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의가 진행되면서 강조되는 주제를 두 가지 꼽으라면 바로 '정체성', 그리고 '떠남'일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먼저 떠났지만, 정체성을 깨닫고 떠나든, 떠나고 나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든, 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언듯 보면 별개의 주제 같이 보이는 두 주제는 창세기 안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아니다. 이 두 주제를 신묘하게 합칠 수 있는 한 단어를 이번 강의에서 목사님은 내내 언급하셨다. 자신의 지난 삶을 얘기해주시면서 말이다. '부르심'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부른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앎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순간에 나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고, 나를 부른다는 것은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고 그곳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철수야, 이리와", 아니면 "영희야, 시장에 가서 두부 좀 사와라"와 같은 지시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이게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확신은 없습니다만). 다만 아브람의 경우엔 목적지를 먼저 알려주지 않으셨던 점이 특기할만하다.
목사님께서 또 한 가지 강조하신 점은, 하나님께서는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인 시대와 상황 속에서 불러주시며, 또한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불러주신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창세기 강의를 진행하시면서 인간은 원자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관계적 존재임을 누누이 언급하셨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개인만을 위한 부르심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나'는 내 주변 관계망의 총체이기에, 흔히 떠올리듯이 '나' 혼자만 관계에서 떨어져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관계 속에서 '너'와 관계로써 섞여 있다. 내가 누구와 함께 하는가에 따라 '나'는 순간순간 결정되고, 그러한 '나'에 의해 '너'도 그때그때 '나'에게 시시각각으로 드러난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된 초창기 때는(물론 지금도 그다지 오래 되진 않았지만), 여전히 도시의 정점을 바라보던 나는 그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었지, 이곳에서 소박한 공동체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섞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이웃으로 살게 되었으니 예의상 어쩔 수 없는 만남이 몇 번 있었는데, 고작 그 몇 번의 만남과 대화가 나의 관계망을, 내 삶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바꿔놓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다. '정체성', '떠남', 그리고 '부르심'. 이 세 개념은 결국 내 삶을 향하고 있다. "부르심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삶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니체가 여느 철학자들처럼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하고 정교한 논증을 제시한 글이 아니라 마치 시나 소설과 같이 알쏭달쏭하게 글을 쓴 이유는, 철학은 어디까지나 삶을 위한 철학이어야 하기에 개념과 논증에 얽매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학을 하지 않는 이상,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할 가치 체계이자 원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세기 강의를 신청하면서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겪었던 기적과 같은 변화를 기대했지만, 실은 삶이란 '너'와 함께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과 같아서, 창세기에서 배운 바를 꾸준히 실천해나가야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만족하고자 한다(물론 나에게 저런 기대를 하게 한, 나로 하여금 이 강의를 신청하게 만든 장본인에게는 환불을 강력하게 요구할 생각이다).
왜 목사님께서 강의 후, 그리고 4주차와 8주차에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하셨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밤이다.
첫댓글 진리형제 드라이브 한 번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