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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언어] βάπτɩσμα(밥티스마, 그리스어) : 세례
‘밥티스마’는 본래 무엇인가를 물에 깊이 담구어 씻는 것과 관련되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죄를 씻는 행위, 곧 ‘세례’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것은 세례가 당신 사명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르 10,35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과 세례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곧, 당신이 마시는 잔이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면(마르 14,36), 세례도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 많은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진 것처럼,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집니다. 여기서 ‘갈라지다’, ‘찢어지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그리스말로 같은 동사, 곧 ‘스키조’입니다. 또한, 세례 때 하늘이 갈라지면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성전 휘장이 찢어질 때 백인대장이 외친 소리가 서로 동일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례 때 성령이 ‘비둘기’모양으로 내려오는데, ‘비둘기’를 히브리말로 ‘요나’라고 그럽니다. 고래 뱃속에 사흘 들어갔다 나온 요나처럼 예수님도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73) 마리아의 종속적 구원 임무, 「교회헌장」 제62항
「교회헌장」 제62항은 61항 끝의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어머니”라는 언급을 이어받아 ‘어머니 임무’가 지닌 종말론적 특성을 조명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계획 안에서 마리아의 모성은, 이 세상에서 주님 탄생 예고 때 믿음으로 동의하시고 십자가 아래서도 견고히 간직하셨던 그 동의에서 시작되어 천상 세계에서 선택된 모든 이들이 영원히 완성되는 순간까지 지속됩니다.
이에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구원의 임무를 계속하시어 당신의 전구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십니다. 또한 당신의 모성으로 이 세상에서 나그넷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돌보시어 하느님 나라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런 어머니의 임무로 말미암아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교회 안에서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로 불립니다. 그러나 공의회는 이러한 호칭이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60항 참조)의 존엄과 능력에서 아무것도 덜어내거나 덧붙이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강조합니다. 이는 단지 아드님에 대한 유비로서 마리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피조물도 강생하신 말씀 곧 구세주와 결코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성직자와 평신도가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듯, 또한 하느님의 유일한 선성(善性)이 피조물들 안에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퍼져 나가듯, 구세주의 유일한 중개 역시 피조물들이 그 유일한 원천에 참여하는 다양한 협력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불러일으킵니다.
공의회는 마리아의 이러한 역할을 ‘종속적 임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는 마리아의 종속적 임무를 의심 없이 믿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체험하며, 신자들이 어머니의 도우심과 보호로 유일한 중개자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황청 신앙교리부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마리아를 가리켜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분명히 반대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그 무엇도 결코 자신의 것으로 취하지 않으셨으며, 스스로를 늘 아드님의 제자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구세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므로 이 호칭은 결코 중복되어 사용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에 종속된 마리아의 역할을 설명할 때, 그분의 협력을 규정하고자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마리아를 구속과 은총 활동에서 가장 뛰어난 협력자로 공경하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상식 더하기] (39) 교회에도 군대가 있다?
묵주 · 십자가로 영적 투쟁 나서는 그리스도의 군사들
군대는 나라와 국민을 보호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때로 그 무력이 전쟁이라는 참상에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가르치는 교회와 군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군대가 있습니다. 심지어 그 군세가 전 세계에 수천만 명이나 됩니다. 아마 이미 어떤 군대인지 예상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바로 총과 칼이 아닌 십자가를, 그리고 묵주를 들고 ‘영적 투쟁’을 하는 군대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군대’가 여럿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성모님이 지휘관이신(?) 군대가 참 많은데요. 먼저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는 이름부터가 라틴어로 ‘마리아의 군대’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복음 전파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 군대의 조직을 본떠 운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쁘레시디움’, ‘아치에스’ 등 라틴어 군사 용어를 사용하는 점이 특징입니다.
1917년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이 창설한 성모 신심 운동인 성모기사회(Militia Immaculatae)의 명칭도 라틴어로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군대’라는 의미입니다.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기도와 복음 선포를 통해 영혼 구원에 힘쓰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은 설립 당시 명칭에 따라 ‘푸른군대(The Blue Army)’라고도 불리는데요. 1917년 파티마 성모 발현 메시지를 실천하기 위해 시작된 국제 신심운동입니다. 성모님의 요청에 따라 회개와 보속, 묵주기도를 봉헌하며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군대라 할 수 있는 기사단에서 시작된 곳도 있습니다. 1113년 설립된 몰타기사단, 바로 ‘오더 오브 몰타(Order of Malta)’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순례자와 병자를 돌보던 병원 공동체에서 시작된 이 기사단은 중세에는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국경을 초월해 신앙을 지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콜럼버스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은 1882년 미국에서 창설됐습니다. 중세부터 이어지는 기사단은 아니지만, 기사단의 전통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남성 평신도 단체입니다. 자선·일치·형제애·애국심 등의 고유 원칙을 바탕으로 신앙을 수호하고 가정·교회·사회를 위한 다양한 자선·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교회에 이처럼 군대가 많은 건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의 활동이 군대의 전투와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에페 6,11)라고 가르치시고, 또 “그리스도 예수님의 훌륭한 군사답게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2,3)라고 당부합니다. 온갖 죄악에 맞서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훌륭한 군사’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무기’를 잘 점검해야겠습니다.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22. 구약성경에 나타난 기도 ① (「가톨릭교회 교리서」 2566~2573항)
기도는 끊임없는 자기 신뢰와의 싸움
예전에 어떤 자매가 아기를 낳고는 불안증으로 한강에서 아기와 함께 뛰어내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아기를 빼앗아 갈 것 같은 불안증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아파트 창문에 창살까지 만들어주고 잠금장치를 여러 개 달아주어도 불안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자매는 아기를 안고 택시를 타고 친정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니면 어떻게 하느냐며 딸을 돌려보냈습니다. 결국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는 아기를 안고 한강으로 뛰어내린 것입니다. 아기는 죽고 아기 엄마는 구조되었습니다.
왜 불안이 우리를 괴롭힐까요? 불안은 생존을 위해 우리 몸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고 하셨습니다. 아기 엄마는 자기 힘으로 아기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결국 자기를 믿는 마음이 아기를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생존의 문제는 우리에게 달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아이들처럼 자신보다 부모에게 자기 생존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훨씬 안전해집니다. 이처럼 의탁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기도의 큰 목적 중 하나입니다.
교리서는 “구약성경에서 기도가 계시된 것은 특히 우리의 성조 아브라함부터이다”(256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믿음의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2572) 그리고 기꺼이 하느님의 청에 응답함으로써 당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합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교만만을 키울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 나에게 해로운 것만을 청하다 끝이 납니다. 기도는 내 안의 의탁하지 못하는 교만한 성향을 정화하는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를 믿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일만 생각”(마태 16,23)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때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아끼는 것을 빼앗으면서까지 우리를 당신께만 의탁하는 존재로 만들려 하십니다.
기도는 진정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꾸준히 신뢰하는 것으로, 약속된 승리를 확신하기 위하여 겪어야 하는 신앙의 싸움”(2592)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를 만나러 갈 때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축복을 청합니다. 밤새 천사와 씨름합니다. 이 이야기는 기도의 상징으로 “신앙의 싸움과 끈기의 승리”(2573)가 기도의 목적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야곱은 에사우를 만날 힘을 얻고 그에게 나아갑니다. 하느님이 무서워 나무 뒤로 숨던 아담과 대조됩니다. 기도는 나를 이기려는 노력입니다. 나를 이기지 못하면 불안과 두려움에 이웃과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자기를 믿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자신을 믿지 않아야 어린이처럼 부모에게 의탁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믿는 마음을 교만이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털끝만치도 자기를 믿지 말라”(「영혼의 성」 제2궁방, 9항)고 권고합니다. 모세를 믿고 이집트에서 탈출했다면 더는 파라오 시절을 그리워해서는 안 됩니다. 교리서는 이 끊임없는 자기 신뢰와의 싸움이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
[가톨릭 신학17] “저승에 가시어” : “하느님은 어디까지 함께 계실까?”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돌아가심에 이어 ‘저승에 가심’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하는데요,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 사도는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라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러 충만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사도 2,24-28 참조)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으므로 죽은 이들에게 가신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에게 당연했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죽은 이들과 함께 계셨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셨음은 바오로 서간에서 예수님을 ‘땅의 낮은 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켜진 분이라고 고백할 때에도 전제되어 있습니다.(로마 10,7; 콜로 2,12 참조)
그럼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서는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3,19) 하셨고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4,6)라고 전합니다. 이 때문에 종종 이 상황을 그린 성화에서 예수님은 개선장군처럼 힘차게 묘사됩니다. 그러셨을 것 같기도 하지요?
한편 신학자 중에서는 저승에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성자께서 인간 죽음의 모든 법칙에 스스로를 적용시키셨다고 보았고, 성 이레네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상태를 취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셨는데 이는 저승에 가게 되는 단계도 포함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그가 우리의 악행을 짊어졌고, 우리의 고통을 참아 받았다’고 한 이사야서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저승에서 구하시기 위해서는 저승에 내려가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교부들의 이런 말씀은 저승에 가신 예수님을 개선장군처럼 이해하기보다는 저승에 있는 인간들과 같은 처지에 계셨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곳인 ‘저승’은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과 어떤 친교도 없는 상태입니다. “저승에서 누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6,6) “저승은 당신을 찬송할 수 없고 죽음은 당신을 찬양할 수 없으며 구렁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당신의 성실하심에 희망을 두지 못합니다.”(이사 38,18)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죽음과 그 결과인 죽음 이후의 상태까지 당신 것으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승에 가시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를 드러냅니다. 사람으로서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그분도 겪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이 왔습니다. 사실 하느님이신 그분이 이렇게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곧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이렇게 보면, 저승에 계신 예수님을 개선장군으로 볼지 말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 거기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아닐까요? ‘저승에 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입니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21.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138항)
진정한 자유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 안에서 실행돼야
“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갖고 한 일은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김수환 추기경 이야기 「우리 곁에 왔던 성자」)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어른
얼마 전 어떤 성당에서 어린이 미사를 드렸습니다. 아이들에게 성당에 오면 좋은지 물었더니 좋다고 대답하더군요. 이유에 대해 물었더니 “예수님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기특하고 대견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경쟁에 시달리며 많은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성당 다니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당 오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모습에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모쪼록 그 아이들이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런 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어른이 돼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독자분들도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런 어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올바른 자유?
자유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며,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자유가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릇된 방법으로, 더욱이 자신을 즐겁게만 하는 것이 참다운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일찍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현대의 일부 사조가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시킴으로써 초월자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음을 우려했던 것처럼 현대사회는 자유가 남용되고 있습니다.(「진리의 광채」 31항)
그 잘못된 사조란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생각, 도덕과 윤리의 경시입니다. 요컨대 자유란 아무것이나 말하고 행할 권리가 아니며, 이익과 쾌락 충족이 자유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느님의 계시, 윤리와 도덕, 용서와 화해, 이웃사랑 안에서 실행돼야 합니다.
인간과 사회 발전의 토대
지금은 과거보다 풍요로워졌고 문명과 기술도 놀라우리만치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께서 사회와 세상이 무척 혼란스럽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점점 살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그 이유는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사회가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 관심을 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것은 우리가 배운 교육 내용에서 우선순위는 아니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현재 젊은 세대들의 고단한 삶도 수긍이 가지만 몇십 년 전은 분명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 속에서 서로 위해 주고 약한 이웃을 돌보자는 목소리는 힘든 시기를 견디는 원동력이자 사회가 바르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였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깨닫습니다. 서로를 돌보지 못하고 무관심하며,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는 사회는 아무것도 쌓아 올릴 수 없다는 냉정한 성적표를 말입니다. 자유와 도덕, 신앙과 하느님 가르침을 절실히 싹틔워야 합니다.
“자유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기원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시에 삶은 자유가 지닌 한계성과 가능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자유는 피조물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자유는 선물로 주어진 것이며, 마치 한 알의 씨처럼 받아들여 책임감을 가지고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38항)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21. 기도란 무엇인가?(「가톨릭교회 교리서」 2558~2565항)
기도는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
2014년 12월 1일 EBS 뉴스 가운데 ‘죽은 딸의 심장소리를 다시 듣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열세 살 테일러는 천진난만한 아이였는데 가족과 함께 스키장으로 여행을 갔다가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가족은 테일러가 사랑이 많았음을 잘 알았고 더 늦기 전에 다섯 명의 죽어가던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기로 합니다.
그 가운데 테일러의 심장을 이식받은 환자는 애리조나주에 사는 마흔 세 살의 패트리샤였습니다. 5년 동안 심근증으로 고통을 받아왔던 패트리샤는 테일러의 건강한 심장을 이식받았습니다. 패트리샤는 온라인을 통해 테일러에 대해 알게 되었고 테일러의 부모를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평소에 테일러와 함께 침대에 누워 꼭 껴안아 주곤 했던 엄마 타라도 익숙한 딸의 심장 소리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딸의 심장 소리를 다시 듣게 된 엄마와 아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테일러의 심장이 다시 뛰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어요). 테일러가 준 생명의 선물 덕분에 패트리샤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테일러의 엄마는 딸의 이름으로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장기기증을 꺼리는 이들의 마음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마지막 네 번째 편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기도의 개념에 대해 나옵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위 이야기에서 패트리샤가 한 일이 기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당신 아드님의 심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께 감사하기 위해 달려가지 않으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진전되지 못합니다. 서로 다가가야 합니다. 패트리샤는 테일러의 심장만이 아니라 그 부모의 사랑도 만났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2559)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요한 4,10) 우리는 이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대로 “인간은 하느님께 비는 걸인”(2559)입니다. 인간에게 새로운 심장을 주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내어놓으신 아버지도 아들이 만나고 싶습니다.
유튜브 채널 ‘공감픽’에 ‘4000㎞를 자전거 타고 온 아빠. 죽은 딸의 심장 소리를 듣자 눈물이’라는 사연이 있습니다. 딸의 장기를 받은 세 명의 환자를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만나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심장을 받은 사람만이 아버지를 만나주었습니다. 그는 청진기를 가지고 나와 딸의 심장 소리를 들려줍니다. 아버지는 하염없이 애환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신 아버지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하늘에 계신 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입니다.”(2560)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필리 2,5 참조) 마음은 “결단을 내리는 자리”(2563)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넘치는 심장을 받고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심장이 작동을 멈추었다고 봐도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관계이기 때문입니다.”(25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