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족보발행과 都門 조직
도문중이란 이름의 조직은 역시 시제와 족보편찬을 위한 조직으로 볼 수 있다. 문중조직은 안항공후 영이재공(詠而齋公)이 도유사로서 1759년 최초의 족보인 3권의 己卯譜를 발행한다. 이 시점은 강릉참봉공이 관산 당동에 입향한 지 240년 안팎이다. 다만 족보를 발행하기 18년 (1741년) 전에 이미 서문을 썼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족보를 발행하기 이전부터 문중의 조직이 있었다는 얘기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壬寅譜로 1842년 전6권을 발행한다. 초보인 기묘보(1759)가 발행된 지 무려 84년 후에 발행된 것이다. 이때는 사락헌(四樂軒) 백침(伯琛)의 셋째 아들인 신암(新庵) 도창(道昌․1776~?)이 도유사를 맡았다. 세 번째는 癸未譜(1883)로 다암(茶庵) 영복(榮馥)의 주도로 전9권의 족보가 발행된다. 네 번째는 전14권의 丙辰譜(1916)로 춘헌(春軒) 계반(啓泮․1848~1939)과 사월파후 계충(啓忠․1861~1936)이 공동도유사를 맡아 발행했다.
다섯 번째 丁酉譜(1957)는 중와(重窩) 홍량(洪良․1881~1961)의 주도로 전3권의 족보가 발행된다. 여섯 번째는 壬子譜(1972)로 전6권이 도유사 의재(毅齋) 석한(錫漢)의 주도로 발행된다. 최근에는 己卯譜(1999)로 장흥 위씨의 도문중인 하산계(霞山契) 계장인 춘사(春史) 용철(容喆) 주도로 발행했다. 장흥 위씨의 가장 큰 조직인 「도문중」은 선조에 대한 제사(祭祀) 등의 사업을 위해 발족해서 족보를 발행하는 등 문중사를 주도해서 추진한다.
한편 계(契)형태의 도문중은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바뀌는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2005년 5월에 선임된 임원회는「도문회」체제의 회칙을 마련, 2006년 5월 총회에서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도문중」을 폐지,「도문회」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도문회는 회장 1명, 부회장 2명, 총무, 재무, 종무간사를 두고, 상임위원 8명을 보강, 중요안건을 처리할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모두 35명의 운영위원회는 총회의 역할을 맡게 했다.
우리가 모르고있던
문중사(되문회)에대해서 자세한정보
후대에 소중한지식
고이간직하겠읍니다!
즐겁고 행복한주말되세요💚💖💙
족보발행과 문중조직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네요. 도문회의 역사가 보입니다.
도문중에선 시제와 족보편찬을 위한 조직으로 계형태로 시작하여 정보화 사회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도문중을 폐지하고 지금의도문회로 전환하게 되였군요.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