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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톱카프 궁전
[ 터키반도의 역사 ]
터키가 자리 잡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터키는 약 76만 평방 km로서 한반도의 3.5배의 크기입니다. 아나톨리아의 뜻은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해 뜨는 곳, 동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로마인들은 이를 소아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최초로 통일 국가를 건설한 것은 히타이트인 입니다. 기원전 1300년경에 히타이트 세력이 약해지자 프리기아인들이 에게 해로 들어와 앙카라에서 서남쪽으로 약 90km 떨어진 고르디온을 수도로 정하고 부유한 농업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손이 닿기만 하면 금이 되었다는 미다스 왕(1)과 풀리지 않는다는 고르디온 매듭(2)의 현장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는 기원전 6세기 경 페르시아의 지배에 놓이게 됩니다. 카파도키아, 폰투스 등의 소국이 생긴 것이 이즈음이었습니다.
* 고르디온의 위치
(1) 미다스 왕 이야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와 그의 스승인 실레노스가 미다스 왕이 다스리는 프리기아로 여행을 왔습니다. 술에 취한 실레노스는 포도밭에서 잠이 들어 일행들과 헤어지게 됐죠. 다음 날 포도밭 주인은 술에 취해 어찌나 뒹굴었는지 밭을 엉망으로 만든 실레노스를 벌해 달라며 미다스 왕에게 끌고 갔습니다. 하지만 미다스 왕은 실레노스가 디오니소스의 스승인 걸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무려 열흘 동안 잔치를 베풀며 그를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디오니소스는 미다스 왕의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미다스 왕은 자신의 손에 닿는 것은 뭐든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했고, 소원은 즉각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통에 음식조차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딸마저 황금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미칠 지경이 된 미다스 왕은 그제야 자신의 소원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디오니소스에게 찾아가 없던 일로 해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했습니다. 이런 그를 긍휼히 여긴 디오니소스는 파크톨로스 강에 몸을 씻으라고 알려 줬고, 그대로 한 미다스 왕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마이다스의 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이다스'는 '미다스'의 영어식 표현으로, 미다스 왕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손만 대면 뭐든 황금으로 변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미다스의 손'처럼, 어떤 일이든 하는 일마다 성공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마이다스의 손'을 가졌다고 얘기합니다.
(2) 고르디온의 매듭
알렉산더는 기원전 334년 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연합군 3만 5천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건너가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고 전진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지금의 터키 앙카라 근방의 고르디온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이 도시에는 ‘고르디온의 매듭'이라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즉 도시의 신전 기둥에 매어져 있는 수레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하는 왕이 된다고 하는 예언이 전해지고 있었던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손으로 풀어보려고 낑낑거리다가 하나같이 실패했습니다.
* 매듭을 자르는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이것 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단번에 그 매듭을 잘라 버렸습니다. 그날 밤 하늘에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였습니다. 하늘이 영웅을 알아본 겁니다. 손으로 풀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컬럼버스의 달걀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후 로마가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는 작은 국가들을 정복해나갔는데, 기원전 2세기경에는 페르가몬과 기원전 1세기경에는 폰투스를 장악하여 소아시아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로마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아나톨리아의 에게해 지역에 원시 기독교와 관련한 유적과 유물들이 산재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후 동로마제국이 10세기경까지 이 반도를 지배했습니다.
* 셀주크 군대
터키인들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10세기경입니다. 터키족은 900년경 아나톨리아에 강력한 셀주크 제국을 건설하여 독특한 셀주크 문화를 만들어나갔습니다. 셀주크가 몽고군에 대패한 다음에 제국에 속해 있던 소국들이 셀주크의 지배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이스탄불 남쪽에 있는 부르사 지역의 오스만 토후국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바로 이 오스만 토후국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오스만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오스만 제국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함락함으로써 오스만의 팽창은 날로 커지게 되었으면, 16세기에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걸쳐 위세를 떨치는 막강한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17세기부터 비실비실해지면서 ‘유럽의 병자’라는 비아냥을 듣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패전국이 되는 독일편에 가담했습니다. 그나마 줄까지 잘 못 서는 바람에 쫄딱 망해버렸습니다. 그 당당하던 오스만 제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그리스인들이 아나톨리아의 종주권을 주장하고 반도 깊숙이 군대를 끌고 들어오는 바람에 터키라는 나라는 바람 앞에 등잔불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나중에 국부(國父)라고 추앙을 받고 있는 무스타파 케말(1)이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인들에 대항해 나갔습니다. 그는 기어코 그리스인들을 반도에서 내쫓아 버리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1) 무스타파 케말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터키의 국부(國父)라는 의미로 ‘케말 아타튀르크’라고 불립니다.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였습니다. 파샤는 군사령관이나 고급 관료에게 붙이는 칭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 중에는 혁혁한 공훈을 세웠습니다. 1차 대전후 수도 이스탄불 등이 연합군에게 점령당하자 조국의 구원 투수로 나섰습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 갈리폴리 반도에서 연합군과 터키군 사이의 피 터지는 싸움을 말하는데 나중에 소상히 소개할 예정입니다.
케말은 앙카라에서 대국민회의를 개설하고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술탄 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세브르 조약을 강요당하고 그리스군이 터키 반도 깊숙이 침입해오자 민족 독립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군을 쫓아냈습니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문자의 통일, 민족 산업의 육성 등 과감한 근대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케말은 갈리폴리 전투에 임하면서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우리에게는 노예가 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죽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의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을 것이다.”
[ 이스탄불의 명소2, 오스만 술탄의 궁전-톱카프 사라이 ]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메흐메드 2세는 비잔틴 제국이 남긴 궁전에서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비잔틴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황제에 걸맞는 새로운 궁전을 콘스탄티노플 구도시의 중심지에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리하여 마르마라해와 보스포러스 해협과 골든 혼으로 둘러싸인 곳에 톱카프 사라이라는 궁전이 세워졌습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며 사라이는 궁전을 의미합니다. 궁전 입구 양쪽에 두 대의 대포가 배치되었는데, 궁전 이름은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톱카프 궁전은 19세기 마흐무드 2세 술탄(1808~1839)때까지 약 380여 년 간 오스만 제국 황제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 톱카프 정문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국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최고기관이었습니다.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문은 바브 휘마윤이라고 불리는 황제의 문, 두 번째 문은 바뷔스 쎌람이라고 불리는 경의(敬意)의 문, 세 번째 문은 바뷔스 싸데라 불리는 지복(至福)의 문입니다.
톱카프 궁전의 입구인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스만 황제와 궁전을 지키는 예니체리(1)라 불리는 근위대가 위치하여 별칭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부릅니다.
(1) 예니체리
예니는 '새로운(新)', 체리는 '군인(軍)'이라는 뜻으로,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지역 내 크리스트 교 집안의 소년들을 뽑아 술탄의 친위 부대로 만든 것입니다. 이들은 궁성 학교에서 엄격한 훈련과 교육을 받았는데, 오스만 제국의 요직은 주로 이들 궁성 학교 출신자들이 차지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이들의 권력이 너무 커져 술탄을 내쫓기도 하였고, 부정부패가 심해 오스만 제국의 개혁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 예니체리 군대의 행진
입구 정면 벽에는 아랍어로 된 “알라여, 이 궁전을 지은 사람의 영광이 영원토록 하소서, 알라여, 그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소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두 번째 경의의 문을 지나면 또다시 넓은 마당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하는 디반 건물과 거대한 왕실 주방 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국무회의와 같은 디반 회의가 처음에는 일주일에 네 번 개최되었으나, 점차 줄어들다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일주일 중 화요일 하루만 개최되었습니다. 이 마당의 또 다른 특징은 이곳에서 각종 의식이 열렸다는 점입니다. 출정식, 황제 폐위식, 왕세자 할례식, 공주 결혼식, 외국사절 접수 등 각종 의식이 예니체리 근위대 및 대신들의 화려한 복장과 함께 열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스만 제국의 위용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 궁전 약도
마당 오른쪽에 있는 주방 건물은 황제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으며, 하루에 양 200마리가 소비되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지복의 문은 황제와 황제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곳 마당에서 황제의 즉위식이 열렸습니다. 이곳에는 금남(禁男)의 구역으로 유명한 하렘(아래에서 설명)이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인 슐레이만 황제 시대에는 하렘에 있는 사람 수가 천여 명에 이르렀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습니다.
톱카프 궁전은 세 번째 마당에서 보듯이 마르마라해와 보스프러스 해협을 바라보고 있고 숲으로 싸여 있어 경관이 뛰어나게 아름답습니다. 이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지은 건축물로 유럽식의 궁전과는 구조나 실용면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유목민족의 건물답게 거대한 군막사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해줍니다.
< 하렘 >
* 당시 하렘 풍경
하렘은 술탄의 왕비와 후궁, 그리고 자녀들의 거처로 이용되었던 곳입니다. 하렘은 당시 술탄이나 거세한 환관들을 제외하고는 남성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 현재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는 곳은 술탄과 술탄의 부인, 어머니, 환관, 여자 노예들이 살았던 방인데, 술탄이 거주했던 만큼 호화로운 샹들리에나 화려한 타일, 장식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하지만 창문마다 붙어 있는 굵은 쇠창살로 하렘에 있던 여자들이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는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렘은 대단히 많은 여자 노예를 수용할 수 있었는데, 1603년에는 그 수가 266명이나 되었습니다. 하렘에 들어가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습니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처녀 노예들만이 선발과정을 거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술탄에게 선물로 바쳐지거나 전리품으로 잡혀온 여자들도 있었고, 노예시장에서 팔려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 하렘의 왕초(?)
그녀들은 시종과 비슷한 과정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선 이슬람의 규칙들을 배운 다음 온갖 기예를 쌓아야 했는데, 이러한 과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녀들을 완벽한 여자로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노예들이 술탄에게 속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일단 교육이 끝나면 지참금을 받아 시종 출신의 고위 인사와 결혼했습니다.
하렘 전체의 권력은 술탄의 어머니인 술탄 발리데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고, 아들인 술탄이 먼저 죽을 때에는 술탄이 살아 있을 때까지만 존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술탄의 자리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 하렘의 여인들은 무자비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 터키에는 터키탕이 없다 ]
“터키에 있는 매춘업소를 한국의 집이라고 부르면 한국인들은 과연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매춘업소나 다름없는 퇴폐 목욕탕을 왜 하필이면 터키탕이라고 부릅니까? 터키와 터키탕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1997년 8월 퇴폐 영업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물의를 빚고 있던 한국내 터키탕에 대해 주한 터키 대사관의 여성 외교관이 각 언론사에 보낸 터키탕 명칭에 대한 유감과 이 명칭을 바꿔달라는 서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터키탕은 원래 일본에서 유래하여 한국에 들어왔으나, 일본은 1980년대 중반 터키 정부의 항의를 받고 터키탕 대신 소우프 랜드(soap land)로 바꿨습니다. 일본에서의 터키탕은 원래 2차대전 패배후 진주한 미군들을 위한 성매매업소로 출발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강력한 항의를 받고 증기탕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옥스퍼드 사전에 의하면 터키탕은 뜨거운 열과 증기로 땀을 내며 몸을 닦고 마사지를 받는 목용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터키에는 우리나라에 있었던 그런 터키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영향으로 몸을 청결하게 해야 한다는 이슬람의 가르침에 의한 목욕 관습 등으로 터키인들은 자신의 몸을 닦는 것을 중요시하게 여겨 집에는 꼭 목욕시설을 두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목욕 문화를 이어 받아 터키화된 터키 목욕탕 하맘은 단순히 몸을 씻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사교와 교제의 장소였습니다. 터키의 전통 목욕탕은 이용 시간을 달리하여 남녀가 사용했습니다. 터키인들에게 목욕탕은 분리할 수 없는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터키의 공중목욕탕은 우리나라처럼 홀랑 벗고 목욕을 하지 않고 수영복 같은 것을 반드시 걸쳐야 합니다. 표를 사서 들어가면 바로 탈의장이 있고, 그 다음에는 공중탕이 나옵니다. 공중탕 한가운데는 뜨거운 물이 계속 나오는 탕이 있고 벽면에는 한 두 사람씩 앉아서 몸을 닦을 수 있는 수돗물이 있습니다.
목욕탕 가운데는 세 사람 정도가 누울 수 있는 대리석 침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돌을 ‘괴벡 타시’라고 하는데 누워서 쉬고 싶으면 여기에 누우면 됩니다. 대리석이 따뜻하여 기분도 좋고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나라와 같이 때밀이가 있는데 요금을 내고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때밀이들이 어찌나 힘이 센지 웬만한 한국 사람들은 참고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공중탕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자기 몸을 뜨거운 물 속에 담글 수 있는 탕이 나옵니다.
목욕탕에 온 사람들은 서로 등을 닦아 주기도 하는데, 한국 사람같이 몸에 털이 없는 사람이면 어른이라도 중,고등학생 정도로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터키인들은 원래 털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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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익한 터키 역사 문화 정보 잘 읽엇어요
수고하셧읍니다..