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간 목요일 (2코린3,15─4,1.3-6)(마태 5,20ㄴ-26)
제1독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15─4,1.3-6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15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4,1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3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4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요즈음 매스컴을 장식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재판하는 모습들입니다.
과거에 그들도 사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산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취지를 내세워 정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결점과 한계를 갖고 있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어패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정의의 법도 사실 어떠한 기준에서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이 말하는 정의라는 칼에 들어서면 과거의 개개인 마다 지녔던
소중한 가치가 무너지고 ‘불명예’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정의도 아닌 데 정의라는 기준만 있지 사랑과 자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과거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너울이 덮여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 볼 수 있다면 그 너울은 치워지는데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희망적인 말로 구원의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18)
구약에서는 율법을 실천함으로서 의인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것이 구원과 연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스스로 계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울은 무엇인가 가로막고 있다는 뜻일까요? 하느님을 막고 있는 율법의 짐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만드신 하느님께로 직접 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또한 성령의 인도로 가능해 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오로는 사도직의 자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2코린 4,5)
우리 교회의 소명도 마찬가지로 교회 스스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만을 따지고 결과로 나타나는 것만을 문제로 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큰 그물에는 작은 고기가 지나가겠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대의명분의 드러나는
법만을 다루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죄가 결과적으로 드러날 때에 비로소 그들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살인으로 이어지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잘 다스려야 하는데,
상대가 미워서 ‘바보!’, 또는 ‘멍청이!’라고 욕하다 보면 더 큰 죄의 그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만 양보하고 져주면서 화해를 모색하면 더 큰 죄의 가능성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살인과 같은 끔찍한 죄를 범하는 것을 원하겠어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루는
구약의 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죄로 나가는 가능성을 다스리고 또작은 것이라고
화해하려고 노력하고 양보할 줄 아는 덕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물 봉헌 전에 상처를 준 이에게 먼저 용서를 청하고 화해를 청할 수 있는
그리고 돌아와 평화의 제물 봉헌을 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지요.
신앙인의 삶에서 겸손과 사랑이 그 사람의 바탕이면 상대를 존중하고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피하여 더 큰 죄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속담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조상의 지혜가 담긴 말씀을 오늘의 복음과
비교하며 새겨볼 수 있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