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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15(금) 14:54 (MSIE4.01) 211.32.225.38 800x600
<시네포엠> 절을 찾아서, 나를 찾아서
<시네포엠>
절을 찾아서, 나를 찾아서
박 구 하
((주인공 "나"는 잘 나가던 큰 회사 엘리트사원이었다. 느닷없이 몰아닥친 IMF는 이 회사
에도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는 퇴사를 당하고 자식으로서, 남편
으로서, 부모로서,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어제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
다. 방황하는 길목에서 어느 봄날, 레저 아닌 절박한 생존의 발걸음으로 우리 산야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어느 절을 찾는다. 카메라는 나를 따라 사찰을 일주하며 영상미와 나의 내면의식
세계를 대결시켜 나간다.))
#1 프롤로그
이것이 꿈이라면 다시 깨는 꿈이라면
가던 길 아니었을 때 되돌아 갈 수 있고
한 번쯤 물릴 수 있는 바둑 같은 꿈이라면
지금 나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다. 짓눌리고, 빼앗기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 어디든 가고
싶다. 지독했던 구조조정에 평생의 사업을 잃고, 모든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어
느 날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일상들, 가만히 누워만 있던 세상이 일제히 반기를
들며 일어서던 날, 그 노란 하늘을 난생 처음 마주 하던 날, 모든 색깔이 하루아침에 흑백으
로 바뀌고 입다문 군상들이 조소인 듯 냉소인 듯 아가리를 벌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고 집안
에서는 참았던 넋두리를 바가지로 퍼붓는다. 어디로 갈 것인가, 길이 있어도 갈 수 없고 누
구와도 만날 수가 없다. 이대로 어딘가로 가고 싶다. 갈 곳이 없어도 가고 싶다.
#2 홀로 가는 길
길이 보일까 길 밖을 나와 길을 간다
밟아도 밟아도 일어서는 봄풀 사이로
적막한 그늘을 깔고 늘어선 적송 사이로
초파일도 다 지난 어느 늦은 봄날,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 있어 나는 잠결처럼 꿈에 본
너를 찾아 산으로 간다. 들을 지나 내를 건너 송림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한없이 걸어간다.
미지근한 봄볕을 받으며 얼굴에 돋을 듯 말 듯한 땀을 문지르며 홀로 가는 길. 무슨 이끌림
에 이끌려 막연히 어딘가 있을 것 같고 언젠가 본 것 같은 내 마음 속 그 누군가 절대자를
찾아간다. 아니 나를 찾기 위해 또 다른 나를 찾아간다. 오월의 산길은 풀꽃내음 싱그럽고
높푸른 하늘에 뭉게구름 떠가고 온갖 잡새 울음소리를 안고 솔개 한 마리 푸드득 날아간다.
어딘들 낯설지가 않으랴, 내 가는 곳
꽃 지니 녹음인가 구부러진 고갯길
어딘들 낯설기만 하랴 새소리 기름진데
#3 절로 가는 길
누군가 던지고 간 내가 모르는 그 무엇
언젠가 잃어버린 찾지 못한 그 무엇
어덴지 있기는 있을 찾고야말 그 무엇
모두가 일하러 간 평일에 혼자 걸어 오르는 비탈길, 이팝나무 조팝나무 하얀 꽃에 잎 푸르
고, 서나무 몸을 배배 꼬며 자작나무 뒤에 불륜의 자세로 서 있다. 산허리 이 곳 저 곳 군락
이룬 조릿대는 낮은 키에도 눈치 없이 억센 생명력으로 줄지어 피었는데 계곡에는 많지도
작지도 않은 물이 고만고만 흐른다. 극락교 지나 물푸레나무 늙은 가지 위에 걸어둔 연등을
따라 가파른 길 오르면 돌기둥 짝으로 서서 찰간지주로 받치고선 저 한적한 듯 눈 익은 길,
그 너머로 실팍한 일주문이 보인다.
#4 일주문(一柱門)
허한 곳을 밟고 서서 僧俗을 가리운다
막힌 마음으로도 이 한 門 들어서면
휑하니 허공을 뚫고 무슨 소리 들릴까
길 위에 길을 막고 외발로 우뚝 선 일주문은 온통 주칠을 하고 사람을 오라는지 가라는지
온종일 말이 없다. 나도 말없이 문턱 없는 그 문을 넘어선다. 명리에 꽉 찬 마음을 잠시라도
비워볼 양으로 일없이 가슴 앞섶을 툭툭 털어 본다. 맥문동 지천으로 피어나는 이 문을 들
어서면 이제는 속계 아닌 법계란다. 속과 법이 어떻게 다르던가. 삼독(三毒)을 가시면 우담
발화 꽃이 필까, 꽉 막힌 자성의 문이 열릴까.
일주문 문턱 넘어 곧장 가다 오른 쪽 움푹 파진 곳에 반쯤 물이 고여 있는 손바닥 용지(龍
池)에는 용은 없고 갓 돋은 연잎 위에 청개구리 한 마리 목젖만 달랑이고 있다. 진초록 연
잎과 순백의 연꽃과 저 검은 물을 오고가며 무심으로 보고 보았을 이 절을 지나간 고승들의
무수한 눈알들이 이 고단한 웅덩이에 물방울로 잔뜩 고여 있다. (카메라 롱테이크)
#5 천왕문
마음에 죄 있는 듯 깨금발로 들어서면
목검창 내려칠 듯 서슬 푸른 사천왕네
가진 짐 다 놓고 가라는 벽력소리 들린다
나는 약간 주눅이 든 어깨로 천왕문을 들어선다. 때묻은 남루를 입고도 험악한 형상만은
여전한 어릴 적 기억 속의 금강역사는 죽지도 않고 저리 살아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불호
령을 내린다. 먼지 낀 전각을 창황히 나오다 문득 쳐다본 천장, 어느새 저 단청만큼 퇴색해
진 내 마음 한 자락을 보았다. 왠지 핑 도는 눈시울이 뜨겁다. 아직은 견딜 수 있다고 도리
질을 해보지만 한번 바래진 저 빛을 누가 다시 색칠할 수 있을 것인가. 밀려난 강물은 그저
뒷물에 밀려갈 뿐 역류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지나간 것은 그립고 세월도 인생도 덧없는 일
방통행이 아니던가.
#6 청운교
누구나 행복하고 싶지만 잠시도 행복하기 전에 우리는 예외 없이 종말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갈 뿐이다. 무엇이 영원한가.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공유할 수 있는 것
인가, 없는 것인가. 다리를 건너 우리는 무에서 유의 생으로 건너왔고 이제 다시 누구나 제
앞에 놓여 있는, 아니 갈 수 없는, 누군가 한사코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저 다리를 건너,
가기 싫어도 무의 세계로 다시 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둘인가 하나인가. 누가 선
이고 후인가. 차안 피안을 이 방 저 방처럼 오고 갈 수는 없는가. 가고, 오고,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여천지무궁(與天地無窮)코 싶다.
화해할 수 없는 거리를
한사코 부여잡고
허하고 허한 데를 골라
너와 나를 잇는다
공유치 못하는 마음
네게 가마
내게 오라 ("다리")
#7 불이문(不二門)
봄은 가는 것인지 꽃은 지는 것인지
스님도 보살님도 딴소리만 하는데
문설주 기왓장 머리 풀꽃 하나 이운다
가고 옴, 피고짐이 헷갈리는 봄 언저리, 둘 아닌 깨우침에 분별심이 서럽구나. 내 안에 들
었다는 참나를 무엇으로 볼거나. 온 마당에 햇볕이 눈부시고 노송을 받치고 선 철제 지주가
힘들어 보이는 한낮, 절간은 화식(火食)하는 발자국들로 시장만큼 분주하다. 꽉 닫은 요사채
엔 하얀 고무신만 승방의 기척을 알리는데 백일기도 접수처 먹글씨만 바람에 나붓긴다. 내
가 만날 사람은 저 안에 이제 없다. 백일기도를 할 일도, 49재의 위로할 혼령도 이미 없다.
#8 범종각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는 정오, 그림자도 없는 내가 걸음을 옮긴다. 울릴 시간이 지났거나
아직은 울리기에 이른 이 시각에 범종각으로 간다. 거기 오래 된 범종(梵鐘) 하나, 온몸에
천형 같은 문신을 달고 천년 전 매달린 모습으로 아직도 용뉴(龍 )에 목이 매여 있다.(카메
라 줌업) 무슨 운명처럼 맞아야만 소리내는 쇠둘레여, 너는 무슨 죄 그리 많아 공중에 매달
려 햇빛을 차단 당하고 어둠만 덕지덕지 쌓인 종각에서 우는가. 한걸음에 직선으로 달아나
지 못하고 미련처럼 길게 맴을 돌며 파문져 울리는가.
지상에 법고 울고 하늘에 雲板 떨면
물 없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저 물고기
쇠둘레 적멸로 가는 물살소리 들린다 ("鍾頌")
#9 탑과 석등
배롱꽃 붉게 핀 마당귀를 돌아나와 대웅전 뜨락에 석등 하나 서 있고 그 옆자리 무슨 보물
안내 표지판을 앞세운 오층석탑이 우두망찰로 서 있다. 절간이면 어디에나 있는 사리탑, 부
처의 사리는 진신사리로 온 세계에 흩어져 수 천년이 지나도록 성물로 봉안되지만 한갓 파
계승도 못된 이 몸은 무엇을 남기리. 캄캄한 대낮에 석등에 불 밝히고 소신공양한 어느 연
대의 등신불을 생각한다. 들어설 문도, 머무를 거처도 없이 번뇌도, 정열도, 사랑도, 육신도
다 태우고 단 몇 점 사리로 남아 자등명(自燈明)을 밝혀줄 그 무엇이 내게는 남아 있을 것
인가, 지금도.
둥글고 모난 돌에 이끼가 된 저 아우성
몸 태워 불 밝히던 火氣가 남았는지
두리번 공중새 한 마리 뜨거라 날아간다 ("어느 슬픈 절의 풍경")
#10 대웅전
석탑과 석등을 지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돌계단, 삼계를 돌아 돌아 어느 생에 내가 지은
업보라도 반조(返照)하듯 한 발 한 발 걸음 옮겨 하늘 능선에 서면 나비춤을 추는 자세로
떡 버티고 선 대웅보전이 드러난다. 아름드리 대들보에 얹힌, 늙었지만 아직 푸른 단청이 숨
막히고, 바람에 들린 신여성 치마자락처럼 하늘 향한 부연 끝에는 저 혼자 흔들리는 풍경
(風磬)들이 한가롭다. 졸졸졸 향불에 섞여 나오는 염불소리, 법당은 벌써 당도한 기도와 소
원들로 대 만원이다. 두 손을 맞잡은 비로자나불, 언제까지 동그라미만 내세우는 석가여래
불, 눈감고 잠만 자는 아미타불, 약사발을 손에 든 약사불, 그 둘레로 늘어선 문수보살, 보현
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천수보살, 여의륜보살, 대륜보살, 관자재보살, 정취보살, 만월
보살, 수월보살, 군다리보살, 십일면보살, 제대보살, 탱화 속의 나한들, 신장들... 부처님 권속
들은 저리 만원인데 저 많은 자리에 내 설 곳은 하나 없다.
발 벗고 두 손 모아 님의 길 다가가면
조는 듯 말이 없는 천년 전 그 미소에
무작정 조아린 무릎 터지는 줄 몰랐다 ("백팔배")
#11 법당 벽화와 사기꾼
법당을 나와 사면 벽화를 돌아보며 먼 고행과 구도의 길을 떠올린다. 솔거가 그린 솔나무
를 어디서 볼 것인가. 맞아, 깨달음은 나와는 무관한 것. 언제나 내가 닿을 수 없는 멀고먼
불국(佛國)에나 있는 것. 가부좌로 앉았으면 졸립지나 말든지 눈감고 선(禪)에 들면 오래 전
돈 떼인 생각만 난다. 울컥 치미는 아직 남은 분노. 슬그머니 이는 살기. 인연의 사슬에는
영원한 채무자도 영원한 채권자도 없거늘 대명천지 밝은 날에 이 무슨 꼬라진가. 나만 혼자
내려놓고 열차는 이 시간에도 달리는데... 썰렁한 마음에 문득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아,
시원한 바람. 그 바람에 젖은 몸이 구원을 얻는다. 아쉽게도 계속 불어주지는 않는다.
이 산 저 산 다 뒤져 약초를 캐어다가
독이란 독은 있는 대로 다 짜내어
그대들 진수성찬에 뿌리고도 싶었다 ("독도 약이 된다기에")
#12 전각들
통용문을 지나 산신각, 삼성각으로 간다. 부처님 오시기 전 보살펴주던 이 땅의 절대자를
찾아간다. 이방의 부처님께 밀려나 외로운 구석자리에서 숨만 쉬는 토테미즘, 샤머니즘의 전
각들. 무섭지도 않은, 떡 한 개 달라면 줄 것도 같은 동네 할아버지 같은, 무엇이나 다 들어
줄 것 같은, 그러나 끝내는 다 들어주지도 못하는, 말로만 영험하신 산신님, 영덕님, 칠성
님.... 가만히 눈감으면 먼저간 누이가 서걱이는 낙엽을 밟고 금방이라도 저 명부전을 돌아
나올 것 같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전 비나이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말짱한 목소리가
하마 새벽잠을 깨어 당산나무 옆 우물가에서 목욕재계하시며 아직도 무언가를 빌고 있을 것
만 같은 칠성당. 그리로 간다. 돗자리 위에 향불이 타고 촛농이 흐믈거리는 내 유년의 나즈
막한 골방 같은 소법당. 이 시각,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는 요기 서린 적막만 흐른다.
그리움이란 그리움은 죄다 모여 있는 곳
부르면 달려나올 순번 없는 이름들이
이 저승 구분도 없이 살아, 살아 있는 곳! ("토템을 위한 에스키스")
#13 불두화 그늘 아래서
탈 많은 시간들이 많이도 흘러갔다. 철 들어 오늘까지 많은 것이 흘러갔고 많은 이가 떠나
갔다. 빈 몸에 전각을 돌아 나와 후원의 불두화나무 그늘에 앉아 불두화 망울을 본다. 끝도
한도 없이 조개구름처럼 피어나는 하얀 저 꽃 속에 새가리처럼 숨어 있는 미망들, 내가 지
고 온 아직 벗지 못한 이 번뇌들을 어찌하면 타파하느냐. 외로움도 서러움도 미움까지도 한
데 모아 내 오늘 불두화를 그린다. 그리고 그려내어 마침내 더 그릴 수 없을 때까지. 모든
것이 끝나는 곳에 새 길은 보인다지. 이제야 내가 나를 정면으로 만나는 찰나다. (카메라,
내 눈 속으로 들어가서 긴 동굴을 지나 이상향으로 간다. 눈썹 위 창공에 낮달 하나 걸렸
다)
지상에 없는 뜨락
내 가슴에만 피는 꽃
영혼의 혈을 찾아
하얗게 뜸을 뜨듯
내 마음 빗장을 풀어
낮달 하나 토한다 ("불두화")
#14 절을 내려오며
절은, 그래도 없는 듯 다 있었다. 산도 물도 땅도 집도 다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떠나는
것은 구름, 바람이었다. 안개가 산과 절을 가릴 수는 있으나 아침 식전이나 어스름 때 잠깐
뿐이다. 이제는 내 안의 나를 찾아내어야 한다. 옷 잘 입고 밥 잘 먹는 나는 누구인가. 무
엇이 따뜻하며 무엇이 차가운가. 흐르고 흐르는 물에 시린 손을 담가본다. 찢어진 시간의 가
랑이를 붙들고 다시 나는 이 절을 내려가야 한다. 저 음모 가득 찬 소음 속으로 저 매캐한
연기 속으로.
지나친 반평생을 무엇으로 값하랴. 진작에 내가 나를 알 수 있었다면 진실로 과거의 나를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번연히 알면서도 번번이 못 버리고
놓으면 편할 것을 놓을 줄 모른다네
바람은 저대로 왔다가 저 갈 대로 가는데...
#15 에필로그
돌 틈 속 잡풀이라서 흙내음을 모르랴
뻗고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
한 뼘의 착지를 위해 허리 꺾이는 풀잎들 ("풀은 풀이라서")
산길을 걷고 걸으면 내 몸이 길이 된다. 안개의 안개 속에서 하얗게 트이던 길, 그 길에 돋
는 풀잎 하나도 긴 이야기가 된다. 그 길을 따라 나는 내려왔다. 세상의 일상 속으로 뱀처럼
파고 들어간다. 다시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내 살기 위해 남을 찝는다. 이 여름을 나기
위해 나머지 계절을 팔아야 한다. 다시 오르기 위해 저 산을 또 넘어야 한다. 풀에게는 너무
높고 먼 산. 산, 산. 산만 보인다. (카메라 줌아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