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 대 일인의 싸움
철학예술가로서 나는 이 세상의 삶을 향유하는 데 그 무엇보다도 관심이 있고, 또, 그것은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행복론으로 나타난 바가 있다. 따라서 나의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절대 긍정을 위한 비판이다. 나는 가능하면 가장 어렵고 힘들고, 그 어느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것, 그러나 누군가가 꼭 해야만 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왔고, 그것으로 인하여 염세주의, 기독교, 불교, 공산주의, 현대 민주주의, 그리고 그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상반되는 길을 걸어왔던 셈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어중이 떠중이들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자청하게 된 것이며, 단 한 명의 원군이나 우군도 없이 가장 강력한 적들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걸만큼 충분히 강하고, 생사의 문제를 헐리우드의 전쟁 영화처럼 가볍게 여길 줄도 알고 있다. 싸움은 인간을 비정하고 잔인하게 만들고, 또한 그것은 인간을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싸움은 싸움의 목적을 분명하게 만들고, 그 싸움의 결과가 승리일 때는 최고의 희열을, 그렇지 않을 때는 목숨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비참한 상실감을 미리부터 맛보게 한다. 어떤 싸움이든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승리이며, 그 승리의 축배는 돈, 명예, 권력, 그밖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나는 천성적으로 호전적이고 전투적이지만, 나는 나의 싸움에 관한 실천 원칙을 갖고 있다. 나의 싸움은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며, 이제까지의 그 싸움이 만인들의 횡포에 견디지 못한 일인의 싸움에 불과했다면, 나는 그 ‘원한 맺힌 저주 감정’ 없이 만인들의 어리석음을 문제삼고, 그들 모두가 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나의 적이 될 수밖에 없도록 몰아 부쳤던 것이 그 특징적이다. 나의 욕망은 상승 욕망이며, 그 상승 욕망은 니체의 권력 욕망이나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을 하위 개념으로, 혹은 종속 개념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 그 신적인 인간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내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 즉, 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학자들은 신문과 대중매체, 넋 잃은 독자와 그 옹호자들에 둘러싸여 매우 보잘 것 없고 아주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기가 십상이지만, 나의 승리는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패배에 둘러싸여 그 승리의 의미도 퇴색해 버리고, 이내 그 몸 둘 곳을 몰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양상일 뿐, 그 깊은 곳에서는 언젠가는 새로운 태양처럼 떠오르게 될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높이 높이 날아오른 새가 잘 보이지 않듯이, 깊이 깊이 내면으로 스며든 나의 승리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에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낙천주의자의 신전의 건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은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명예이며, 삶의 완성이며, 보다 완전한 인간의 표지이다.
----반경환, [포효하는 삶]({행복의 깊이 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