary opposition)가 자리하고 있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세계를 실체론에 따라 대상을 독립된 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다시 이분법에 따라 둘로 나누었다. 여기서 양자는 평화적인 공존을 하거나 서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각각 독립되고 대립적인 실체로서 전자가 후자에 대하여 압도적인 우위를 갖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 형이상학의 체계로 자연을 보면, 인간과 자연을 각각 독립된 실체로 간주하고 양자 가운데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 패러다임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하고 개발할 권리를 갖는다. 이 권리에 따라 현대인은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변형생성하였고 이것을 문명이라 불렀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서양은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었기에 전자의 방식을 택하였다.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현대화로 간주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중심주의, 이항대립주의와 실체론에 바탕을 둔 현대의 기획은 인류가 멀지 않은 시기에 공멸할지도 모를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야기하였다.
이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이들은 인간중심주의와 기계적 세계관에 대항하여 생태론과 생성의 사유를 추구한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 속에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통하여 인간과 모든 생태계의 조화를 추구한다.
이에 사회생태론, 에코페미니즘, 심층생태론 등 여러 대안이 모색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화쟁과 가장 유사한 것은 심층생태론이다.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은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과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를 실현할, 즉 생존하고, 번성하고, 자기 나름의 형태에 도달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명평등주의(biospherical egalitarianism)의 입장에서 생태계 전 구성원을 바라본다. 이들은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각각의 평등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생명체끼리의 공생의 원리를 추구한다.(Arne Naess: 1973, 95-96) 이들은 인간과 자연이란 처음부터 하나라는 명제 아래 다양성과 공생의 원칙 속에서 모든 생물권이 평등하게 살아갈 것을, 그러기 위하여 인간이 상실한 ‘자연의 소리’, ‘지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다시 회복할 것을 천명한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 보면 생성이 존재를 빚어내기에 자연은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이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한 마리의 벌레가 기어가는 데도 중력이 작용하듯이 우주의 섭리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에 두루 깃들여 있다. 세계는 그 자신의 활동성과 다양성을 상실해 가는, 꾸준히 하향하는 유한한 체계의 장관을 우리에게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자연에는 물리적 해체의 측면에 역행하는 어떤 상향의 기운이 있다.
A.N. Whitehead: 1998, 350) 자연은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거대한 생태계(ecosystem)이며 지금도 새롭게 갱신되고 있다. 퓨마와 사슴에서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온 생명들이 고정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목적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의존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가운데 자신을 창조하고 초월하면서 보다 나은 수준으로 진화해 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서로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 하나의 주체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초월체로서 창조적으로 전진한다. 유기체 철학에서 영속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형상’이다. 형상은 변화하는 관계를 감수한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소멸하지만 객체적으로 불멸한다. 현실태는 소멸될 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는 반면 객체성을 획득한다.(A.N. Whitehead: 1991, 29)
이는 화쟁 철학에서 不一不二 원리와 통하는데, 이에 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씨와 열매의 비유로 쉽게 설명한다.
“열매와 씨가 하나가 아니니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열매가 이어져서 씨가 생기기 때문이요,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일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요,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生하는 것이 아니요,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滅하는 것이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생하지 않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二邊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 가운데 해당하지 않으므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 없다.
“菓種不一 其相不同故 而亦不異 離種無菓故 又種菓不斷 菓續種生故 而亦不常 菓生種滅故 種不入菓 菓時無種故 菓不出種 種時無菓故 不入不出故不生 不常不斷故不滅 不滅故不可說無 不生故不可說有 遠離二邊故 不可說爲亦有亦無 不當一中故 不可說非有非無”(元曉, 『金剛三昧經論』(이하 『金剛』으로 약함), 卷中, 『韓國佛敎全書』(이하 『韓佛全』으로 약함), 제1책, 625-중-하)
불일불이는 화쟁의 논법으로 연기론에 화엄철학의 불이론을 결합시킨 것이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사과 씨에서는 사과를 맺고 배 씨에서는 배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기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空이 生滅變化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세계는 홀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부분과 전체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여기에 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相入이라는 것에 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체 세계가 한 티끌 속에 들어가고 한 티끌이 일체 세계에 들어간다. … 하나가 곧 일체이다.
言相入者 曉云 謂一切世界 入一微塵 一微塵入一切世界… 一是一切(表員, 『華嚴經文義要決問答』, 『韓佛全』, 제2책, 366-상)
우주 삼라만상 일체가 인다라망 구슬 속에 담겨 있다. 우주 전체의 구조는 한 원자의 구조와 유사성을 갖는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 혹은 기의 흐름이 바뀌면 지구상의 온 생명체의 몸과 세포가 변화한다. 꽃 한 송이에서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다. 이처럼 전체가 곧 하나이다.
미국인들도 바이오스피어2(Bio-sphere Ⅱ) 프로젝트를 통하여 미생물이 지구 전체의 대기의 균형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앞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보다 작은 박테리아 한 마리도 다른 모든 생명의 조화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몸은 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세포는 신체의 일부분이 아니다. 이 가운데 하나인 체세포를 떼어내 복제하면 이 체세포가 그 사람에 관련된 거의 모든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어 그 사람 전체를 형성하는 복제 인간이 만들어진다. 이 예에서 보듯 하나는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포함하고 전체와 유기적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이다.
한 인간은 자연의 온 생명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새싹이 하나 돋는 데도 온 우주가 관여한다. 서양의 실체론으로 보면 딱정벌레 한 마리가 인간의 발에 밟혀 생명이 끊어지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하지만 개미가 그 몸뚱이와 더듬이와 다리를 해체해선 가져가 여왕개미를 먹이면 여왕개미는 쑥쑥 개미 알을 낳고 남은 껍질에도 수 억 마리의 미생물이 어디에선가 와 생명의 하모니를 펼친다. 그러니 화쟁의 사유로 보면, 딱정벌레는 죽은 것이 아니라 개미와 미생물로 변한 것이다. 조그만 개미 한 마리가 죽고 새로운 유충이 태어나는 것도 우주 전체의 목적과 섭리에 따라 일어나는 전체 속의 부분, 그러나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이다.
신라 진성여왕(887년~896년) 때 함양의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홍수라는 문제와 마주쳤다. 화쟁 사상을 추구한 최치원은 홍수를 막기 위하여 댐을 쌓는 대신 물길을 트고 숲을 조성하는 대안을 택하였다. 지금도 지리산 자락의 함양에 가면 폭 2~3백 미터에 길이가 2킬로미터에 달하는 상림이란 무성한 숲이 있다. 씨와 열매의 관계처럼, 물은 나무의 양분이 되고 나무는 물을 품어 주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위천은 천여 년 동안 홍수를 막으면서도 물을 맑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화쟁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이다. 서구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은 물을 흐르게 하는 원리이다. 가정이지만, 이런 패러다임으로 현대화가 진행되었다면 상림처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산업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세 동양 철학에서 지혜를 얻자는 것이 전제왕권 사회나 농업사회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를 ‘새로운 개념의 합리성’으로 보완하여야 한다. 최치원이 부임한 그 해의 홍수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는 숲을 조성하기 전에 둑을 쌓았다. 숲이 동양, 탈현대의 사유라면, 둑은 서양, 현대의 사유다. 하버마스는 이성의 도구화를 비판하면서도 이성의 긍정적 기능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계몽으로서 이성의 빛, 곧 소통적 합리성을 추구하였다. 이처럼, 화쟁의 패러다임은 서양과 동양, 현대와 탈현대 또한 하나로 아우른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존재를 과정과 생성의 관계로 파악하고 이 세계를 서로 깊은 관련을 맺는 하나의 시스템, 곧 부분과 전체가 서로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부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부분인 관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생성, 혹은 과정 철학과 유사하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지구상의 온 생명체를 서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심층생태론과 통한다. 하지만, 화쟁의 불일불이의 전제는 공이다. 공이 생성의 전제조건이 되는 점이 이들 철학과 다르다.
4. 차이의 철학과 辨同於異
동일성이 형성되는 순간 세계는 동일성의 영토로 들어온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뉜다. 동일성은 자기 바깥의 것들을 모두 타자로 간주하고 이를 자신과 구분하고 대립시키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이를 통해 동일성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을 형성하며,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애거나 없는 것처럼 꾸민다. 20세기가 전쟁과 대학살의 시대가 된 근저에는 동일성의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데리다는 동일성에 바탕을 둔 서양 철학 전반을 해체한다. 사물의 의미는 그 실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다른 사물의 차이 사이에 있다. “자의성(arbitrariness)은 기호의 체계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하여 구성될 때만 일어나는 것이다.(Derrida: 1973, 139.) 의미작용은 기호의 충만한 본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차이, 구조 속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동일하다고 믿은 것은 차이 속의 타자이며, 타자 속의 차이에 불과하다.
만일 타자성 자체가 동일자 ‘속’에 이미 들어있지 않다면, ‘속’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내는 포섭의 의미에서, 어떻게 동일자의 유희가 있을 수 있을까? 놀거나 작동을 하고 있는 기계나 유기체 속에서, 놀이 활동의 의미, 혹은 해체의 의미에서나, 동일자 속에 타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동일자의 유희가 발생하겠는가?((Derrida: 1978, 127~128) 타자는 자아임으로써만, 즉 어떤 면에서 나와 동일자가 됨으로써만 절대적으로 타자인 것이다.(ibid., 127) 각 구성요소들의 명백한 자기동일성은 다른 구성요소들과의 차이와 연기의 결과이며 어떤 구성요소도 차이적 관계가 ‘놀이’를 하는 것 바깥에 그 자신의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각 구성요소들은 동일체인 것만큼이나 또한 ‘타자’이기도 하다. 구성요소들의 동일성은 타자성, 혹은 이타성에 의해 가능한 것인데, 이 타자성이나 이타성은 동시에 고유성을 불가능하게도 하는데, 타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동일성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Michael Ryan: 1982, 12) 훗설의 주장이 의존하는 현존의 순간이란 실은 부재(不在)와의 차이적 관계에서 산출되며, 현존은 오직 동일성 내부의 다른 것, 즉 이타성에 의존함으로써만 스스로 존재한다.(ibid., 26)
들뢰즈는 이를 더 심오하게 발전시킨다. 개념 안의 동일성, 술어 안의 대립, 판단 안의 유비, 지각 안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 개념적 차이는 결국 동일성으로 환원한다. 이러한 “차이는 이웃하는 닮은 종(種)들로부터 그 종들을 포섭하는 유(類)의 동일성으로 이행하도록 해준다. 유적 차이와 종적 차이들은 재현 안에서 공모 관계를 맺는다. 이는 그것들이 어떤 면에서 똑같은 본성을 같기 때문이 아니다.
유는 종적 차이를 통해 서만 외부로부터 확정지을 수 있을 뿐이다.(Deleuze: 1994, 34) 유비(類比)는 판단의 본질이지만, 판단의 유비는 개념의 동일성과 유비적이다.(ibid., 33) 때문에 그는 어떤 방식으로도 동일성으로 귀환하지 않는 ‘차이 그 자체’에 주목한다. 차이 자체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차이로 감성과 초월적 경험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사실 반성적 개념 안에서 매개하고 매개되는 차이는 지극히 당연하게 개념의 동일성, 술어들의 대립, 판단의 유비, 지각의 유사성에 복종한다. 차이는 파국을 언명하는 상태로까지 진전되어서만 반성적이기를 멈출 수 있으며 효과적으로 실제의 개념을 되찾는다.(ibid., 34~35)
원효는 緣起와 空의 철학을 바탕으로 차이의 철학을 논한다.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다 하지만 그것은 같음을 나누어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을 녹여 없애고 같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같음은 다름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같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다름은 같음을 나눈 것이 아니기에 이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르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는 둘도 없고 別도 없는 것이다.”
“同者辨同於異 異者明異於同 明異於同者 非分同爲異也 辨同於異者 非銷異爲同也 良由同非銷異故 不可說是同 異非分同故 不可說是異 但以不可說異故 可得說是同 不可說同故 可得說是異耳 說與不說 无二无別矣”(元曉, 『金剛』, 卷中, 『韓佛全』, 제1책, 626-상)
원효의 말대로 동일성이란 것은 타자성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이란 것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主와 客, 현상과 본질은 세계의 다른 두 측면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며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주체에는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고 타자엔 주체가 스며있다. 화쟁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갖기에 진리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한다. 당장 옆에 있는 사람과 마주 보고 눈을 맞추라.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한국어로 ‘눈부처’라 한다. 내 모습 속에 숨어있는 부처, 곧 타자와 자연, 약자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추어진 것이다. 그 눈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상대방을 살해하려 간 자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발견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변동어이의 차이, 곧 역동적이고 생성하는 차이는 개념적인 차이와 다르다. 한 이스라엘인이 자신과 다른 팔레스타인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유대인과 똑같이 관용으로 대하는 것은 개념적 차이를 인식한 데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 <Plonter>의 배우와 스텝들은 개념적 차이에 바탕을 둔 관용이 얼마나 허술하고 관념적인지 절감하였다.
이 연극은 자살폭탄 테러로 남편을 잃은 이스라엘 여인과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아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인을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것이다. 이 연극에서 5명의 이스라엘인 배우가 팔레스타인 역을, 4명의 팔레스타인 배우가 이스라엘인 역을 연기하였다. 이제까지 상대방을 관용으로 대했던 그들도 서로 역할을 바꾸어 연기를 하면서 처음엔 서로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7개월의 공동 작업을 통해 내 안의 타자, 상대방의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서로를 진정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었고 결국 연극을 완성하였다. 바로 이들 배우는 감성과 몸을 통해 내적 차이를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변동어이의 차이는 두 사상(事象)이 서로 차이를 긍정하고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된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변동어이의 차이다. 변동어이의 차이의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
변동어이의 차이는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과 통한다. 양자 모두 개념적 차이를 넘어서서 차이 그 자체,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생성하는 차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반면에 변동어이의 차이는 이분법을 완전히 넘어서서 일심을 지향하는 대신 차이가 실은 힘과 힘 사이의 관계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때문에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세력, 특히 오이디푸스화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유용하지 못하다. 차이가 영원회귀의 반복을 하여 차이를 생성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5. différance와 一心
데리다는 이를 통하여 그리스 철학에서 현상학에 이르기까지 서양 형이상학 전반에 대해 해체를 시도한다. 그는 서양 형이상학의 핵심을 ‘이항대립주의(binary opposition)’와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파악하고 이의 해체에 초점을 맞춘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세계를 이데아/그림자, 이성/감성, 본질/현상, 진리/허위, 정신/육체, 말/글 등 둘로 나누어 파악한다. 그런데 양자가 평등하게 가치를 갖거나 서로 섞이지 않는다. 각각은 서로 대립하여 존재하며 늘 전자가 후자에 대하여 우위를 갖는다. 데리다는 “이항대립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Derrida: 1982, 56-57)라며 이항대립주의가 야기한 위계질서를 해체한다. ‘pharmakon’이 독인 동시에 약이듯이 양자는 이분법을 넘어서며 상호보충(supplément)의 관계라는 것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의식에 ‘현재’라는 특권을 부여한다. 현전(présence)이란 존재의 근원적인 의미가 ‘바로 이 순간’ 의식 속에 드러나는 것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말을 ‘지금 여기에서’ 현전의 방식으로 내면의 진실을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내면의 의식에서 나오는 음성은 본질직관이 청각기관을 통한 것이며, 세계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다. 때문에 말중심주의(phono-centrism)의 바탕에는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근원적인 시간의 지평에 놓일 수 없다.
말 역시 텍스트의 이차 형식이다. “언어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Saussure: 1959, 118)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말이나 소리가 아니라 문자가 지닌 차이다. 의미는 모든 기표의 연쇄를 따라서 散種(dissemination)되어 있다. “나는 링컨 대통령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에서 링컨의 가치는 ‘워싱턴, 루스벨트, 케네디’ 등 부재한 것에 의해서 드러나며 부재한 것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링컨의 가치와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처럼 의미는 어떤 하나의 기호에 의하여 완전히 현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전과 부재간의 일종의 끊임없는 교차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하였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스미어 있다. 의미는 기호에서 직접적으로 현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전성의 신화에 바탕을 둔 말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는 무너진다.
텍스트 또한 마찬가지이다. 텍스트의 의미, 진리는 확정지을 수 없다. 차이, 부재와 현전의 교차, 상호보충에 따라 드러나고 끊임없이 연기된다. 한 텍스트는 또 다른 텍스트의 변형 속에서만 산출되고 다른 텍스트와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드러내며 이 의미는 다시 연기된다.
데리다는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différance)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는 공간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현전을 연기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이들은 이 자체가 실체가 아니라 구조 자체가 만들어내는 효과다. 세계란 이가 드러난 것, 이의 체계 속에 쓰여 드러난 것, 현전과 부재가 끊임없이 교차하여 일어나는 유희에 불과하다.
이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마치 존재하는 양 표상한다. 이는 낱말도 아니며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개념이나 도식, 확정성의 사유에 포함되지 않는 전략적 부호, 또는 결합을 알려주는 기표일 뿐이다. 이는 속이 비어 있고 단순하지 않는 개체로 차이의 기원을 다시 차이 나게 한다.(Derrida: 1973, 129~133)
원효는 一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一이 될 수 있는가? 一도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心이라고 말하는가? 이러한 도리는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것이니 무엇이라고 지목할 지에 대해선 모르겠으나 억지로 이름 붙여 一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然旣無有二 何得有一 一無所有 就誰曰心 如是道理 離言絶慮 不知何以目之 强號爲一心也”(元曉, 『大乘起信論疏』(이하 『疏』로 약함), 卷1, 『韓佛全』, 제1책, 741-상-중)
“진여의 법은 모두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문자와 언어로는 곧 뜻을 나타낼 수 없다. 모든 법의 진실한 뜻은 일체의 언설을 끊은 것이니, 이제 부처님의 설법이 만약 문자와 언어만이라면 곧 진실한 뜻이 없을 것이요, 만약 진실한 뜻이 있다면 마땅히 문자와 언어가 아닐 것이니, 이런 까닭에 ‘어떻게 설법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如言之法 皆無所得故 唯文言 卽非爲義 諸法實義 絶諸言說 今佛說法 若是文言 卽無實義 若有實義 應非文言 是故問言 云何說法”(元曉, 『金剛』 卷下, 『韓佛全』, 제1책, 653-상)
엄격히 말하여 궁극의 진리란 그를 언어기호를 빌려 무엇으로 부르는 순간 그것이 아니다. 세계의 실체는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인간이 이를 분별하여 바라보거나 편의상 범주를 만들어 그렇게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언어기호로는 궁극적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무엇이라 이름 지을 수 없지만, 억지로 ‘e’자를 ‘a’자로 대체하거나 ‘一’과 ‘心’을 끌어들여 그리 명명한 것이다. 진리의 실체란 이해할 수도, 이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서양 철학은 로고스를 바탕으로 신, 본질, 현존, 진리, 실체, 절대정신 등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중심을 탐구해왔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이런 것들을 신성불가침, 절대개념으로 간주하여 다른 모든 기호나 개념, 의미가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해체될 수 있는 것들이다. 때문에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중심은 절대도, 신성불가침도 아니다. 이들을 모든 기호에 선행하는 기호, 절대 근원이라 한다면 이것보다 더 앞서고 더 근원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기에 절대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정립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궁극적 진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진리라든가 개념들, 과학적인 규범들을 존재신학, 이성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에 연결시키는 모든 것을 해체한다. 해체는 직접적이고 고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차이이고 관계로서 매개된 것이고 파생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화쟁 또한 문자와 언어에 얽매여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해체하고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고자 한다. 원효는 궁극적 진리의 실체인 일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일심이란 무엇인가? 染과 淨을 포괄하는 모든 法은 그 本性이 둘이 아니요, 참됨과 거짓됨의 두 문(門) 또한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라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아닌 곳에서 여러 법이 적중하여 열매를 맺어 허공과 같지 않아 本性이 스스로 신비한 이해력을 갖고 있어 心이라고 한다.……따라서 일심은 일체 世間의 법과 出世間의 법을 포괄한다.”
“何爲一心 謂染淨諸法 其性無二 眞妄二門不得有異 故名爲一 此無二處 諸法中實 不同虛空 性自神解 故名爲心 …… 心卽攝一切世間出世間法”(元曉, 『疏』, 卷1, 『韓佛全』, 제1책, 741-상)
“무릇 일심의 원천은 有와 無를 떠나서 홀로 깨끗하여, 三空의 바다는 眞과 俗을 융화하여 고요하고 그득하도다. 고요하고 그득하기에 둘을 하나로 융합하되 하나가 아니며 홀로 깨끗하기에 변을 여의었으나 중간도 아니다. 중간이 아니면서도 변을 떠났으니 있지 않은 法이라 無에 머물지 않으며 없지 않은 相이니 有에 머물지도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시켰기에 眞이 아닌 事가 일찍이 俗이 된 것도 아니요, 속이 아닌 이치가 일찍이 진이 된 것도 아니다. 둘을 융합시켰으면서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진속의 본성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 없고 染淨의 相이 두루 갖추어지는 것이라. 변을 떠났으면서도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유무의 법이 지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是非의 뜻이 모두 포섭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파함이 없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실로 이치라 할 수 없는 지극한 이치요,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큰 그러함이다. 이것이 바로 이 경의 大義이니라.”
“夫一心之源 離有無而獨淨 三空之海 融眞俗而湛然 湛然融二而不一 獨淨 離邊而非中 非中而離邊 故不有之法 不卽住無 不無之相 不卽住有 不一而融二 故非眞之事 未始爲俗 非俗之理 未始爲眞也 融二而不一 故眞俗之性 無所不立 染淨之相 莫不備焉 離邊而非中 故有無之法 無所不作 是非之義 莫不周焉 尒乃無破而無不破 無立而無不立 可謂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矣 是謂斯經之大意也”(元曉, 『金剛』, 卷上, 『韓佛全』, 제1책, 604-상)
원효는 화쟁 철학의 목표를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고 밝힌다.(元曉, 『大乘』, 733) 원효 철학은 일심의 철학이고 화쟁은 이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다. 一心이란 직역하면 한 마음이란 뜻이다. 원효는 中道와 不一不二론에 따라 모든 대립을 하나로 아우른다. 一이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주와 객,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아우르기에 一이다. 하나란 모든 대립을 통일한, 세계를 인식하는 궁극적 실체이자 모든 사유와 존재가 출발하는 원점이다.
그 본성이 둘이 아니란 것은 일심이 아닌 곳에서는 둘임을 전제로 한다. 일심에 의하여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중생들은 세계를 둘로 나누어 본다.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인가?
빛이 프리즘이나 물방울을 통과하면서 굴절되어 인간세계에서 그리 나누어 나타나는 것이며 일곱 가지 범주를 가진 인간에게 그리 보이는 것일 뿐이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색에 대해 알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이를 밝음과 어두움, 양자로 나누고 다시 밝기에 따라 분별하고 이를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러니 빨강과 주황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언어공동체는 그 사이의 색을 보지 못한다. 유럽 사람들도 근세 초까지 무지개를 네 가지나 다섯 가지로 보았다. 주황이란 언어가 없으니 빨강과 주황을 같이 본 것이다. 멀쩡한 주황을 빨강이라 하면 이것은 허위이다. 그러나 주황을 주황이라 하는 것도 허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범주를 세분하여 주황을 ‘진한 주황, 아주 진한 주황, 극도로 진한 주황’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세계를 주와 객, 이데아와 그림자 등 둘로 나누어 인식하고 이해하지만, 세계 그 자체는 하나다. 그러니 화쟁의 방편을 통하여 하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 이분법적 모순율, 곧 ‘A or not-A’의 논리를 추구하였다. 이데아는 이데아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였고 주체는 주체요 대상은 대상이었지,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학술 발표를 하고 있는 지금은 낮인가, 밤인가? 통상 밝으면 낮, 어두우면 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낮은 12시에서 0.001초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찰나에 스쳐간다. 정오에서 0.001초라도 지났으면 벌써 그만큼 밤이 진행된 것이며, 반대로 0.001초라도 모자랐다면 그만큼 낮이 덜 진행된 것이다. 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낮엔 밤이 들어와 있고 밤엔 또 낮이 들어와 있다. 그러니 어느 것을 분별하여 둘로 나누는 것은 두 극단을 취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는 A or not-A가 아니라 A and not-A, 곧 퍼지이다. 우리는 0과 1에 대하여 말하지만 진리는 그 사이에 있다. 그러니 세계의 실체는 하나다.
세계를 둘로 보는 것도, 하나로 아우르는 것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것도 마음이요, 이분법과 분별심을 떠나 스스로 신비하게 이해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마음이다. 중생 속에 부처가 있으니, 유리창에 먼지를 닦으면 푸르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듯, 마음 공부를 통해 무명에서 벗어나면 누구나 깨달은 자, 부처가 된다.
無明은 미혹하여 세계를 주와 객, 본질과 현상 등 둘로 나누어 보나 세계의 실체는 이를 하나로 융합한 것이며 그렇다고 하나에 머물지도 않으므로 하나가 아니다. 세계의 실체는 고요하고 그득하여 무명을 떠나 이를 수 있는 청정한 세계이기에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거나 극단에 서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절충하여 그 중간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의 실체는 이와 같아서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어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無에 머물지도, 모든 것을 긍정하는 有에 머물지도 않는다. 세계의 실체인 일심은 유와 무, 현전과 부재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곳이며, 차이를 통하여 양자를 드러내고 모든 것을 포섭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비어있는 곳이다.
일심은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시켰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아울렀기에, 현상이면서 이를 통하여 본질을 드러내고 본질이면서 현상으로 나타난다. 둘을 융합시켰으면서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 진리와 허위, 깨달음의 세계와 미망의 세계, 부처의 삶과 중생의 삶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한 편에 기울지 않으면서도 절충한 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을 긍정하여 세우지 않는 것이 없는 唯識과 모든 것을 부정하여 해체하지 않는 것이 없는 中觀을 종합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고 해체하면서도 모든 것을 세운다. 그리하여 일심의 철학은 해체함이 없되 해체하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실로 이치 중에 지극한 이치요, 인간의 이성과 의식의 견지에서는 그것을 초월한 무엇이기에 그렇다고 할 수 없으면서도 (자연처럼) 모든 것을 포괄하고 融攝시키는 진리 중의 대진리이다. 때문에 일심의 본원으로 돌아가야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一心은 본질도, 실체도 아니다. 사건도 존재도 아니다. 개념이나 원리는 더욱 아니다. 이것들은 소리도 없고 들을 수 없으며 볼 수도 없으며 홀로 우뚝 서 있으며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에 두루 어디에나 번져 있어 우주가 운행하는 것에서부터 나뭇잎이 떨어지고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에도 스며있다. 이것은 형태가 없이 無이지만, 모든 만물이 이에 따라 이루어졌으니 이는 만물의 모체이다. 이는 어디에나 번져 나가고 이루지 않는 것이 없고 크고도 크고 멀고도 멀어 이를 알 수도,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도 없다.
이처럼 이와 일심은 이성중심주의와 언어를 해체하고 이를 통하여 진리에 이르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진리, 실체, 본질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그렇지 않음을 드러내면서도 정작은 자신은 비어있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이름으로는 이를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음도 통한다. 하지만 화쟁의 사유는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화쟁은 중도와 화엄의 원리에 따라 언어와 세계, 이성과 이성 너머의 깨달음, 해체와 구성 또한 하나로 아우른다.
6. 一心과 二門의 會通
진제와 속제는 둘이 아닌 동시에 하나를 지키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일심이요, 하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기에 체를 들어 둘로 삼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一心二門이라 한다. 이상이 그 대의이다.
“眞俗無二不守一 有無二故 卽是一心 不守一故 擧體爲二 如是名爲一心二門 大意如是”(元曉, 『金剛』, 卷下, 『韓佛全』, 658-하)
깨닫지 못한 자는 세계를 둘로 나누어 인식한다. 그러나 앞 장에서 이야기하였듯 세계는 하나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하나지만, 중생들의 일상에서 보면 이데아와 그림자, 주와 객 식으로 모든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으니 하나에 머무르면 일상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분별심을 떠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 일상에서 깨달음의 세계, 더러운 세계에서 청정한 세계, 허위에서 참을 지향하고자 하면 진여 실체는 하나이다.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을 구제하고자 중생을 향하여 나아가 중생과 더불어 실천하고 생각하며 그들을 깨우치고자 하면 세계를 둘로 말해야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니, 진여실체가 하나이지만 둘로 가르는 것은 用이요, 둘이 허상임을 깨닫고 하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體이다. 이처럼 원효는 일심이문의 회통을 통하여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아우르려 한다.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어가 세계에 대한 왜곡이라고 해서 내가 이 발표장에서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청중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원효는 “네가 취한 것과 같은 것은 오직 언어기호뿐이므로 나는 언설에 기대어 말을 끊어 진리를 알리는 방편을 제시한다. 이것은 마치 손가락에 의해 손가락을 떠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元曉, 『十門和諍論』, 838)라고 말하였다.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고 한 뒤에 “지붕으로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Wittgenstein: 1961, 151)라 했다.
궁극적 진리는 언어를 떠나서야 이를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이 진리를 전달하는 보편적 방법 또한 언어밖에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일심과 이문의 회통, 곧 언어(사다리, 손가락)를 방편으로 이용하되, 이를 떠나 궁극적 진리(지붕, 달)에 이르는 길이다. 비유하면, 지붕에 오르려면 사다리를 타고 오르되, 그에서 내려야 지붕에 이르는 이치다.
원효는 언어에 대한 치밀한 연구를 통해 이에 대한 구체적 방법 또한 제시한다.
“‘義語’이라는 것은 말이 마땅히 진실한 뜻에 맞아 단지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文語’’라는 것은 말이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이기에 진실한 뜻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뜻의 이치와 원리에 맞게 말하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은 곧 뜻의 말이며, 뜻이 없는 범부의 말과는 다른 것이다.”
義語非文者 語當實義故 非直空文故 文語非義者 語止空文故 不關實義苦 … 如前遠離三相之語 契當如如義理而說 所以佛說 乃是義語 不同凡語之非義也”(元曉, 『金剛』, 卷下, 『韓佛全』, 제1책, 653-상)
‘文語’란, 일상 언어의 속성에 집착해 낱말이나 문맥에 얽매이는 세속의 말, 상투적 의미로 언어기호를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義語’란, 공안처럼,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문맥을 넘어서서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 드러내는 말을 이른다. 즉 문어는 세계를 왜곡하지만, 우리는 의어를 통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고, 또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아무리 높이 뛴다 하더라도 우주(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없지만 장대를 이용하면 더 높이 날아 우주에 좀 더 가까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 장대를 이용한 뒤에는 장대를 놓아야만 땅의 굴레를 넘어 잠시나마 비상할 수 있다.
三: 和諍/탈현대철학
體用
一: 一心/Chora 二: 二門/이항대립의 현대철학
빛이 원래 하나이나 이를 明과 暗으로 가르고 다시 세분하여 빨, 주, 노, 초로 나누듯, 세계는 하나이나 그러면 인간이 이를 이해할 수도 이용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으니 이데아와 그림자, 본질과 현상, 主와 客,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 등 둘로 나누어 본다. 이처럼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은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이용하고 소통하기 위한 것이니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것은 用이다.
아무리 궁극적인 진리에 다가갔다 하더라도 둘로 나눈 것-또는 이에 이름 붙인 언어기호-로는 세계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서양 철학자처럼 사람들은 이성을 통하여 세계를 둘로 나누고 이를 진리로 착각하였다. 그러니 셋을 두어 둘의 허상을 해체하여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體이다.
그럼 이들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인간의 본질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인간의 행위, 혹은 타자와 차이 및 관계를 통하여 한 자락 엿볼 뿐이다. 우리는 나무의 작용과 기능, 나무와 풀 등의 차이와 관계를 통해 나무의 본질을 유추한다. 이처럼 體는 用(우리말로 ‘짓’)을 통하여 일부 드러난다. 용을 통해 드러난 체가 바로 현대 철학이 추구하였던 실체이다.(이를 나는 體2, 몸이라 명명한다.) 용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아 도저히 알 수 없고 이를 수도 없는 체가 바로 일심, 道, 이다.(이를 나는 體 1, ‘참’이라 명명한다.) 몇몇 원숭이가 직립을 하고 손을 쓰면서 손이 발달하고 뇌가 점점 커진 것처럼,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 작용을 하는 나무가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이도록 넓게 벌어진 잎과 바람에 살랑거리며 공기를 내뿜도록 가는 잎을 갖는 것처럼, 用은 相(우리말로 ‘품’)을 만든다. 뇌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커진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와 다른, 인간의 특질을 드러낸다. 이처럼 相이 體를 담는다. 이처럼 체는 용을 통하여 드러나고 용은 상을 만들며 상은 체를 담으며 이 체는 또 다시 용을 낳는다. 체와 용과 상은 영겁순환에 놓인다. 일심이 이문으로 나누어지고 이문은 화쟁의 방편을 통하여 다시 일심의 체로 돌아가고 이는 다시 이문으로 갈린다.
이제까지 논증한 것처럼,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분법과 분별을 해체하고 일심의 본원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면에서는 탈현대철학과 통한다. 그러나 원효는 당위적으로 이항대립의 사유를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一心과 二門의 회통을 통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깨달음에 이르면서도 일상을 영위하고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삶, 부처와 중생, 깨달음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는 방편을 제시한다.
7. 맺음말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주장대로 이성중심주의가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한 원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을 무시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생명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비판할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버마스의 말대로 합리성이 없다면 유토피아를 실현할 방법 또한 없다.
최치원이 상림을 조성하기 전에 둑을 쌓은 것처럼, 탈현대, 혹은 화쟁의 패러다임을 모색하되, 오늘의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며 구체적 대안을 모색하는 방편은 현대, 혹은 서양에서 빌려야 한다. 화쟁은 둘-서양, 현대, 합리성-과 하나-동양, 탈현대, 해체-또한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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