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언 의주부윤이 의주에서 핀 기린비 화(花)◎ 북쪽 지방 의주부윤으로 부임하여 위민정치.정하언은 1747년 8월12일 영조 23년의 명에 따라 의주부윤으로 부임하였다. 의주는 서쪽 갓의 요해지로 중국 화물을 통괄하는 곳으로 매번 부윤(府尹)에 돌리게 하여 통변(通辯)과 포장화물에 불법이 있는지 검영하는데 속관(屬官)이 욕심이 많은 것 같아 보여 중국의 잘 아는 지인으로 부터 불법 화물 받기에 금지하였으며, 일찍이 어떠한 물건도 받지 아니하였다.그리고 녹봉을 지급하고 남은 곡식은 다른 창고에 두었다가 백성의 잡역(雜役)을 면하게 하여주니 이름하여 찰미고(察眉庫)라 하였다. 저축된 돈과 곡식은 만(萬)을 넘쳤으나 공직의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올 때에는 모든 자료를 공부상의 장부에 기재하였고 빈손으로 왔기에 주변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구동성으로 논하기를 부윤중 청명(淸名)한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전에는 한(韓)이 있었고 후에는 정(鄭)이 있다고 하니 여기서 한(韓)은 한지(韓祉)이다 하였다.의주부 백성들은 정하언과 이종성, 권일형 세 사람의 치적이 많아 이에 대하여 기린비(紀惠碑) 세워주었다.그러나 한반도가 휴전선으로 나누어져 의주는 북한지역에 있으므로 갈 수 없어 연구의 한계가 있다. 필자의 미래나 후손과 독자들에게 의주에 있는 정하언 발자취에 대해 향후 연구과제로 남기고 싶다. ◎ 섣달 20일 인사[원문] -정하언 작-丁臘月卄日第夏彦 拜/ 別懷尙如百歲行盡矣積雪滿關/ 寒上愁絶懷人益[음역]정랍월입일제하언 배/ 별회상여백세행진의적설만관/ 한상수절회인익[해설]섣달 20일에 하언 인사드립니다./ 백세를 누리세요.마음이 씁쓸합니다./ 여기 의주는 눈이 많이 쌓였습니다.날씨는 추워지고 헤어진 사람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 압강(鴨江)의 이별 잔[원문]鴨江船遊聯句/一江夷夏際良/ 會偶然成美仲園/ 鋼金鮮躍穿雲/鐵笛橫華伯拔椎/ 還艶態嗚鏑角/邊聲君慶明日/ 星軺發華休辭/.別斝傾[음역]압강선유연구/일강이하제량/ 회우연성미중원/ 강금선약천운/철적횡화백발추/ 환염태오적각/변성군경명일/ 성초발화휴사/별가경[해설]압록강에서 시를 짓고 뱃놀이를 하네!한편 강줄기가 오랑캐(청국)와 국경을 같이하네!미중의 뜨락에 친구들이 우연히 모였네!줄 타는 고운 소리가 구름을 뚫고 나가네!화백 원경하가 피리를 비스듬이 불어대니 등골이 오싹하네!소리나는 화살이 기염을 토하고 날아올 듯하네!군경 조영국과 밤새 놀다보니다음날 원경하 화백은 작은 수레에 태워 보내며 이별 잔을 나누었다네!◎ 백두산 여행[원문]西限鴨江南止海我車常向遊白/ 頭寂之空山臥問說 君登出日舟/渾天儀衆具君腹天欲尋根何處衆/今放芥舟向東去茫之雲海百蠻浮/海能負地天涵海語大難逢吊(弔/仝意)洈翁/海君行水雖萬里東天盡處常無窮[음역]서한압강지해아차상향유백/두적지공산와문설 군등출일주/혼천의중구군복천욕심근하처중/금방개주향동거망지운해백만부/해능부지천함해어대난봉적(조/동의)위옹/해군행수수만리동천진처상무궁[해설]압록강은 서해로 흘러 남쪽의 바다에서 멈춘다네!난 수레에 올라 사방을 구경하며 백두산에 간다네!가다가 고요한 산속에 누워 친구들과 떠들기도 했다네!우리는 동트는 태양을 배에서 보기도 하였다네!배꼽시계가 배고품을 알려주어 어떻게 해결할까도 했고,작은배에 여러명이 타고 있는데 먼 구름들이 한없이 펼쳐서 동쪽으로 갔다네!땅을 업고 하늘을 머금고 있는 운해,우리 늙은이가 구름 속에서 조난당한다는 말도 전하고 있네!우리 친구들은 한없이 수만리 동쪽으로 계속 강행군하였으나 펼쳐진 운해의 끝은 알 수가 없었다네!의주부윤 정하언.hwp32.00KB◎ 임지평(任持平)[원문 및 음역]-정하언 작-任持平記室入納 /灣尹侯狀/ 上方日(임지평기실입납/ 만윤후장/상방일)[해설]지평 벼슬하는 임씨에게 보낸 의주부윤의 안부편지, 초순에 의주부윤시절(1747~1749) 작성된 글이다. <다른인사는 조선후기 의주에서 어떤일이 있었을까?> <청장관전서> 제 66권 '입연기入燕記' 의 일부(출처: 민족문화추진회)
12일(임인) 바람이 불었다. 8시쯤 출발해서 12시쯤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넜고 오후 4시에 삼강(三江)을 건넜다. 25리를 가 구련성(九連城)에서 점심을 먹고 35리를 가 금석산(金石山)에서 유숙했다.○ 부윤(府尹)이 강가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세 곳으로 나누어 수검(搜檢)을 끝낸 뒤 배에 올라 삼파강(三派江)를 건넜다. 해는 이미 오후 4시가 되었다. (맨 윗부분은 12일의 일정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각 ○ 부분은 세부적으로 설명 들어가는 것입니다. 위의 ○ 부분을 보면, (의주)부윤이 송별연을 베푼 뒤 압록강이 아니라 삼파강을 건넜고 그 때의 시각은 4시 무렵이라 하였는데, 맨 위의 종합된 부분과 비교해 보면 의주부윤은 압록강을 일행과 함께 건너와서 삼강 혹은 삼파강이라 불리는 강 앞에서 송별연을 베푼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 무렵(정조 2년, 1778년)에도 압록강 너머가 곧바로 중국땅은 아니라는 의미겠지요. 사신에 대한 송별연이라는 것이 남의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좀 우습지 않겠습니까?) 압록강의 근원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오는데, 예전의 마자하(馬訾河)이다. 물길이 사납고 급한데다가 바람도 순하지 못했다. 하늘이 장강(長江)을 그어 두 나라의 경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강의 동쪽과 서쪽의 풍기(風氣)가 아주 달랐다. 강가에 왕왕 군대들의 수막(戍幕)이 있고 말을 갈대밭에 놓아 먹이고 있었다. 이미 그림 속에 든 기분이었다. 강 서쪽은 산수가 수려함은 물론 수림이 울창하고 아름다워 농사짓고 살 만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다워서 평양(平壤)의 대동강 가의 경치보다 훨씬 뛰어났다. ○ 구련성(九連城)은 옛날 애양성(靉陽城)이다. 명 나라 때 진강보(鎭江堡)를 설치했었는데, 성터가 남아 있어 분별할 수 있었다. 시냇가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들에서 먹으니 한결 정결한 기분이 들었다. 달빛을 받으면서 금석산(金石山) 밑에 이르니 흰 배꽃이 멀리 잇닿아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고, 괴이한 새의 울음 소리가 때때로 빈 산에 메아리쳤다. 밤은 이미 3경(更)이었다. 곳곳에 화톳불이 있고 그 가운데 인마(人馬)가 노숙(露宿)하고 있었는데, 호랑이를 막는 그물을 둘러쳤다. 밤에 서리가 내리니 달빛이 더욱 아름다웠다. 작은 장막을 치고 유숙했다.13일(계묘) 일기가 청명하고 화창했다. 32리를 가 총수(葱秀)에서 점심을 먹고, 28리를 가 책문(柵門)에서 유숙했다.○ 금석산(金石山)에서 8리쯤 가면 길 남쪽에 온천(溫泉)이 있는데, 바닥이 벽돌을 깔아놓은 것 같았다. 여기서 10여 보쯤에 천연으로 생긴 돌우물이 있다. 입구는 넓고 밑은 뾰족하여 직삼각형으로 되어 있었다. 빗변의 길이가 각각 2척이고 삼면이 똑같이 평균했으며, 뾰족한 밑바닥에는 콩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하나 있다. 고기 눈만한 그 구멍으로 물이 솟아나왔고 웅덩이에 차면 흘러넘쳤다. 뿌옇게 안개가 껴서 손으로 더듬다가 물에 닿으면 뜨거워 견딜 수 없을 정도였고 휘저으면 더욱 뜨거웠다. 옆의 반석은 모두 그을렸고 새파란 잡초가 샘 기운에 젖어 있었다. ○ 도중에서 북으로 송골산(松鶻山)을 바라보니 솟은 봉우리가 불꽃 같아 흡사 우리나라의 관악산(冠岳山)과 같았다. 그러나 빼어나고 윤택하기는 이 산이 더한 것 같다. 금석산에서 30리쯤에 탕참(湯站)이 있었다. 길 좌우에는 깨진 주춧돌과 무너진 담들이 있었고, 가끔 꽃을 조각한 맷돌이 있는가 하면 또 폐기된 우물도 있었다. 길 북쪽 35보쯤에 무너진 성이 있었다. 높이와 너비가 한두 길쯤 되는데 벽돌로 쌓고 회로 틈을 메웠다. 부방 건량관(副房乾粮官) 조명회(趙明會)가 마두(馬頭)를 시켜 성의 회를 긁어내게 하면서,“오래된 회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일찍이 종의(瘇醫) 임국서(林國瑞)도 '오래 된 회를 약에 타서 나력(瘰癧 연주창)에 붙이면 구멍이 생긴다. 구멍이 생기면 근처에 있는 몽실몽실한 담(痰)이 모두 그 구멍으로 나온다.’ 하였다.”했다. 대개 회는 빨아내는 공효가 있기 때문이다. 탕참은 아마도 예전 탕씨(湯氏)의 유허(遺墟)인 것 같았다. 고성(故城) 북쪽에 있는 작은 산도 이름이 탕산(湯山)이었다. ○ 탕참으로부터 2리쯤 가면 길 남쪽에 긴 시내가 졸졸 흐른다. 시냇가에는 작은 산이 가파르게 솟았고 석벽이 겹겹이 서 있다. 푸른 나무가 우거져 아름다웠으므로 총수(葱秀)라고 이름했나보다. 총(葱)은 푸르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총수도 경치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문희(文僖 예겸의 시호) 예겸(倪謙)이 서흥(瑞興)을 지나다가 총수라 이름지었다. 다만 이곳의 숲은 성긴 편이고 우리나라의 것은 짙은 편이다.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 도중에서 봉황산(鳳凰山)을 바라보니 아득히 멀어서 구름장같이 보였다. 석양(夕陽)에 책문(柵門) 밖에 이르렀다. 북쪽에는 높은 봉우리가 솟았고 남쪽에는 긴 시내가 흐르고 있었으며, 서쪽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는데 겨우 한 길 남짓하였다. 목책 가운데에 큰 판자문을 만들었고 볏짚으로 덮었다. 군사들은 검은 옷에 붉은 모자를 썼고 몸집이 장대했다. 책문 안에 늘어섰다가 때때로 문 밖으로 나가기도 했는데, 처음 보니 기가 질렸다. 하루 전에 청 나라 말을 하는 통역관 한 사람을 보내어 달라고 하고, 사신이 당도하면 문어사(門御史)가 봉황성(鳳凰城) 성장(城將)에게 통지하여 성장이 온 뒤에 문을 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또 들에서 노숙하였다. 저녁 무렵에 목자(牧者) 한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말을 타고 와서 큰 소리를 지르니, 들판에 흩어져 있던 망아지와 송아지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여들었다. 마치 명령을 들으려는 것같이 했다. 목자가 또 소리를 지르고 빨리 달리니 짐승들이 풍우(風雨)처럼 따라갔다. 그리하여 모두 책문으로 들어갔다. 이 역시 우리나라에는 없는 일이었다.(책문까지 가서야 청의 관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글쓴이 : 안양사랑 원글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