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삼백수 권3 오언율시 152.賦得 古原草送別(부득 고원초송별)/草(초) - 白居易(백거이) 〈옛 언덕의 풀:이별노래〉 |
賦得 古原草送別(부득 고원초송별)/草(초)
白居易(백거이)
離離原上草(이리원상초),一歲一枯榮(일세일고영)。
野火燒不盡(야화소부진),春風吹又生(춘풍취우생)。
遠芳侵古道(원방침고도),晴翠接荒城(청취접황성)。
又送王孫去(우송왕손거),萋萋滿別情(처처만별정)。
<원문출처>賦得古原草送別/ 作者:白居易
本作品收錄於:《唐詩三百首》/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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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무성한 풀
해마다 한 번씩 자라고 스러지지만
들불이 태워도 없어지지 않아
봄바람 불면 또 생겨나지
멀리까지 자란 풀 옛길까지 뻗어 있고
햇볕 아래 푸르름이 황량한 성에 닿았네
이 봄에 또 그대를 보내자니
우거진 풀에 온통 이별의 정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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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釋] 무성하게 자란 언덕 위의 풀은 해마다 자라났다 스러지고 한다.
들불이 나서 풀을 다 태워버려도 다 태울 수 없어 봄바람이 불면
또다시 자라난다. 그대가 떠나가는 옛길까지 풀이 뻗어 있고
옛길을 넘어 황량한 성까지 햇볕 아래 푸른 풀이 이어져 있다.
이 봄에 또 그대를 떠나 보내자니 우거진 풀은 마치 이별의 정을 가득 담고 있는 것 같다.
[解題] 이 시는 정원(貞元) 3년(787) 혹은 5년, 백거이(白居易)의 나이
16세 혹은 18세 때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저작시기를 두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舊唐書(구당서)≫ 〈白居易傳(백거이전)〉에는,
15, 6세에 저작랑(著作郞) 고황(顧況)에게 글을 보여주었다고만 했는데,
당나라 사람 장고(張固)의 ≪幽閑鼓吹(유한고취)≫에 상세한 내용이 보인다.
“백거이(白居易)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처음 장안에 왔을 때
고황(顧況)을 뵙고 자신의 시를 보여주었더니, 고황(顧況)이 백거이(白居易)의
성명을 보고 한참 동안 백거이를 바라보고 나서 말하기를
‘장안은 물가가 비싸 살기도 아주 쉽지 않을 텐데.[米價方貴 居亦不易]’라고
농담을 하더니(白居易 이름을 희롱한 것이다.),
시권(詩卷) 첫 수의 ‘咸陽原上草(함양원상초) 一歲一枯榮(일세일고영)
野火燒不盡(야화소부진) 春風吹又生(춘풍취우생)’이란 구절을 보고는
바로 감탄하며, ‘이런 언어를 말하니 살기 쉽겠구나.’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칭찬이 퍼져 명성이 크게 떨쳤다.
[白尙書應擧 初至京 以詩謁顧著作況 顧睹其名 熟視白公曰
米價方貴 居亦不易 乃披卷首篇曰 咸陽原上草 一歲一枯榮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卽嗟賞曰 道得个語 居卽易矣 因爲之延譽 聲名大振]”
후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황은 정원 5년에 요주(饒州)
사호참군(司戶參軍)으로 폄직(貶職)되었고 백거이는 이 이전에는
장안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당대(唐代) 기록에 따라 저작시기를
확정하는 데 회의적인 의견이 있다.
한편 백거이가 강남에 있을 때 지었다고 보기도 한다. 백거이는 정원 5년에
아버지를 따라 구주(衢州)에 있었는데, 이때 요주(饒州)로 폄직되어 부임하는
고황(顧況)이 소주(蘇州), 항주(杭州), 목주(睦州)를 거쳐 구주(衢州)를 경유하게 된다.
이 시기에 백거이가 고황을 배알했을 가능성이 높아 고황과 관련된 이야기가 생겼고
저작시기도 이때로 보는 것이다.
굴원(屈原)의 ≪楚辭(초사)≫ 이후 풀은 이별과 관련된 은유로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소년 백거이는 그 전통을 이어 ‘離離(이리)’, ‘萋萋(처처)’, ‘遠芳(원방)’, ‘晴翠(청취)’ 등
풀에 대한 다채로운 표현을 사용하면서 전통을 이었다.
‘野火燒不盡(야화소부진) 春風吹又生(춘풍취우생)’이란 구절이 유명한데,
‘吹又生(취우생)’은 경구(警句)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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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賦得(부득) : 기존의 시 제목이나 시 구절을 제목으로 차용하여 짓는 것을 뜻한다.
과거(科擧)나 응제(應制), 또는 시회(詩會) 등에서 제목을 미리 정하여
시를 짓는 방식으로, 후대에는 하나의 시체가 되기도 하였다.
○ 賦得古原草 送別(부득고원초 송별) : 제목이 ‘草(초)’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 離離(이리) : 草木이 무성한 모양이다. 여럿의 구별이 또렷한 모양.
○ 一歳一枯榮(일세일고영) : 해마다 한 번씩 자라고 스러진다
○ 侵(침) : 풀이 뻗어나 자란 모습[蔓延]을 형용한 말이다.
○ 王孫(왕손) : 원래 귀족의 자제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칭(美稱)이다.
○ 萋萋(처처) : 초목이 길게 자라 우거진 모양이다.
‘又送王孫去(우송완손거) 萋萋滿別情(처처만별정)’이란 구절은
굴원(屈原)의 ≪楚辭(초사)≫ 〈招隱士(초은사)〉의
“왕손은 떠나 돌아오지 않는데, 봄풀 돋아나 무성하구나
[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를 가져와 쓴 것이다.
본 자료의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출처] [당시삼백수]賦得古原草送別(부득고원초송별
賦得古原草送別(부득고원초송별)
-옛 언덕의 풀을 읊으며 송별하다
백거이(白居易·772~846)
離離原上草, 一歲一枯榮.
이리원상초, 일세일고영.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야화소부진, 춘풍취우생.
遠芳侵古道, 晴翠接荒城.
원방침고도, 청취접황성.
又送王孫去, 萋萋滿別情.
우송왕손거, 처처만별정.
울울창창 언덕의 풀, 해마다 한 번씩 시들었다 무성해지지.
들불인들 다 태울소냐,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나는 걸.
향초는 저멀리 옛길까지 뻗어있고 해맑은 푸르름은 옛 성에 닿아있네.
다시금 그대를 떠나보내려니 봄풀처럼 그득한 석별의 정.
들풀 우거진 언덕에서 친구를 배웅하는 시인.
석별의 아쉬움이 풀처럼 다복다복 가슴에 그득하다.
저 멀리 옛길과 황폐한 도시에까지 닿은 그 향긋하고
싱그러운 푸르름으로 하여 더한층 마음이 아린 이별의 시각이다.
하나 해마다 시들었다 무성해지기를 반복하는 저 들풀처럼
우리의 인연도 무한히 이어지리라. 들불에 깡그리 타버려
우내 삭막했던 언덕에도 봄바람에 새록새록 풀이 돋고
마침내 저리도 울울창창한 풍요를 일구어내지 않는가. 시
인이 마주한 이별은 그러므로 절망적인 슬픔이 아니라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는 듯 벅찬 희망으로 승화된다.
자연의 섭리를 통해 보여주는 긍정의 메시지가
이별의 아픔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젊은 백거이는 이 시로 명성을 떨칠 계기를 마련했다.
과거 응시를 위해 열여섯 나이에 장안에 온 그는 습작한
시문을 들고 대시인 고황(顧況)을 찾았다. 과거를 앞두고
자기 재능을 알리기 위해 고관대작이나 명사를 찾는 건
당시의 관행이기도 했다. 고황이 그의 이름을 듣고는
장안의 쌀값이 비싸 살기(居)가 쉽지(易) 않을 거라 농담했다.
하지만 ‘들불인들 다 태울소냐,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나는 걸’이라는
시구를 보더니 이 정도의 시재라면 어디서든 편히 살 거라고
극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