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일암(向日庵) 동백
'거제도 장승포 앞에 가면 지심도란 섬안의 섬이 있다. 여기 향기 진동하는 백설의 매화밭이 있어서 두 선녀가 옷깃에 매화꽃 꽂고 조용히 거닐어, 훈풍을 타고 은은한 매향(梅香)은 뒤로 날리므로, 우리는 흥겨운 마음으로 그 향기를 따라 걸어갔다.'
작년 봄에 쓴 ‘고사심매도(高士尋梅圖)’ 한 부분이다. 금년에도 매화 찾아 토평 잠실 두 선녀 태우고 심춘(尋春) 여행 떠나니, 어제 일요일은 비 오더니, 월요일 아침은 어이 이리 맑으냐? 단번에 대전 무주 거쳐 섬진강 다압마을 닿으니, 에메랄드처럼 푸른 봄강에 매화꽃 비치고, 산은 흰눈처럼 꽃을 뒤집어 썼다.
두보는 나이 47세 때 곡강(曲江)에서 꽃을 보며, '한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드니(一片花飛減卻春),
바람에 날리는 꽃비 사람을 수심에 들게한다(風飄萬點正愁人) 하였다.
꽃 피는 강마을 보면서 시심(詩心) 발동하여 우리도 한번 바람에 날리는 꽃비에 깊은 시름 좀 해보려하였다. 그런데 아깝다. 청매실농원은 인파로 야단법석, 장사진한 차들 매연에 매향(梅香)은 멀다.
섬진강이 매화라면 여수는 동백꽃이다. 아름다운(麗), 물(水) 두 자 합하여 여수(麗水)다. 오동도 직행하여 동백 숲 오솔길 걸으니, 머리 위는 심홍의 동백꽃이고, 발 아래는 훈풍에 나부끼는 봄풀이다. 바다는 황혼인데 멀리 구름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것이 섬이다. 짭조름한 바다냄새 맡으며 해조음(海潮音) 들으니, 덧없는 건 세월이요, 남은 건 여수(旅愁)다. 함께 온 귀밑머리 흰 초로(初老)의 여인 40년 전에는 김춘수의 시처럼 잊혀지지않는 눈짓, 빛깔과 향기 그윽한 꽃이 아니었던가.
‘한일관이 어디오?’ 거리에서 세 번 길 물어도,여수 사람들이 다 아는 걸 보니 그 집이 유명한 집이긴 한 모양이다. 나오는 반찬 가짓수는 대략 60가지. 음식을 한 상에 다 못올려 세 번 상 채린다.
반찬을 생각나는대로 대충 적으면, 굴, 해삼, 멍게, 개불, 전복, 소라, 가이버시, 한치, 홍어찜, 성게알, 대하, 문어, 아나고, 마구로, 랍스터, 뱅어, 장어 구이, 복어 튀김, 민어 껍질, 참치,머리구이, 대하, 어죽, 복지리, 묵무침, 잡채, 갈비, 족발, 멸치젖, 김국, 된장국, 것절이, 새송이, 고추, 상추, 고구마, 오렌지, 솔잎차 등이다.
문제는 양이 아니고 세련된 질이다. 싱싱한 채소와 회, 다음에 삶고, 굽고, 찌고, 튀기고, 지지고, 볶고, 무치고, 절이고, 졸이고, 끓인, 이 지방 대대로 전래된 전통음식 솜씨 나온다. 음식도 문화인데, 이쯤이면 이집 주방장 인간문화재 감이다.
내 일찌기 상해 홍구(虹口)공원 앞 어느 식당에서, 양자강 하구에서 잡히는 발 밑부분이 부드럽고 까만 털이 빽빽한 민물털게 요리. 살아있는 게를 술에 담아먹는 ‘취해’(醉蟹). 껍질채 푹 졸인 ‘장초청해’(醬炒靑蟹). 게껍질에 게살과 알을 채워 쪄먹는 ‘부용해투’(芙蓉蟹鬪). 게살과 두부를 졸인 ‘해분두부’(蟹粉豆腐)같은 다양한 게요리와 그 밖에 뱀장어와 해삼, 자라, 새우 등으로 만든 진미를 보고 중국의 음식문화에 감탄한적 있거니와 여수에 이런 집이 있다는 것이 정말로 다행스럽다.
‘정말 좋은 집 안내해줘서 감사합니다.’
외교관으로 미국생활 오래한 이장군 부인이 좋은 집 조사해서 안내한 걸 치하한다. 하기사 돈 있다고 숨어있는 알짜배기집 찾긴 어렵다.
돌산대교 지나며 보는 밤바다는 여수항 불빛으로 산데리아처럼 영롱하다. 비취빛 물결 위에 수천수만의 다이야몬드 박힌 바다다. 그걸 보며 네 사람은 각자 무슨 생각을 했던가? 돌산도, 방죽포, 임포 가는 길 검은 바다 위 먼 외로운 등불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금오산(金鰲山) 밑 모텔에서 자고 아침에 향일암(向日庵) 오르니, 바람은 고요하고 바다는 황금빛이다. 훤칠하게 잘 세운 목조(木造) 일주문 올라서자 바다로 자라처럼 생긴 금오산 끝자락이 헤엄쳐가고 있다. 그래 '금'(金) 자에 큰 자라 '오'(鰲) 자 합해서 ‘금오산’인 갑다. 가쁜 숨 들이키며 화강암 계단 밟고 절벽길 올라가니, 발 밑은 무성한 고목 사이로 황금물결 출렁거린다. 마르코폴로가 애달프게 찾던 황금향의 황금사원 오르는 기분이다.
이윽고 향일암 근처 수십척 높은 기암괴석 석문(石門) '반야문’에 도착하니, 바위는 누가 칼로 쪼갠 것인가. 쩌억 갈라져있는데, 돌 사이 사람 하나 겨우 통과하는 좁은 계단 그 한번 신통하다. 암석이 어찌나 우람한지 사람이 밑에 서니 스스로 개미보다 작게 느껴진다. 자동으로 하심(下心)토록 만든다.
경내 올라가니 암자는 거대한 촉석(矗石) 아래 끝없이 툭 트인 시야다. 발 아래 바다가 보인다. 동백나무 숲에 덮힌 신령한 귀갑(龜甲)무늬 바위 사이 화강암 깐 길은 누각과 약수터로 운치있게 연결되어있다. 시원한 약수로 목 한번 축이고 바위에 앉았으니, 바람은 수많은 동백잎을 흔들고 새소리는 맑다.
대웅전 부처님 얼굴은 바다에서 비치는 황금 광채를 정면으로 받으며 미소 띄고 있다. 은은한 염불소리와 향냄새가 수백년 된 느티나무 가지와 처마에 매달린 풍경(風磬) 사이로 흩어지고 있다.
갑자기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향로봉 시’가 생각났다. ' 만국 도성은 개미둑이요(萬國都城如蛭蟻)
고금 호걸들은 초파리라(千家豪傑等醯鷄). 창에 비친 밝은 달을 깔고 누우니(一窓明月淸虛枕)
무한한 솔바람 운치가 끝이 없네(無限松風韻不齊).
속세의 부귀영화가 무엇이랴. 여기가 정토(淨土)다. 여기 향일암 스님이 한없이 부럽다. 산은 청정법신(淸淨法身)이요 물소리는 장광설(長廣舌)이다. 몸을 정토에 놓고 어찌 구구히 언어로 법(法)을 구하랴.
한동안 도량에서 머물고 하산하여 돌아오는 길, 이군이 차를 세우고 동백꽃 꺽어 두 선녀에게 바친다. 그들이 각각 웃으며 꽃을 머리에 꽂으니, 정토에서 방금 하강한 선녀의 옥같은 피부에 심홍(深紅)의 꽃빛이 어울린다. 네사람이 서로 쳐다보며 즐거워 하였다.
이장군이 잠시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늙은이 행세한 것이다.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러 가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 바위 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수로부인이 그 꽃을 보고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주겠소' 하자, 모두 안되겠다고 하였으나, 곁에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한 늙은이가 그 꽃을 꺽어 바치며 <헌화가>를 지어바쳤다는 이야기 일부를 재현한 것이다. 문득 차창 밖을 보니 춘흥(春興)에 겨운 초록바다는 끝없이 출렁이고, 차는 지향없이 한없이 달린다. 서울에서 천리 끝 아득히 먼 이곳은 완연히 봄이다. (2003년 봄)
2003년 봄
첫댓글 이번 가을인 줄 알았소이다.
십수년 전, 좋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