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자 피겨 스케이팅의 '샛별'(新星) 카밀라 발리예바(17)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에 불거진 반도핑 위반 혐의(금지 약물 복용 혐의)가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의해 인정돼 4년간 선수 자격이 박탈됐다. 또 그녀가 속한 러시아 대표팀의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단체전 금메달도 무효로 처리된다.
눈물을 훔치는 발리예바. 위는 2023년 4월 러시아 매체 '뉴스루' 인터뷰, 아래는 베이징 동계올림픽 프리스케이팅 후/사진출처:뉴스루, 러시아올림픽위원회 텔레그램
스포츠 전문 매체 '참피온'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스위스 로잔에 본부를 둔 CAS는 29일 발리예바의 반도핑 혐의를 심리한 결과, "위반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정했다. 이를 근거로 발리예바에게 국제빙상경기연맹(ISU)과 세계반도핑기구( WADA) 등 관계 기관이 요구한 최고형(4년 자격 정지)를 선고했다. '참피온'은 "최근 몇 년간 피겨 스케이팅 부문에서 가장 충격적인 도핑 사건으로 끝났다"고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CAS 심리의 쟁점은 발리예바의 도핑 테스트에서 나온 금지약물 '트리메타지딘'의 양성 반응이 고의적으로 복용한 결과이냐, 아니냐였다. 협심증 치료제 성분인 '트리메타지딘'은 운동선수의 신체 능력 향상에 사용될 수 있어 2014년 금지약물이 지정됐다. 발리예바 측은 처음부터 "할아버지의 심장약 성분 때문에 약물 양성반응이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고의적이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녀의 변호인단은 CAS 변론에서 '도핑 방지 규정 위반이 고의가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입증하지 못했다"고 현지 매체들은 지적했다. 또 주니어 신분(당시 15세)이라고 하더라도, 반도핑 규정에는 '보호자'의 행위 혹은 역할도 포함된다고 했다. 설사 할아버지 때문에 양성 반응이 나왔더라도 면책 사항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CAS 본부 모습/사진출처:위키피디아
CAS의 이번 결정으로 러시아반도핑위원회(RUSADA)는 머쓱해졌다. RUSADA는 꼭 1년 전(2023년 1월) 자체 조사를 거쳐 발리예바에게 도핑 검사를 실시한 대회(2021년 12월 25일 러시아 선수권 대회)의 결과만 무효로 처리하고, 추가 징계 조치는 내리지 않았다.
이에 WADA 등은 RUSADA가 발리예바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비판하면서 사건을 CAS에 제소했다. CAS는 1년여의 심의 끝에 RUSADA의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그것도 '4년 자격정지'라는 최고의 징계 조치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CAS는 지난해 9월 공개 변론을 끝낸 뒤에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두달 후인 11월 9, 10일 심의를 속행했다. 발리예바도 지난해 11월 9일 온라인으로 CAS 질의에 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발리예바의 자격 정지 기간은 약물 검사가 있었던 2021년 12월부터 시작해 내년 12월까지다.
이번 CAS의 결정에 따라 ISU는 내달 7일 베이징 동계올림픽 단체 메달의 순위를 결정한다. 단체전의 경우, 발리예바를 제외한 나머지 점수로 등수를 매긴다고 한다. 그럴 경우, 러시아팀은 4위로 내려가고, 남자 싱글의 마크 콘드라츄크와 페어 부문의 아나스타시아 미쉬나/알렉산드르 갈랴모프, 빅토리아 시니치나/니키타 카찰라포프의 금메달도 없던 일이 된다. 단체전 시상식은 발리예바 도핑 사건으로 연기된 상태다. 동계 올림픽 진행 당시 단체전 2위를 차지한 미국에게 금메달이, 은메달은 일본, 동메달은 캐나다에게 돌아가고, 뒤늦은 시상식이 열릴 수도 있다.
발리예바는 이번 결정으로 유럽선수권 대회와 러시아선수권 대회의 금메달을 포함해 10개의 메달이 박탈될 것으로 전해졌다.
CAS의 판단에 러시아는 크게 반발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이것은 정치적인 결정으로 동의할 수 없다"며 "항소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사용하는 등 우리 선수의 이익을 끝까지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지 스포츠 변호사인 안나 안첼리오비치는 "절차상으로는 30일 이내에 스위스 대법원에 항소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스위스 대법원은 당사자들이 중재 재판소(CAS)의 결정에 따르기로 동의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각하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열연하는 발리예바/사진출처:러시아올림픽위원회 텔레그램 채널
발리예바는 주니어 시절부터 남자 선수도 하기 어렵다는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안정적으로 구사하며 대회가 열릴 때마다 세계기록을 경신해온 '떠오르는 스타'였다. 그러나 2021년 12월 러시아 전국 피겨스케이트 선수권 대회에서 받은 약물 검사에서 '트리메타지딘' 성분에 양성 반응을 보이면서 베이징 동계올림픽 당시 큰 논란에 휩싸였다. 그 영향 탓인지, 베이징 올림픽 여자 싱글 부문에서는 4위로 추락했다.
이후 2022∼2023 시즌에서도 예전의 기량을 되찾지 못했다. 2023년 3월에 열린 러시아 그랑프리 파이널 여자 싱글에서 아델리야 페트로샨(16)에게 금메달을 내주고, 은메달에 머물렀다. 페트로샨은 여자 싱글 선수 중 처음으로 쿼드러플 리트버거를 피겨 역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구사한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2023~2024시즌에서도 발리예바는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2023년 11월 러시아 타타르스탄공화국 카잔에서 열린 러시아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대회에서는 4위로 처져 충격을 안겨줬다. 다만, 당시 그녀는 CAS 비공개 2차 심의에 온라인으로 응한 뒤 카잔으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경기에 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해 12월에 열린 러시아 선수권 대회에서도 페르토샨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주고, 발리예바는 3위에 그쳤다.
세계 최정상급의 러시아 여자 피겨 선수들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이후 ISU 주관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해, 지난 몇년간 세계 무대에 서지 못했다. 발리예바의 뒤를 잇는 페트로샨 같은 선수가 세계 무대에서 어떤 기량을 보여줄 지 궁금하다.
ISU가 2022년 6월 시니어 대회 출전 나이를 2023-2024 시즌부터 만 16세, 2024-2025시즌부터는 만 17세로 올렸기 때문에, 러시아 선수들의 출전 정지가 풀리면 페트로샨은 곧바로 성인 무대에 데뷔할 수 있다. 그녀가 발리예바를 대신해 러시아를 대표하는 '피겨 여왕'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