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뉴스 267/1011]아내와 함께한 가을소풍逍風 “베리굿”
얼마만일까? 하루 반짝, 아내와 함께한 가을소풍이? 어쩌면 결혼생활 36년만에 처음인 듯도 같다. 물론 제주도와 해외여행을 단 둘이 한 적은 두 번 있었지만. 아침 8시 용인집에서 출발, 밤 10시 30분 돌아오기까지 제법 긴 시간을 투닥투닥 한번 하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도 기록일 듯. 지난 광복절 연휴, 제주 2박3일 여행이후 처음이다. 이번 나들이는 한글날 연휴를 맞아 여동생부부가 우리에게 휴가를 준 셈이나 마찬가지.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제대로 휴가하기가 어려운 것은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하다. 1년에 한번은 해외여행을 했건만, 그것을 하지 못하니 늘 일에 빠진 아내의 스트레스는 어디에다 풀까? 나로서도 어른을 모시고 있으니(사실은 모심을 당하고 있다), 며칠 고향집을 비우기가 조금 거시기하기 때문이었다.
그제 하루는 아들집에서 손자와 재밌게 시간을 보내고, 아들로부터 직접 해준 ‘엄청 거한’ 점심을 대접받았다. 돌아오는 길, 내일 아침 일찍 서둘러 가평의 ‘잣향기푸른솔’에 가자는 것이다. 불감청고소원. 축령산 자락엔 수십 미터가 되는 잣나무들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피톤치드가 가장 왕성하게 나온다는 11시 무렵, 이리저리 뻗친 호젓한 오솔길을 늙어가는 아내와 손을 잡고 두어 시간 거닐다. 소요유逍遙遊다. 급할 것도, 너무 느릴 것도 없는 만보漫步의 소요유를 즐겼다.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다른데, 다행히 걷는 것만큼은 서로 좋아한다. 지난해 스위스와 프랑스 28일 동안 둘만의 여행에서는 날마다 평균 2만걸음 이상을 걸었으니.
잣나무 방울을 처음 봤다는 아내와 걸으며 이런저런 밀린 얘기를 나눈다. ‘잣나무 백柏’자를 알려주며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의 뜻도 물어본다. 날씨가 추워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 잎이 나중에 시들어 떨어진다는 뜻으로 논어의 자한편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모를 줄 아냐며 눈 흘기는 아내가 고웁다. 격주 또는 월말부부가 된지도 1년이 훌쩍 넘었다. 일상을 같이 하지 못하니 서로 애뜻한 그 무엇이 생기는 것같기도 하다. 오래 살다보면 이런 날도 필요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내가 없는 ‘나홀로 삶’이 100% 좋을 게 뭐 있겠는가. 좋은 점보다 나쁘고 불편한 점이 훨씬 더 많다. 아무렴.
이왕 나선 김에 속초나 강릉에서 회 한 접시와 맛있는 커피 한잔 먹으러 가자, 부부는 일심동체. 운전은 교대로. 그런데 중도포기하고 싶을 만큼 멀어도 너무 멀다. 또한 악몽의 영동고속도로 주말 교통체증이 겁이 난다. 그래도 내친 김이다. 언제 이 드높은 가을하늘 흰구름떼를 볼 것인가? 혼자 보기 아까워 자는 아내를 깨웠더니 투덜댄다. 그렇게 도착한 게 3시가 훌쩍 넘었다. 바다는 늘 좋다. 봄바다, 여름바다, 가을바다, 겨울바다. 끊임없이 너울대는 저 파도, 저 흰 포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이 씨-언하다. 뭔가 막힌 곳이 뻥 뚫린 듯한, 이래서 쌓인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할 것이다.
모듬회 한 접시 작은 게 9만원. 주저없이 시켰다. 광어, 우럭, 도미 그리고 약간의 쓰끼다시. 와사미(청겨자)를 좋아하는 취향도 같다. 회는 간장이나 초고추장보다 된장에 찍어먹는 게 더 맛있다. 입에서 녹는 것같은 부드러운 회, 게다가 ‘듬뿍 와사비’에 머리 속은 터질 듯 찌릇찌릇. 식당에 들어오기 전에 선선한 가을바람과 바다를 보며 눈이 호사를 누렸는데, 이번엔 입이 모처럼 호사豪奢다. 좋다. 이런 시간이 얼마만인가? 신혼여행 길이라면 더욱 좋았을 터.
당초에는 테라로사 공장에 가서 커피를 시음하려 했으나, 돌아갈 시간이 걱정되어 안목 카페거리로 방향을 틀었다. 스타벅스 2층에서 나는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 아내는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시다. 오후 5시반 출발. 불길한 예감, “밤 10시나 도착할까?” 방정맞은 말은 현실이 됐다. 국도든 영동고속도로든 꽉 막혀 기어간다. 졸음이 밀려오는 통에 1시간여를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기다. 재밌는 것은 그제 다섯 살 손자가 가르쳐준 ‘역사는 흐른다’라는 노래를 틀어놓고 따라부르고 배우기에 바쁘느라 지겨운 마음이 훨 덜했다. 누가 노랫말을 지었을까? 구절구절 재밌다. 배우기도 일도 없다. 어디 시간이 널널한 분들은 검색하여 한번쯤 들어보시라. 5절까지 있지만, 참고삼아 1절만 적어놓는다.
<아름다운 이땅에 금수강산에/단군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고구려 세운 동명왕/백제 온조왕/알에서 나온 혁거세/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신라장군 이사부/배결선생 떡방아/삼천궁녀 의자왕/황산벌에 계백/맞서 싸운 관창/역사는 흐른다>
10시 30분 도착. 출발한지 14시간 30분만이다. 운전만 8시간이 넘는다. 휴우- 어쨌거나 무사고, 가을소풍 한번 잘했다. 씻고 네플릭스로 ‘계춘할망’ 영화를 보다. 아내는 봤지만, 내가 쏙 빠질 영화라며 같이 봐주겠단다. 고마운 일이다. 한때 조영남의 아내였다던 윤여정, 물질을 하는 할머니로서 연기를 어찌나 잘 하는지, 백전노장이 따로 없다. 손지(손녀) 혜지를 키우다 잃어버린 지 12년, 그후의 기적같은 상봉, 출생의 비밀, 혜지의 방황, 화가가 된 혜지의 이야기가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이 여러 곳이다. 나는 벌써 몇 번째 울고 있다. 두 번째 본다는 아내도 훌쩍인다. 휴먼 무비에 다름아니다. 같이 영화 한 편 본 것도 얼마만인가. 참 좋은 영화, 잘 봤다. 안 보신 분 있으면 꼭 찾아서라도 보시라. 하루가 뿌듯하다. 보람찬 주말. 자정이 넘었다. 이젠 또 내일을 위
첫댓글 친구를 사귈땐 술을 마셔보고.화투를 쳐보고.
담에 여행을 해보라했던가?
유행가 노래 중“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라는 노랫말이 생각납니다.‘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 해’라는 말이 무슨‘협박’(?)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생각할수록 옳은 말입니다. 언제나 후회는 때늦은 일로 인해 생기는 법이지요.
우리부부도 하도 많이 여행을 해봐서 차만 타면 순서대로 커피 과일 과자 음악을 순서대로 실행하며 긴긴 여행을 묵묵부답 재미없는 여행을 즐기는데 초등학교 선생님마냥 조곤조곤 즐기며 여행하는 친구가 부럽다.
나도 있을 때 잘하고 싶은데 ㆍ마음 가득한데 실천이 안되네ㆍ
나도 우천 부부처럼 따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