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명상
부처님이 앞서 가르쳐 가장 중요한 가르침
글 무상법현(無相法顯) 스님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평택 보국사 주지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우리가 불자 도는 수행자로서 살아갈 때 겪는 갖가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자연적 현상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할 때 어떤 견해를 가지고, 어떤 방법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해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그것은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과 두 번째 가르침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새겨야 한다.
첫 가르침(中道=正道, 4聖諦)
“출가수행자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여야 한다. 첫째는 감각적인 쾌락에 몰두하는 것으로 이것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하찮고 유익함이 없으며, 둘째는 지나친 고행에 몰두하는 것으로 이것은 고통스럽고 저열하고 유익함이 없는 것이다.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에 치우침이 없이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중도는 통찰력을 주며 지혜를 주며 평화를 주며 깨달음으로 이끌고 열반으로 이끈다. 여기에서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중도라는 말을 제 뜻이다. 깨달음, 열반, 해탈, 청정이라는 목표, 과녁에 명중시키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이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 붓다가 된다는 말씀이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여래가 깨달은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은 바르게 보기(正見),바르게 생각하기(正思), 바르게 말하기(正語), 바르게 행동하기(正業), 바르게 활동하기(正命),바르게 노력하기(正精進), 바르게 마음갖기(正念),바르게 집중하기(正定)다. 여기에서 그냥 명사로서 쓰였다기 보다는 동사 또는 동명사로 쓰였음을 살펴야 한다. 실천의 가르침이기에 명사 보다는 동사라야 하고 동사형 명사라는 것을 생각해 실천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여래가 깨달은 중도로서 통찰력을 주며 지혜를 주며 평화를 주며 깨달음으로 이끌고 열반으로 이끈다고 하였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는 이와 같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이며 싫은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며,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苦集聖諦)는 이와 같다: 갈애는 쾌락과 욕망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서 쾌락을 찾아 헤매고 윤회로 이끈다. 갈애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 존재는 오래 삶도 포함되고, 비존재는 삶을 일찍 끝냄도 들어있다.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苦滅聖諦)는 이와 같다: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려서 더 이상 갈애에 집착하지 않고 갈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苦滅道聖諦))는 이와 같다: 그 길은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
이 말씀은 (상윳따 니까야의 56삿짜 쌍윳따11과 율장 마하왁가 1편 6:17~37)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첫째,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결론이며 그것은 중도(中道)라는 것이다. 중도는 가운데 길 또는 정확히 반이 되는 길(半道, 1/2way)의 뜻이 아니라 바른 길(正道)이라는 점이다. 경전에서 정확하게 중도는 바른 길이라고 표시하고 있으며 그것은 여덟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어정쩡한 입장이나 회색주의를 중도라고 하거나 견해가 없음을 중도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둘째, 8정도를 실천해서 열반을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삶인 고통은 요약해서 말하면 오음(五陰 =五蘊)이 왕성한 까닭에 겪는다는 것이다. 경전에서 고통은 근본적인 네 고통인 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고, 죽는(死)것을 먼저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따라오는 고통인 사랑하는 것과의 헤어짐(愛別離苦), 싫어하는 것과의 만남(怨憎會苦), 그리고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을 얻지 못함(求不得苦)을 말하고 나서 재미있고, 중요한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요약하면 즉 간략하게 설명하면 오음이 왕성한 고통(五陰盛苦)’이라는 표현이다. 근본적인 고통이든, 따라오는 고통이든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오온이 왕성해지려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반 학계나 법회에서 놓치고 있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고통의 모습은 오온이 왕성해지는 것이라고. 그것이 무슨 말일까? 오음 또는 오온은 나(我)를 이루는 육체(色)와 정신(受, 想, 行, 識)과 그들의 묶음(五趣蘊)이다. 그들이 더 커지고, 많아지고, 단단해지려고 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개인도 그렇지만 조직과 비생명의 존재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점을 제대로 알면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함을 얻는 길로 접어든 것이다. 온전한 평안은 수행을 통해 다 아는 지혜(洞察智), 제대로 아는 지혜(如實智)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두 번째 가르침(無我)
부처님이 두 번째로 가르치셨고 그래서 사실은 본격적인 가르침의 첫째랄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육신은 무아이다. 만일 육신이 자아가 있다면 몸이 병들지도 않을 것이고, 육신에게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무아이기 때문에 병들게 되고 육신에게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말라’고 말할 수 없다. 몸이 무아인 것처럼 느낌도 무아이고, 지각도 무아이고, 형성도 무아이고, 의식도 무아이다. ...무상하고...괴롭고...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육신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통찰력으로 보아야 한다. (상윳따 니까야 : 22칸다 쌍윳따59, 율장 마하왁가 1편 6:38~47)
여기서는 무아의 가르침을 말했다고 하지만 무아의 짝이 되는 무상(無常)과 고(苦)를 같이 말한 것이다. 나라고 할 만한 그래서 독립적이고 불변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이 무아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갈 수밖에 없고 변하지 않아야 안정적인데 변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즉 오음이 왕성하므로 고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두 번째 가르침에서 크게 두 가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첫째, 무아이므로 너와 나를 가르거나,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아이므로 무여(無汝)가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이들을 현실적으로 느끼는 자기(自己)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무상(無常)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스스로가 해야 할 일, 공부, 사랑에 전념하여 얻고자 하는 결과를 얻으라는 것이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그 어느 것을 해도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무상은 성취를 얻고자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상의 가르침들이 나오는 곳은 다음과 같다.
•율장 비나야(계:실라, 율:비나야)
•빨리어 경전 모음(5니까야) -(한문)경전(4아함)
•꿋따까 니까야=짧은 경전-담마빠다(법구경),(숫따 니빳따)경집 등
•쌍윳따 니까야=1:1상응하는 가르침(개념)-잡아함경
•맛지마 니까야=중간 길이의 경전-중아함경
•디가 니까야=긴 길이의 경전-장아함경
•앙굿다라 니까야=법수를 1씩 늘려가며 개념을 편집한 경전-증일아함경
그런데 이런 경전들을 옛날에는 우리가 직접 대하고 번역하기가 어려워 일본에서 번역한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을 번역한 것을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것들을 많이 읽었다.
그 때 쓴 번역용어가 <장부, 중부 상응부, 증지부, 소부 長部, 中部, 相應部, 增支部, 小部>라는 표현이다. 이제는 바로 옮긴 경전들이 많이 나타났으므로 디가, 맛지마, 상융따, 앙굿따라, 쿳다까라는 번역어 표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