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째입니다. 비라도 내리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은 수요일 오후
강북강변로를 타다가 니체를 만났어요. 밀린 묵상을 정리하면서 두 번째로
니체와 손을 잡고 신을 죽이기로 도원결의를 했어요. 어머니 소식을 가족 톡
방에서 들었는데 배가 터질 듯이 부른 원인을 찾았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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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는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신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입니다.
당시 유럽사회는 그리스도교가 주류를 이루고, 모든 문화와 가치의 기준
이었어요. 그리스도교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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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세계를 이상계(이데아계)와 현상계로 나누었어요. 이상계는 영구
불변의 관념적, 정신적 세계이고, 현상계는 생성, 변화, 소멸하는 현실적,
육체적 세계인데 플라톤은 이상계를 더 본질적이고 고차원적인 세계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육체를 떠나 영혼이 이데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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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가는 것을 희구하였지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는 영원불멸의 천국을 모토로 신도들을 가스 라이팅 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세계는 불변하는 초월 세계인 내세를 말하고, 인간의 세계는 변화하는 현상
세계를 말하는데 이 이분법에 따라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로 나누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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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죄의 종(노예)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면서 초월자인 신의
은혜를 덕 입고 살아가라는 겁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는 신의 세계를 절대적,
초월적 가치로 존중하고 선과 악, 정의, 도덕 등 서구의 사상과 문화, 규범과
제도는 모두 이러한 초월적인 가치에 밑바탕을 두고 있는데, 초월적 가치는
현실의 모든 가치와 인간의 삶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요. 인간은 오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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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의지하거나 신의 구원에 의해서만 내세에서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어요.
인간 스스로는 행복을 개척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구조화한 것이지요. 예컨대,
밤에 혼자 산길을 내려오던 사람이 갑자기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겨우 나뭇가지를 붙들고 살고자 발버둥치고 있었는데 그때 때 하늘에서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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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구원될 것이다.”라는 울림이 들려왔어요. 그는 사지와 온 몸을 모은 채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나 구조는 되지 않았습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
하고 눈을 떠보니 새벽이 오고 있었어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밑은 낭떠러지가
아니고 편편한 평지였어요. 발을 뻗으니 바로 닿을 수 있었지요. 그는 밤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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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자신을 자책합니다. 살기 위하여 발을 한번 뻗어보았더라면
평지에 쉽게 발이 닿았을 건대 쓸데없이 공허한 하늘에만 의존했던 나약한 자신이
창피했어요. 자신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하늘(신)만을 절대적 해결사로
생각한 겁니다. 초월적인 가치는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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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가치가 무시되거나 부정됩니다. 니체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이분법과
초월적 가치를 반대하고, 타파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이름으로,
구원이란 명분으로 인간을 나약화시키고 노예화한다는 거지요. 그 타파의 방법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신은 죽었다'입니다. 여기서 신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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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에요. 더구나 니체가 그리스도교의 순수한 사랑의 정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교의 형이상학, 초월적 가치, 내세, 절대선, 도덕규범
과 같이 그동안 인류가 떠받들어온 진리와 가치체계를 부정한 겁니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지니고 있는 비도덕적 행태, 부정적 이미지 등을 고발하고 성토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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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그리스도교는 종교개혁운동의 단서가 된 면죄부 판매, 신의 이름을 걸고
여덟 차례에 걸쳐 치러진 십자군 전쟁에서의 패배, 과학의 진실을 은폐한 갈리레이
(Galileo Galilei) 재판, 진화론의 등장과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그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어요. 리더의 타락은 신, 구교 막론 총체적부패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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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 선(善)이나 초월적 가치가 이미 붕괴되었고, 사회를
제도하고 규율하는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였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작가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했지요. 제가 기독교에 미쳐있을 때 종종 사용하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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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말은 공자의 죽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유교 자체가 안고 있는 권위주의,
폐쇄성, 형식지상주의, 파벌주의 등을 비판하고, 당시 지배층의 도덕적 위선과 무능,
부패를 지적하고, 결과적으로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하다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을 강조한 것일 겁니다. 신이 존재할 때 인간은 선과 악, 불행과 비극,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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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모든 책임을 신에게 돌릴 수 있었어요. 그러나 신이 없어진 상황에서 인간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희망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를 허무주의(nihilism)라 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니체는 초월적
가치 대신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이 죽고 난 뒤 인간은
더 이상 신에 의지할 필요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어요. 따라서 인간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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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되고 주인이 되어야 한 대요. 신 대신 새로운 존재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인간
중심주의의 표상인 초인(超人, Übermensch)입니다. 이육사의 광야에 등장하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말입니다. 니체는 인간을 '초인'과 '최후의 인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최후의 인간은 기존의 가치를 믿고,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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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진취적이고 창의적 사고 없이 기존의 가치규범에 예속되어 살아요.
남들 대학 가니까 대학 가고, 남들 따라 투자하고, 남들이 좋다고 하니 따라 해요.
현대 사회 대다수가 이 부류에 속할지 모릅니다. 이에 반해 초인은 기존의 가치를
넘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새 창조, 창조적 삶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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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과 고난을 기꺼이 받고 스스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고난에게 얼마든지 '다시 찾아올 것을 촉구하는 사람'입니다. 니체는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충동적인 자살은 죽는 자와 남아 있는 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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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만 안겨주며, 삶을 완성시키는 죽음도 합리적인 죽음도 아닌 비겁한 자의 죽음
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피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바로 Amor Fati 즉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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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한 것은 허황되고 형이상학적인 관념에서 과감히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인간(삶)이라는 것을 중시하며, 허무주의의 도래에 대하여 운명
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사랑할 것을 주장한 것이지요. 삶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는
어디에도 없어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바로 자기 자신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사람도 오직 자신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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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2023.9.20.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